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루비콘강 2

by 성일만

해적에게 붙잡히다


마키아벨리는 ‘리더는 타고 난다’고 말했다. 귀족파 수장 술라는 리더의 자질을 타고 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 원정에서 악전고투했다. 어떤 전투에선 최후 방어선이 무너져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훗날 카이사르 역시 갈리아 전투에서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다.

전쟁 영웅이라고 반드시 정치 감각이 뛰어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대부분이다. 한신은 싸울 때 마다 이기는 장수였지만 정치적이진 못했다. 유방이 왕으로 봉해주며 살살 달래자 결기를 풀어버렸다. 결국 토사구팽(兎死狗烹:토끼 사냥이 끝나면 용도를 다한 개는 잡아먹힌다)을 당했다.

한신은 수 십 만 병력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했지만 유방은 오직 한 사람 한신을 발탁한 후 그를 잘 이용했다. 목적이 성취된 다음엔 용도 폐기했다. 술라는 한신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욕망과 그를 실현해가는 정치적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그리스 원정에서 성공을 거둔 술라는 이탈리아 남부 브린디시 항에 입항했다. 로마법상 군대 지휘관에겐 두 개의 뚜렷한 경계선이 있었다. 북쪽의 루비콘 강과 남쪽의 브린디시 항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군사령관은 반드시 군대를 해산해야만 했다. 군사들은 두고 홀로 로마로 들어 와야 한다. 이를 어기면 즉시 반역으로 간주됐다. 모든 동맹의 군사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시켰다.

술라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자 킨나를 상대로 내전을 선언했다. 카이사르도 훗날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로마 역사에서 오직 이 두 사람만 반역을 일으켰다.

훗날 똑같은 상황이 폼페이우스에게도 주어졌다. 그는 어떻게 했을까.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가졌다.

술라와 카이사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 사람은 이탈리아 역사에 관심 있는 소수에게 익숙한 이름이고, 또 한 사람은 세계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무엇이 그들의 차이를 가져온 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다. 주어진 상황이나 기회의 무게가 달랐을 지도 모른다.

내전은 2년 동안 이어졌다. 승자는 ‘귀족파’ 술라였다. 권력을 잡은 술라는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포로 로마노 광장에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의 목이 내걸렸다. ‘평민파’ 마리우스 편에 섰던 사람들은 모조리 제거됐다. 킨나의 사위인 카이사르도 ‘피의 광풍’을 피하기 어려웠다.

술라는 카이사르를 살생부 명단에 올려놓았다. 재난의 싹은 자라나기 전에 미리 잘라야 한다. 독재자일수록 미래의 적에 민감한 법이다. 비록 열여덟 살의 아직 어린 나이지만 곧 스물이 되고 언젠가 서른이 된다. 술라의 참모들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카이사르를 살려주자고 요청했다. 술라는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킨나의 딸과 이혼하라.’

카이사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살기 위해 이혼을 택했을까, 아니면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싸웠을까.

카이사르는 현실적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서 현실적 선택은 어떤 것일까.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방법. 송(宋)의 전술가 단도제는 병법 36가지를 제시하면서 가장 으뜸으로 달아나는 것을 꼽았다. 제 한 몸 지키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 카이사르는 해외로 도망갔다.

마침 카이사르의 아내 코르넬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와의 사이에 난 딸이 줄리아다. 그녀는 나중에 22살의 나이에 47살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다. 역시 아버지의 경우처럼 정략결혼이었다. 줄리아에겐 약혼자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딸에게 파혼을 강요했다.

카이사르의 머릿속에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어머니에 의해 약혼자와 파혼하고 킨나의 딸과 결혼했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당시엔 어머니의 처사에 심한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이번엔 그 스스로 딸에게 파혼을 강요했다.

카이사르는 결코 도덕적 성품이 아니었다. 몽테스키외가 카이사르라는 인물을 평하면서 ‘재능 못지않게 악덕도 지녔다’고 슬쩍 비꼰 이유다. 술라의 제안을 거절한 카이사르는 4년 동안 소아시아 일대를 전전해야 했다.

당시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는 산적과 해적들이 들끓었다. 수십 년 후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중 이 길에서 몇 차례나 산적들을 만났다. 카이사르 역시 가는 도중에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해적들은 카이사르에게 20 달란트 몸값을 요구했다. 일개 군단의 일 년치 연봉과 맞먹는 거금이었다. 이를 들은 카이사르의 반응이 기막혔다. 카이사르는 해적들에게 스스로의 몸값을 50 달란트로 올리라고 했다. 해적들은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돈을 구해오는 동안 카이사르는 해적들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았다. 50 달란트라는 거액의 몸값이 걸린 인질이었으니 당연했다. 해적들은 몸값을 받고 카이사르를 풀어 주었다.

카이사르는 즉시 인근 도시로 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서부영화에선 황금 마차를 탈취한 강도를 쫓아가자는 제안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자주 본다. 돈에는 사람을 모우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떼돈을 벌 수 있다고 하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렸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데리고 해적 굴을 찾아가 재물을 모두 되찾았다. 이 무렵 로마 정가에는 한 인물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카이사르에게 그는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야누스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둘 사이에도 당초 우열은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라이벌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시작은 다윗과 골리앗의 신장 차이처럼 현격했다.

독재자 술라가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독재자도 재벌도 죽음 앞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술라가 사라진 로마 거리에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키케로 같은 새로운 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카이사르는 초라했다. 특히 ‘마그누스(Magnus·위대한)’로 불리던 폼페이우스의 위세는 대단했다.

폼페이우스는 사병을 동원하여 술라의 내전에 참여할 만큼 위세를 떨쳤다. 사병들은 모두 아버지의 피보호자(cliens)였다. 로마에는 보호자와 피보호자로 구분되는 독특한 인적 관계가 존재했다. 약한 주종관계로 보아도 무방하다.

폼페이우스 가문은 피보호자들만으로 사병 군단을 꾸릴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 기원전 81년 이미 한 차례 개선식을 가졌다. 공직에 한 번도 나선 적 없는 25세 청년이 개선식을 가진 것은 로마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폼페이우스의 군인 이력은 화려했다. 스페인 내란을 평정했고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36살 젊은 나이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원로원 규정위반이었다. 로마의 규정에는 42살이 돼야 집정관 선거에 나설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야심가였다. 때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비도덕적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폼페이우스의 완악함을 이렇게 꼬집었다.

‘오리엔트 원정에서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는 그리스인들을 향해 “함부로 법을 말하지 마라. 나는 칼을 가지고 있다”며 위협했다.’

크라수스는 로마 제일의 부자였다. 예로부터 권력이 아니면 돈이다. 비록 이 둘을 가지진 못했지만 로마 최고의 변호사였던 키케로는 원로원의 이론가였다. 그들에 비하면 카이사르의 현재는 초라했다. 아무런 경력도, 돈이나 유명세도 없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가 되겠다는 욕망만은 결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젊은 카이사르가 신전에 모셔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상을 보고 “저 사람은 서른도 되지 않아 세상을 정복했는데 나는 이게 뭐람”이라고 투덜거린 일화가 소개돼 있다

카이사르는 출세의 첫 단계로 변호사를 택했다. 당시 로마의 변호사는 검사의 역할을 겸했다. 공직자 고소도 가능했다. 변호사 키케로는 고소 사건을 통해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대범하게도 술라파의 거물을 고소했다. 당시 그의 능력으로는 버거운 상대였다. 결국 소송에서 패한 후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카이사르는 이참에 그리스의 대학에서 유학하기로 작정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 로도스 섬의 대학을 선택했다.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시간을 벌게 했다. 귀국한 후에는 제사장 자리에 올랐다. 로마는 여전히 술라파 세상이었다. 선두주자는 역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카이사르의 출세는 더뎠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원래 앙숙 관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집정관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거친 손을 잡았다. 집정관은 로마 최고 관직이었다. 기원전 71년 두 사람은 나란히 집정관에 선출됐다.

그들에 비하면 카이사르 겨우 회계감사관에 불과했다. 선두주자들에 비해 한참 느린 걸음이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 밖으로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뜻하지 않는 사건 때문에 카이사르는 갑자기 로마 정가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야누스(Janus)는 두개의 얼굴을 가진 신이다. 고대 로마의 주택 출입문에는 어김없이 두 얼굴의 신, 즉 야누스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로마는 원래 다신교의 나라였다. 로마는 풍년을 기원하고 질병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 부족하다 싶으면 신을 해외에서 수입하기도 했다.

전염병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도입했다. 유명한 디오니소스(로마 이름은 바쿠스)도 로마가 수입한 신들 가운데 하나다. ‘고대 로마사’를 쓴 토마스 마틴에 따르면 야누스만은 그리스 신화에 없는 순수 로마 산(産)이었다.

로마인의 집안 내부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 따로 있었다. 조상에 대한 존중이 각별해 장례식도 화려하게 치렀다. 귀족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통해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했다. 로마인들은 결혼식보다 장례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마리우스의 부인이 죽었다. 카이사르에겐 고모였다. 마리우스는 술라와 맞섰던 ‘평민파’의 대부였다. ‘귀족파’들이 득세한 세상이었지만 마리우스 부인의 장례식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정국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매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귀족파들은 장례식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평민파들은 오랜 동안 정치적 박해를 받아 왔다. 마리우스 부인의 장례식에서 그들이 뭔가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들불을 예방하려면 작은 불씨 하나라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그런데 요주의 평민파 인물들은 모두 조용했다. 그냥 지나가나 싶었는데 엉뚱한 사람이 일을 저질렀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카이사르였다. 장지로 향하는 행렬에 마리우스의 초상을 턱하니 앞세웠다. 반역자의 초상을 본 귀족파들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장례식의 초상을 문제 삼자니 뭔가 구실이 마땅치 않았다. 장례를 존중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비난거리를 줄 수 있었다. 그대로 두고 보자니 당한 느낌이었다.

이 일은 로마 평민파들의 허한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긴 시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왔다. 권력은 귀족파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동안 속만 부글부글 끓여 왔다. 마리우스의 초상을 본 평민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카이사르는 그들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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