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두체제
마리우스의 초상을 본 평민파들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아, 저 사람과 함께 할 때가 좋았는데.’ ‘우리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이게 무언가.’
그 일로 카이사르는 단숨에 로마 평민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불꽃, 귀족파들의 전횡에 대한 불만,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정확히 꿰뚫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행동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조용히 카이사르를 위험인물로 점찍어 두었다.
카이사르의 본능적인 정치 감각이 그를 주변 인물에서 중심으로 자꾸만 밀어 넣었다. 이탈리아의 고교 역사 교과서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다섯 가지 자질을 적고 있다.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는 의지력 이 다섯 가지다. 교과서에 따르면 오직 카이사르만이 다섯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고전영화 ‘벤허(감독 윌리엄 와일러)’는 11개의 아카데미를 품에 안은 작품이다. ‘로마의 휴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등을 연출한 와일러 감독은 로마 개선식의 화려함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재현해냈다.
해전에서 집정관 아리우스의 생명을 구해준 벤허는 함께 로마의 개선식에 참가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임페라토르(군 사령관)가 누릴 수 있는 최고 영광이었다. 나중에는 황제만 개선식을 치르는 것으로 변질됐다.
벤허는 아리우스와 함께 4륜 마차에 올랐다. 아리우스는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썼다.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수많은 깃발들이 그들을 선도했다. 벤허와 아리우스는 황제를 알현했다. 개선식은 신전에 이르러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종료된다. 개선식은 모든 로마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63년 최고 제사장에 올랐다. 명예뿐인 자리지만 종신직이었다. 이듬해엔 법무관에 취임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이미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골칫거리였던 해적 소탕에 성공을 거둔데 이어 오리엔트 원정서도 공을 세웠다.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2년 수많은 군사들에 둘러싸인 채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브린디시 항에 도착했다. 로마법에는 여기서 군대를 해산하게 되어 있다. 홀로 로마로 들어 온 사령관에게는 개선식이라는 영예가 주어졌다. 하지만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왔다. 나중에 카이사르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숨죽인 채 폼페이우스의 다음 행동에 주목했다. 그가 군사행동을 취한 다면 로마 시내는 또 한 번 피비린내로 진동할 것이다.
병권을 손에 쥔 폼페이우스가 어떻게 나올까?
정작 폼페이우스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군대를 해산시켰다. 폼페이우스의 마음속을 지배한 단어는 권력보다 개선식이었다. 그는 실리보다 명분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성공보다 영광에 더 집착했다.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내왔다. 더 가져보아야 뭘 하나?
카이사르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나중에 개선식을 버리고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선택했다. 카이사르는 영광보다 성공에 더 무게를 두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결국 욕망의 차이였다.
폼페이우스는 대신 몇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의 집정관 출마와 부하들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줄 농지를 달라고 했다. 원로원은 쉽게 허락을 하지 않았다. 이 역시 새겨둘만한 대목이다. 그들은 이참에 폼페이우스를 길들이려 했다. 쉽게 얘기를 들어주면 나중에 더 큰 것을 주어야 한다. 노회한 정치인 집단다웠다.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폼페이우스를 그냥 두면 제 2의 술라가 될지도 모른다. 일단 술라처럼 되고나면 다음번엔 왕이 되려할 것이다. 로마인은 ‘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냈다. 왕정에 대한 고약한 기억 때문이다.
집정관에 출마하려면 본인이 직접 로마로 와서 등록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해외 원정에 성공한 사령관은 개선식 전까지 로마 시내로 들어 올 수 없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폼페이우스는 화려한 개선식을 선택했다. 원로원은 이틀에 걸쳐 최대한 뻐근하게 개선식을 치러 주었다.
3년 뒤 갈리아 전쟁에서 공을 세운 카이사르도 개선식을 가진 후 집정관에 출마하려 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경우처럼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로마법은 교묘하게 독재자의 출현을 억제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개선식이었다. 로마 모든 남자들의 로망인 개선식을 외면한 대신 최고 권력인 집정관에 올랐다. 실속 없는 퍼포먼스를 버리고 살아있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 카이사르다운 선택이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였다면 어땠을까?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호령한 이 세 사람의 기질은 서로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보다 더 실리적이었다.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사후 내전을 종식시켰다.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 그가 왕이 되려하면 어떡하나. 이런 원로원의 염려와 달리 그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원로원 의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원로원은 감사의 표시로 옥타비아누스에게 ‘성스럽고 존귀한’이라는 뜻을 지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새 이름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미처 몰랐다. 스무 살도 채 안 된 이 청년이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들보다 더 정치 고단자인줄은. 옥타비아누스는 티 안 나게 조금씩 원로원의 힘을 빼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초대 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끝까지 스스로를 왕으로 부르진 않았다. 왕이라는 이름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거부감과 굳이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의 명칭은 ‘Imperator Caesar Augustus Tribunicia Potestas·직역하자면 군사령관이자 호민관 특권의 보유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였다.
지금은 임페라토르를 황제로 해석하지만 당시엔 군 사령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왕이라는 거북한 이름을 피했지만 그 이상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을 희망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원로원의 치밀한 방해가 시작됐다. 원로원은 카이사르 아닌 다른 후보를 지원했다. 그들에게 카이사르는 여전히 위험인물이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적과 손을 잡아야 했다.
집정관으로 당선되기 위해선 폼페이우스의 지지가 절실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그를 지지하는 6만의 유권자가 있었다. 동방원정을 함께 다녀온 병사들이었다. 폼페이우스와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다져진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로마 시민권자인 그들은 민회에서 한 표씩을 행사할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저지른 악행 때문이다. 그가 동방에서 한참 싸우고 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그의 부인을 유혹했다. 로마 시민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형 스캔들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이런 종류의 스캔들에 관대했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사자인 폼페이우스의 속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귀국하자마자 아내와 이혼했다. 카이사르에 대한 그의 속마음은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저런 애송이가 감히 나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더구나 경력이나 로마 정가의 영향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남의 아내를 유혹한 남자가 뻔뻔스럽게 그녀의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염치없는 짓이지만 그대로 있으면 집정관은 물 건너가고 만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어떤 카드를 내밀어야 폼페이우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까? 한 때 아내의 정부였던 카이사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은 무엇일까.
뛰어난 군 지휘관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째 전략적 마인드를 갖추어야 한다. 손자병법은 “노여움으로 군사를 일으켜선 안 되고, 분노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훌륭한 지휘관이 되려면 감정보다는 이성, 흥분보다는 치밀한 전략을 우선시해야 한다.
둘째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 미리 예상한대로 전투가 흘러가면 누구나 이길 수 있다. 전투에는 늘 돌발적 상황이 발생한다. 예기치 않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돌파구를 찾아내느냐는 사령관의 몫이다.
마지막이 가장 어렵다.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그 점에선 노(魯)나라의 오기(吳起)를 따라갈 장수가 없다. 그는 백번 싸워 백번 모두 이겼다. 그는 병사의 상처에 생긴 고름을 입으로 빨아낼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그렇게 상처를 치료한 병사가 어머니를 만나 오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펑펑 우는 게 아닌가. 너무 감동해서 저러나. 병사가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에게도 오기 장군이 그 같은 일을 했다고 들었다. 감복한 너희 아버지는 목숨을 다해 싸우다가 결국 전사했다. 그러니 너도 곧 죽을 것 아니냐?”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기는 지극 정성으로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늘 이겼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병사들은 사막을 건너는 동안 오래 물을 마시지 못했다. 부하들이 어렵게 구한 물을 건네주자 알렉산드로스는 혼자 마시기를 거부했다. 병사들이 목말라서 고통을 받고 있는 데 자신만 물을 마실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로마를 떨게 만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추운 날씨에 병사들과 똑같이 야외에서 담요 하나만 두르고 잠을 잤다. 병사들이 그런 한니발을 죽기로 따른 것은 당연했다.
폼페이우스는 전쟁 영웅이었다. 그가 상승(常勝)의 장군이었다는 것은 이런 조건들을 두루 갖추었다는 의미다. 그 역시 제대한 부하들이 늘 눈에 밟혔다.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아직 충분한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카이사르는 군인 폼페이우스의 아픈 곳을 찔렀다.
당시 로마는 모병제였다. 병역을 마친 군인들에게는 퇴직금을 지불했다. 군인들은 그 돈으로 농지를 사 농민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국가가 그 많은 비용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령관들이 원정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에겐 너무 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한 때는 그의 자랑이었지만 현재는 마음의 짐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부하들의 퇴직금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폼페이우스가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는 지를 정확히 짚었다. 그 한 방에 군인 폼페이우스는 무너졌다. 어쩔 수 없이 아내를 건드린 남자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라고 무턱대고 카이사르 편을 들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