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루비콘강 1

by 성일만


친구를 사귀려면 남을 존중해야 한다. 누구를 존중한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제네바 한 초등학교 벽면에 새겨진 문구


순서


1. 로마제국과 루비콘강

2. 이스라엘과 요단강

3. 레테 망각의 강

4. 박정희와 한강

5. 러시아혁명과 네바강

6. 1917 가장 어리석은 전쟁

7. 몽골제국과 양자강


르네상스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중세 천 년 동안 신(神)의 보호에 지친 유럽의 순례자들은 그리스와 로마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그들은 그리스에서 인간을, 로마에선 세계를 다시 발견하고자 했다.

로마는 곧 세계였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교수에 따르면 팍스 로마나에 거주하던 모든 주민들은 로마 시민이 되길 희망했다. 이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서 로마를 패망에서 건져낸 기특한 발명품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로마 제국은 곧 세계를 의미했다.

로마는 어떤 나라였을까. 로마의 어떤 매력이 독일 황제로 하여금 자신을 카이저(Kaiser)라 부르게끔 만들었을까. 카이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BC 100~BC 44년)에서 따온 명칭이다.

뿐만 아니다. 러시아 황제를 뜻하는 차르(Czar) 역시 카이사르에서 유래됐다. 오늘 날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은 원래 로마의 것이었다. 히틀러조차 제 3제국의 깃발에 독수리를 빌려 썼다. 제 3제국의 원형은 신성로마제국이다. 그 원형은 고대 로마다. 심지어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도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로마인들은 그 길이 침략군에 의해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을 알고도 길을 닦았다. 길은 통로가 되어 사람과 문화를 교류시켰다. 로마는 그 길로 오가는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았다.

로마의 시인 클라디우스는 “정복자들 가운데 여왕이 아닌 어머니의 가슴으로 피 정복민을 안아 준 것은 로마가 유일했다. 로마는 정복한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로마제국의 속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로마인이 되길 희망했다. 바로 이 점이 이웃나라 그리스와 달랐다. 그들은 타 인종을 ‘오랑캐(Barbarian)’라고 배척했다. 그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인종을 이 범주에 몰아넣었다. 반면 로마는 오랑캐들에게조차 시민권을 허용했다. 심지어 트라야누스는 스페인 태생이었지만 로마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로마는 카이사르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카이사르의 생은 다시 루비콘 강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로마의 전기는 공화정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후 로마는 제정시대를 열었다.

로마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5현제’시대는 루비콘 강이 만든 역사적 결과물이었다. 5현제 시대는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서기 96년에서 180년 동안의 한 세기를 의미한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전기에서 후기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는 여성작가 시오노 나나미로부터 ‘가장 완벽한 남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인이면서 놀랄 만큼 명 문장가였다.

그의 유려한 문체는 키케로와 함께 라틴어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졌다. 여성들에겐 로마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역사학자 몸젠은 그를 ‘창조적 천재’라고 불렀다.

루비콘 강은 카이사르를 반역자에서 영웅으로 변모시켰다. 반역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반도에 머물던 로마를 세계의 지배자로 이끌었다. 2100년 전 로마의 루비콘 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정략결혼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의 수부라에서 태어났다. 서민층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탄생한 달은 나중에 그의 성 율리우스(Julius, 카이사르는 가문의 이름)를 따서 7월(July)로 표기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하위 공무원이었지만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어머니 쪽 가계는 더 화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 거주 지역에 산 것을 보면 경제적 여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의 창업자들이 그렇지만 그 역시 척박한 맨땅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들에 핀 야생화는 화단의 꽃보다 생명력이 더 강한 법이다.

12살 때 그는 내전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했다. 10대 소년의 눈앞에 아찔한 죽음들이 늘려있었다. 이 참담한 경험은 그를 진중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그의 고모부이기도 한 마리우스와 독재자 술라가 벌인 전쟁이었다. 나중에 그 자신도 폼페이우스와 격렬한 내전을 벌이게 된다. 정치적 갈등과 전쟁은 그의 숙명인 듯하다.

가난한 귀족들은 강렬한 신분 상승의 욕구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평민들이 쉽게 체념하는 운명을 그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평민들 편에 섰다. 기질 탓일 수도 있지만 고모부 마리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술라와 마리우스는 맞수였다. 귀족파인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로 난입했다. 이는 로마법상 명백한 불법 쿠데타였다. 귀족파는 평민파들을 대거 살해했다. 평민파의 수장 마리우스는 해외로 달아났다. 나중에 술라가 중동 원정을 떠나고 나서야 마리우스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한 번 권력을 잃고 고난을 겪게 되면 용서를 멀리한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다.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 수십 명을 죽이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로마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 가운데 무고한 희생이 늘어났다.

마리우스가 죽은 후 그의 정치적 동지 킨나가 집권했다. 열여섯 살이 된 카이사르는 아버지를 잃었다. 카이사르는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 혼인은 가장 효과적인 신분 상승 기회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혼인이었다.

킨나 측이 먼저 혼인을 제안했다. 로마의 새 권력자는 협력 세력이 필요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 카이사르는 정치적 이용가치가 높았다. 마리우스는 평민파의 상징이다. 그의 처조카를 사위로 삼으면 평민파의 지지가 혼수품으로 따라 올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사위는 카이사르에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와는 파혼했다. 카이사르의 결혼은 이른바 정략결혼이었다. 사랑이냐 조건이냐. 열여섯 살 소년에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다. 조건 하나만 보고 선뜻 결혼할 십대 소년이라면 매력 없다.

어머니의 집요한 설득이 있지 않았을까. 가난한 귀족 미망인에게 남은 욕심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들을 정치인으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집념. 10대에게 사랑은 죽음이라도 불사할 만큼 황홀한 감정이지만 어머니는 그것의 부질없음을 충분히 알 만큼 세파에 시달려 왔다.

카이사르의 약혼녀는 부잣집 딸이었다. 서민 거주지에 살고 있는 귀족 여인에게 이 조건 역시 거부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인 집안에서 자랐다. 권력을 쥐면 돈은 떡에 붙어 있는 고물처럼 함께 묻어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이냐 권력이냐.’ 카이사르의 어머니는 어렵게 결정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정치인 집안의 딸다운 선택이었다. 열여섯 살 소년 카이사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결혼은 금세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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