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요단강 1

by 성일만



요단강은 서구문명을 키운 젖줄이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수천 년 동안 서구문명을 떠받쳐온 두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두 기둥은 서구문명이라는 지붕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

이 둘은 서로 다투어 왔다. 오래도록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을 핍박했다. 근대 이후 후자의 우세가 드러나면서 전자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서로는 서로를 닮아갔다.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용인하면서 기특하게도 서구 이외의 문명에 대한 멸시라는 공통점을 발견해냈다.

요단강은 천국으로 향하는 문(門)이다. 강의 이편과 저편,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신성과 세속으로 구분을 강요받았다. 그 차이는 엄혹했다. 강은 소망과 사랑을 품고 있지만 때로 극렬한 증오를 표출하기도 했다.

저편의 무리와 뭔가를 나눠야할 때 사랑은 인색했다. 왜곡된 사랑은 일방적 증오의 가려진 뒷모습에 불과했다.

요단강은 원래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중동의 작은 강에 불과했다. 3천 년 일단의 무리가 그곳을 건너는 순간 강의 윤곽은 천국과 지옥의 경계로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천 년의 시차를 두고 요단강 서편에 두 개의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그 때마다 강은 몸살을 앓았다. 푸르러야할 강물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요단강을 품고 있는 중동 일대는 대 제국의 기원이었다. 모여 살기에 편리하지만 침략하기에도 용이했다. 최초의 제국 아카드와 로마가 이곳을 지배했고, 오스만 제국을 거쳐 대영제국이 유니언잭 깃발을 높이 세웠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위임 통치를 종료했다. 그와 함께 벤구리온 이스라엘 대통령은 역사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유대인들은 2천 년 만에 이 지역 주권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스라엘호의 항해는 오래 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출발부터 거센 폭풍우를 만나야 했다.

영국군이 철수한 다음 날 이스라엘은 바로 아랍과 전투를 벌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향후 치러야할 수많은 전쟁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은 아랍연합(1948년) 이집트(1956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연합군(1967년·일명 6일 전쟁), 아랍연합(1973년)과 잇달아 전쟁을 벌였다. 21세기 들어서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에는 매캐한 화약 냄새가 그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곧 시오니즘이다. 자신들의 축복받은 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 여러 언덕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의미는 점차 확대돼 예루살렘을 대신했다. 2천 년 이후엔 유대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진화했다.

시오니즘은 국경선과 시민권에 둘러싸인 강력한 군사요새다. 요단강은 신성과 세속을 구분하는 국경으로 시오니즘을 단단히 에워싸고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사증(VISA)이 필요하다.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야곱의 사다리’ 사증이다. 이를 지참하지 않은 자에게 요단의 서쪽은 금단의 땅이다. 피를 흘리지 않으면 입국이 불가능하다. 요단강과 ‘야곱의 사다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시오니즘은 단지 하나의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민족은 드물다. 그 점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유대민족의 이웃과의 불협화음은 유별나다. 수천 년 전 애굽(이집트)을 탈출한 그들의 조상이 하나의 원칙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시오니즘


오직 여호와를 믿는 야곱의 후예들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

‘야곱의 사다리’는 곧 천국으로 향하는 통문이다. 야곱의 후손 즉 유대인만 이 사다리를 통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 구분의 결과는 엄혹했다. 야곱의 후예가 아닌 자들에겐 약간의 자비마저 베풀지 않았다. 부족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소유한 가축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요단강 서편 여리고성의 주민과 그들의 가축까지 모두 살해했다. 단 하나의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다. 극단적 배타성은 수천 년 후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이 세운 나라다. ‘야곱의 사다리’ 집단 통행증을 가진 민족이다. 다른 민족들은 그런 유대인의 배타성을 무참히 짓밟았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마사다 요새 함락 이후 유대민족은 기나긴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는 2천 년 동안 지속됐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영혼의 고향’ 시온으로 돌아가길 염원했다. 바빌론 강가에 유배됐을 때도 그들은 시온을 향한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에서 벗어나길 갈망했다. 박해가 가중될수록 그 열망은 커져갔다.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 박해는 절정에 이르렀다. 추방된 한 무리의 유대인들은 옛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숨어들었다. 유럽 어디에도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후로도 간간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이어졌다.

유럽이 종교의 극성에서 벗어나자 박해는 줄어들었다. 덩달아 시온주의도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18세기 하스칼라(유대 계몽운동)를 통해 서구 문명에 동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들은 시오니즘을 포기하는 대가로 평온한 삶을 원했다. ‘야곱의 사다리’는 잠시 기능을 멈추었다.

그러나 19세기 들면서 유럽 내 분위기가 바뀌었다. 동유럽에서부터 유대인 탄압이 강화됐다. 유대인들은 다시 뭉쳐야 했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하여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에 우리 땅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알리야(Aliyah:유대인 이민)로 알려진 대규모 이주가 시작됐다. 1차 알리야는 1881년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유대인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이후 20여 년 동안 자신들의 옛 땅에 수 십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들이 주로 농사를 지었기에 1차 알리야를 ‘농업 이민’으로 부른다. 유대인들은 땅을 사들였고, 히브리어로 된 신문을 발간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읽기 위해 간직해 온 그들의 언어다. 구약과 달리 신약성경은 모두 그리스어로 쓰였다.

2차 알리야(1904-1914년)에는 4만 명에 이르는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 절반은 곧 다른 나라로 떠나갔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가운데 하나인 지중해 야파항 인근에 텔아비브라는 새 유대인 도시를 건설했다.

이 세련된 도시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다. 1922년에 이르자 팔레스타인 인구의 11%가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 9명은 1909년 9월 최초의 키부츠(집단농장) 데가니아를 세웠다.

키부츠는 여전히 200개 넘게 남아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생산 및 분배는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적절히 섞인 형태다. 의식주는 모두 함께 해결했다. 주거는 부부단위로 이루어졌다. 이곳 아이들은 18세 이전까지 부모를 떠나 집단생활을 했다.

독일에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나자 몰려드는 유대인들의 수가 급증했다. 5차 알리야(1929-1939년)때는 25만 명이 한꺼번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유입됐다. 유대인들이 사들이는 토지의 양이 늘어나면서 아랍인들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시오니즘은 철저한 고립주의다. 선택 받은 민족 스스로 택한 고립이지만 박해라는 고약한 부작용을 불러왔다. 시오니즘은 19세기 후반 처음 등장했지만 그 기원은 수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시오니즘은 싹을 틔웠다.

요단강은 신국(神國)의 국경이었다. 요단강을 건너 신국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집단 할례를 단행했다. 성스러운 시민으로서 자격 인증이었다. 그들은 여리고성의 모든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영예로운 고립주의를 선언했다.

‘축복의 땅’ 가나안은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다. 비는 애처로울 만큼 적게 내렸다. 그들이 떠나온 큰 강(유프라테스나 나일) 유역에 비하면 농사에 적합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런데 왜 굳이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오로지 신(神)만이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요단강은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 사해에 이른다. 총 길이 250㎞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 강이 갖는 의미는 엄중하다. 이 강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유대교도들에게나 기독교인 모두에게 신성한 물줄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출애굽의 요단강과 연결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됐다. 고대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이라는 독특한 토양위에 세워졌다. 수 천 년이 흐른 후 두 번째 이스라엘이 같은 땅에 세워졌다.

옛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은 다르다. 더 이상 수천 년 전의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 이웃 철기문명 부족을 상대로 고작 구석기 무기를 손에 들어야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2021년 말 기준 1인당 국민 소득 4만 3600달러의 부국을 이루어냈다.

건국 초만 해도 이스라엘은 원조에 의존해 살던 가난한 나라였다. 반세기만에 그들은 강대국으로 변신했다. ‘야곱의 사다리’는 비로소 그 기능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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