결혼과 출산, 그 험난한 여정의 시작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다.

by 물결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호기심과 환상으로 가득했다. 누군가와 결혼해서 같이 산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삶을 함께 하며 서로의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은 경험하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편과의 만남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웠다. 노총각 선배가 나와 친한 언니를 좋아해 샐러드를 사주겠다며 마련한 자리였다. 그 언니는 나를 포함한 팀의 여자 6명을 데려갔고, 당황한 선배는 분위기를 띄워줄 훈남 동생을 급하게 섭외했는데, 그가 지금의 남편이다. 마침 남편의 이상형은 똑똑한 여자였고, 나는 그날따라 아는 척을 많이 했다.


훈남 셰프에게 인스타그램 DM으로 밥을 먹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그저 사업 아이템이나 몇 개 팔아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나 한 번, 두 번 티격태격하다가, 세 번째 만남에는 점심시간에 맞춰 남편의 직장으로 찾아갔다. 남편은 까만색 차이나 칼라 작업복을 입고 땀 냄새가 나서 민망하다며 멀찍이 섰다. 쑥스러워서 웃는 그 모습에 '뿅' 가서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콩깍지는 그렇게도 생기더라.


그 당시 내 사무실과 남편의 자취집은 강남 한복판에서 500미터도 안 떨어진 거리였다. 코로나 시국, 잘 안되는 사업을 핑계로 우리는 매일 만났다. 새벽마다 데이트하고 몰래 집에 들어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열정적인 연애 끝에 나는 첫아이를 임신했고, 상견례와 혼인신고가 속전속결로 이어졌다. 식당 인원 제한이 50명이었던 시기라, 우리는 결혼식은 패스하고 바로 같이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나보다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임신한 나에게 매일 맛있는 밥을 차려주고 일하느라 지친 나를 세심하게 케어해줬다. 하지만 사업이 잘 안되던 터라, 나는 더 힘을 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영업을 뛰어야 했다. 남편은 그런 나의 매니저 역할을 하며 지냈는데, 첫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님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무서운 속도로 안 좋아지는 상태에 우리는 놀랐고, 결국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가서 아버님의 병간호를 도왔다. 아버님이 얼마 안 가 돌아가시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둘째 아이가 생겼다.

둘째를 임신하고도 강연을 다니고 전국으로 뛰어다녔으니, 돈은 버는 만큼 활동비로 나가고 생활비는 매달 마이너스를 찍었다. 결국 나는 사업을 접고, 학교로 돌아가 교사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1월 말에 아이를 낳고, 2월엔 과외를 하다가 3월에 기간제 교사가 되어 일을 시작했다. 태어난 지 30일 정도 된 둘째는 영유아 전담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했다.


퉁퉁 부은 내 몸과 푸석한 얼굴에 동료 선생님들은 당황하셨고, 모든 몸 쓰는 일에서 나를 제외시켰다. 안쓰러워하는 시선 속에서도 난 괜찮았다. 말 못 하는 아이를 종일 돌보느니, 차라리 12살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끔은 커피도 한잔 하고, 사람답게 화장하고 옷 차려 입고 나오는 것이 더 좋았다. 교사는 퇴근이 빨라 하원시키기에 좋았고, 요즘은 육아 시간 덕분에 한 번씩 일찍 나와 쉴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노력하는 대로 결과가 잘 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때로는 내 마음만큼 안 되는 일도 많다. 특히 사람의 마음이란 게 잡는다고 잡혀지는 게 아니더라. 그렇게 나는 결혼과 출산이라는 험난한 여정을 통해 겸손을 배웠다.


사업가의 야심과 모범생의 완벽주의로 시작했던 30대는, 예상치 못한 흐름 속에서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다. 돈을 벌기 위해 전국을 누비던 열정은, 이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교단에 서는 삶의 모습이 되었다. 결혼과 육아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의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들기보다, 그 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것을. 이제 나는 더 이상 완벽한 결과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의 삶 속에서 작은 감사와 배움을 찾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성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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