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요단강 2

by 성일만

믿음의 조상


모든 것은 한 사람에게서 비롯됐다. 저명한 유대교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그에게는 신앙적 삶의 전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 의해 공히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어진다. 서로 어울리기를 거부해온 세 종교의 같은 뿌리다. 절묘한 불일치가 아닐 수 없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그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어떤 신앙 DNA가 그를 순정의 유전자로 인정받게 만들었을까. 믿음은 그곳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일단 받아들여지면 합리적 의심으로부터 멀어진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모순에 가득 차 있다. 그의 후손인 야곱, 모세,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의 전반기 생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마치 30살 이전의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성서를 쓴 기자들은 굳이 기록해 두지 않아도 될 부문에 대해선 놀랄 정도로 냉담했다.

고향 우르를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삶은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유프라테스 강의 풍요로움을 간직한 우르는 지상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아브라함이 이 도시를 떠나는 순간부터 성서는 그의 삶을 추적했다.

그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아닐 수도 있다. 사막을 떠돌다가 우연히 정착한 곳인 지도 모른다. 다만 창세기를 쓴 모세는 아브라함의 최초 목적지를 가나안이라고 못 박았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기 26:9’ 이다. 하지만 실제 가나안은 그렇지 않았다. 가나안은 오히려 척박한 땅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에 비하면 메마르기 그지없다. 노인은 뉴욕을 떠나 서부의 황야로 이주한 셈이다. 노년의 선택으론 일반적이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종자를 거느린 꽤 유복한 히브리 족장이었다. 70대 노인이 왜 도시의 안락함을 떠나 광야로 향했을까. 70대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정을 선택할 나이다.

가나안에선 하늘만 올려다 봐야한다. 비는 애처롭도록 적게 내린다. 그가 떠나온 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물이 넘쳐난다. 그곳이 상수(常水)라면 가나안은 천수(天水)다. 그런 점이 종교의 탄생과 성장에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늘에 의지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기 힘들었으니까.

가나안은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우기다. 그 시기에 충분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 아브라함은 고난의 시기를 맞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버리고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집트는 우르나 다름없다. 비는 적게 내리지만 풍요로운 나일 강 덕분에 물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아브라함 가족을 ‘히브리 사람(Hebrew)’이라고 불렀다. ‘강을 건너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강은 요단강을 의미한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명했고, 그는 군말 없이 따랐다.

아브라함은 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아들을 죽이라는 신의 명령에도 순순히 따랐다. 사도 바울은 그로 인해 “아브라함이 의로움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당초 아들을 그에게 약속한 쪽은 신이었다.

그런데 도로 거두어가려 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비난받아야 할 당사자는 신이었다. 줬다가 빼앗는 것은 아니 준만 못하다. 이미 소유권은 넘어 왔다. 그런 다음 빼앗으면 약탈에 해당된다. 종교는 그런 법적 체계와 무관했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면 너에게 복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창세기 12:1”고 약속했다. 민족을 이루려면 자식이 있어야 한다. 그의 아내는 이미 완경을 넘겼고 아직 아이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다른 여인에게서 첫 아들 이스마일을 얻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아내도 이삭을 낳게 된다. 이스마일과 이삭은 이복형제다. 한 아버지에서 나온 형제는 아랍인과 유대인으로 갈라섰다. 이스마일은 아랍인의 조상이다.

신은 90세에 이른 아브라함의 아내에게 자식을 약속했다. 그의 아내조차 웃어 넘겼다. 완경은 신이 만든 조건이다. 그녀의 몸속에는 생명이 깃들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은 분명 그들 부부에게 약속했다. 약속이 유목민족들에게 갖는 의미는 엄중했다. 구두 약속조차 어길 수 없는 계약에 해당됐다.

성서는 계약의 상징을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해 두었다. ‘하나님은 둘로 쪼개진 동물의 사체 가운데로 횃불을 지나가게 했다.’ -창세기 15:17 이는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서로 간에 중요한 약조를 맺을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공증을 받아 두는 셈이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가 되어서야 그 약속은 이루어졌다. 아내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났다. 70대 노인 시절부터 약속된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신은 그 기쁨을 자신의 위한 제물로 바칠 것을 명했다. 모리아 산에 올라 가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번제라 함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죽인 다음 불로 태우는 것을 말한다. 제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다. 신이 어떻게 그처럼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칸트에 따르면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명백한 잘못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내린 주체가 신이 맞는지 의심했어야 했다.”

아브라함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니 짐작만 할 뿐이다. 성서는 오직 아브라함의 동선(動線)에만 집중했다. 그의 심리적 동요를 추측할 문학적 언급은 생략됐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땔 나무를 가지고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의 몸을 태울 나무였다. 상황의 엄중함에 비해 아브라함은 너무나 태연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산을 오른 아브라함은 칼을 빼들고 아들을 찌르려했다. 어찌 망설임이 없었을까. 성서는 아브라함의 망설임을 적지 않음으로서 그의 심리적 동요를 부정하고 있다. 신에 대한 온전한 순종만 드러내려 했다.

아브라함이 막 칼을 빼들었을 때 신의 사자가 나타났다. 드라마틱한 타이밍이다. 그는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며 아들 대신 번제로 쓸 양 한 마리를 건네주었다. 신은 아들 대신 사용할 양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다만 그가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여호와 이레(여호와가 준비해 두었다는 의미)’라고 부르며 그 자리에 성전을 세웠다.

이 과정은 기독교 성서와 이슬람교 코란에 공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두 경전에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 성서에 따르면 이날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아 산을 오른 아들은 이삭이다.

반면 코란은 그를 이복형제 이스마일이라 주장한다. 예루살렘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교의 3대 성지로 손꼽힌다. 이슬람에서 모리아 산은 이스마일의 희생의식이 치러졌고,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기도 하다. 코란은 이스마일을 예언자이며 선지자라고 –코란 19장 54절 기록해 두고 있다.

이삭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그의 12명 아들에게서 나왔다. 유대인들이 유난히 12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이유다. 예수에게도 12제자가 있었다. 요셉은 야곱의 12번째 아들이었다.


엑소더스(Exodus)


막내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형들은 그런 요셉을 시기했다.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는 갈등이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좋은 옷을 사 입혔다. 하지만 편애는 비극을 불러왔다.

형들은 아버지 몰래 요셉을 뜨내기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들은 요셉을 낮선 이집트 땅으로 데려갔다. 형들은 요셉의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 동생이 죽었다고 아버지를 속였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들들은 속이는 자를 속였다. 이후 요셉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요셉은 파라오의 친위대장에게 팔려갔다. 싹싹하고 영민한 요셉은 곧 그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일엔 늘 여인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나중에 ‘마지막 사사’ 삼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친위대장의 부인이 젊은 요셉을 유혹하려 들었다. 요셉은 그 유혹을 뿌리쳤다. 그러자 여인은 도리어 그를 모함해 옥에 가두었다.

요셉의 장기는 해몽이었다. 그는 우연히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주었고, 그의 신임을 얻어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가뭄과 흉년도 정확히 예측했다. 고대 통치자나 그를 보필하는 자에게 가장 중한 일이었다.

어느 해 가나안에도 흉년이 들었다. 가나안은 가을 이른 비가 내리고, 3월에 늦은 비(유대인들은 그렇게 부른다)가 와야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특히 3월의 늦은 비는 곡식 수확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야곱의 아들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왔다가 극적으로 동생 요셉을 만났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집트 이민과 정착을 도와주었다.

야곱은 요셉의 주선으로 파라오를 만났다. 이집트의 왕은 야곱에게 ‘무엇을 하는 자냐?’고 물었다. 야곱은 ‘목축하는 자(shepherd)’라고 답했다. 이집트인들은 목축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집트인은 나일 강 주변에 성을 쌓고 산 민족이다. 떠돌이 목축하는 자들과 삶의 방식이 달랐다. 왕은 요셉 가족에게 좋지 않은 땅을 내주었다.

예부터 이집트는 자주 유목민들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런 탓에 이동하는 자들에 대한 혐오가 깊었다. 정주민의 전투력이 유목민을 감당하긴 어려웠다. 그들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한족의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장성(長城)을 세운 것처럼 그들도 시나이반도 동북부에 요새를 지었다. 침략이 잦을수록 증오심은 깊어갔다.


그 무렵 즉 기원전 1650년에서 100여 년 동안 고대 이집트 왕국은 격변기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번성했던 도시국가들이 쇠락하면서 그곳의 셈족들이 대거 이집트로 유입됐다.

이집트로 이주한 셈족은 ‘힉소스 파라오’ 시대를 열었다. 힉소스(Hyksos)는 외국인이라는 뜻이다. 외부인들이 토착민을 밀어내고 왕권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요셉은 힉소스 파라오 밑에서 총리를 지냈다. 외부인 파라오는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을 것이다.

이민자의 삶의 질은 새로 정착한 국가의 이민정책에 따라 달라진다. ‘힉소스 파라오’ 시절 야곱 가족은 안정된 삶을 누렸다. 그러나 이내 이집트 정치상황이 급변했다. 그와 함께 유대인들의 평온한 일상은 무너졌다. 본토 이집트인들이 셈족을 몰아내며 왕권을 회복했다.

권력을 되찾은 이집트인들은 억눌렀던 증오심을 폭발시켰다. 그동안 외부세력에 당해왔던 울분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외부인에 대한 탄압과 추방이 시작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통상 전 정권에 대한 보복이 가해진다. 하물며 지배민족이 달라졌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부를 쌓았고, 급격히 수를 늘려갔다. 이는 유대인들의 장기다. 어디를 가든 그곳의 상권부터 장악했다. 유대인들에게 부를 빼앗긴 이집트인들은 몹시 사나워졌다. 유대인들은 손쉬운 표적으로 전락했다.

부를 가지면 영향력이 확대된다. 토착민 파라오는 그 점을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폭압적인 유대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방법은 잔인했다. 유대인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새로 태어난 아들을 죽였고, 남은 자들은 노예로 삼아 대규모 토목 사업에 동원했다. 역사에 기록된 첫 ‘홀로코스트’였다.

한 때 제국의 공로자요 협력자였던 유대인들은 졸지에 노예로 전락했다.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주체를 바꾸어가며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직전까지 계속됐다. 중세와 근세 유럽의 유대인 탄압은 혹독했다.

15세기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은 노란색 헝겊을 표식으로 달고 다녀야 했다. 한 유대인 남성은 젊은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본 것이 아니라 여자 쪽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오로지 잘생긴 외모뿐이었다.

17세기 스페인에서는 화형 당한 유대인들이 많았다. 스페인의 이단금문소는 3만2,000 명의 이교도를 불 태워 죽였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유대인들이었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 교수는 그 무렵 약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스페인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의 나치 독일은 600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영화 ‘영광의 탈출’은 모사드의 설립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미국 CIA, 영국 M16, 러시아 KGB와 함께 세계 4대 정보기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모사드는 당초 민간 기구로 발족했다.

영화에는 모사드의 대원 선발 기준이 나온다. 유대인 학살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거나 그들의 가족이 우선 선발 대상이었다. 나치에 의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거나, 가족들의 참담한 희생을 목격한 이들이 어떤 각오로 모사드에 몸을 담았을지 짐작된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결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모사드 건물의 입구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 구약성경 잠언 11장 14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토착 파라오는 유대인 아이 가운데 아들만 골라서 죽였다. 남자는 언제든 칼을 들 수 있다. 그 칼은 파라오를 향할 것이다. 여자는 노예로 삼거나 이집트 남성과 혼인하게 만들었다. 노골적 유대인 말살정책이었다.

그런 중에 한 여성이 아들을 낳았다. 파라오의 명에 따라 죽여야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여성은 아들을 바구니에 담아 나일 강에 흘려보냈다. 바구니를 발견하고 아이를 구한 사람은 마침 이집트 공주였다. 물에서 건져냈다는 의미의 모세라는 이름을 지었다.

모세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심지어 그가 이집트인이라는 설도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모세와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에서 “모세는 사실 이집트인이며 이크나톤과 관련 있다. 이크나톤의 측근으로 일신교의 신봉자였다. 이크나톤의 죽음 이후 유대인과 결합했다”고 주장했다.

투탕카멘의 아버지 이크나톤은 ‘태양신 아텐(Aten)'만 신으로 인정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기득권 종교집단이 이를 묵과할리 없었다. 그는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아들 투탕카멘은 아버지를 죽인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집트는 곧 다신교 체제로 환원됐다.

이집트뿐 아니라 일신교와 다신교의 충돌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와 달리 대부분 일신교 쪽이 승리했다. 일신교는 강력한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에서 판테온(만신전)을 몰아냈다. 이슬람교 역시 나중에 이집트에서 여러 신들을 쫓아냈다.

청년이 된 모세는 한 이집트인을 살해했다.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살해하려던 자였다. 그 일로 이집트를 탈출해야 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어 평범한 목자로 살아갔다.

어느 날 모세는 호렙산에 올랐다가 신을 만났다. 이후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호렙산은 이스라엘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폭군의 탄압을 피해 도망 다니던 무렵 신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신은 모세에게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만 손에 쥔 채 파라오의 궁전으로 향했다. 모세의 상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였다.

역사학자들은 이집트에는 기원전 3000년께부터 왕조가 존재했다고 추정한다. 이집트의 왕은 파라오(Pharaoh)로 불렸다. 파라오는 ‘위대한 집’ 즉 신전의 주인이었다. 왕권과 신권을 한 손에 쥔 막강한 권력자였다.

파라오는 영생을 염원했다. 죽은 몸을 미라로 만들어 육체의 환생을 도모했다. 피라미드는 부활을 위한 제단이었다. 가장 위대한 이집트 파라오와 가장 뛰어난 유대인 리더 모세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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