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요단강 3

by 성일만


십계명


1977년 11월 18일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다음 날 그는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모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건물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입법자였다.

유대인들이 3,000여 년 전 이집트를 떠나 나라를 세운 이후 이집트 파라오가 그들의 의회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이스라엘 수상은 이듬해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중동 평화협정을 맺었다.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함께 수상했다. 하지만 악마는 쉽게 평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다트는 1981년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무바라크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다시 악화됐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권좌에 있었으나 2011년 ‘아랍의 봄’ 민중 봉기로 물러났다.

유대인들은 람세스 2세 치하에서 이집트를 벗어나 가나안으로의 40년 여정을 떠났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람세스 2세는 늘 찌푸린 표정이다. 눈은 분노로 붉게 충혈 되어 있고, 이유 없이 신하들에게 짜증을 낸다. 신하들은 절대자의 눈치 보기 바쁘다. 반대로 모세는 백인 미남 배우의 몫이다. 적당히 근육질인데다 두 눈은 지적매력으로 반짝거린다.

람세스 2세는 66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산인 유대인 노예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다르게 왜곡됐다는 설도 있다. 유대인들의 탈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람세스 2세를 악인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람세스 2세 역시 새로운 수도 건설 현장에 많은 유대인 노예를 동원했다. 유대 민족은 힉소스 파라오 시절 안락한 삶을 누렸다. 하지만 본토인 파라오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 순간 노예로 전락했다. 주인 아닌 자의 신세는 늘 바람 앞의 풀 신세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누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면 풀은 기적처럼 다시 일어난다.

자유란 공기처럼 호흡할 땐 그 소중함을 모른다. 없어지면 비로소 갑갑함을 느낀다. 자유를 잃은 유대인들은 신에게 호소했다.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은 신은 광야로 피신해 있던 모세를 호출했다. 유대 민족을 파라오의 손에서 건져 내어 애초 약속한 땅으로 데려가라고 명했다.

모세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화려한 언변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 선동에 미숙했다. 이런 조건은 정치인에겐 결격 사유다. 그런 자신이 2백만이나 되는 유대인 무리를 무슨 수로 이끈단 말인가. 그는 신에게 되물었다.

왜 하필 나입니까.

말솜씨는 표면적 이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불가능했다. 대규모 민족 집단을 이끌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그들이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을 무슨 수로 조달하나. 무엇보다 공짜 노동력이 필요한 파라오가 순순히 허락할 리 없었다.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에는 홍해라는 자연의 장벽이 있다. 그 바다는 또 어떻게 건넌단 말인가. 인간의 머리에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신은 모세의 둔한 입술을 대신해 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지목했다. 동생과 달리 아론은 달변가였다. 하지만 그가 단지 언변만으로 파라오를 설득해낼 수 있을까.

‘신의 뜻’이라는 것은 모세가 설치한 그럴듯한 포장술이었다. ‘신의 뜻’이라 말해야 2백만 유대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인간의 뜻’이라면 일사분란해질 수 없다. 그런 상태론 저 광야를 건너가지 못한다.

‘신의 뜻’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었지만 파라오를 설득할 순 없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신이 나섰다. 이스라엘의 신은 분노의 신이다. 신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와 그 백성들에게 내릴 열 가지 재앙을 예고했다. 유대 백성을 풀어주지 않으면 곧 재앙들이 들이닥칠 거라고 파라오에게 전했다.

대지의 주인 파라오는 물러서질 않았다. 한 번 밀리면 끝까지 밀린다는 통치의 기본원리를 제국을 이끌어 온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어지간히 버티던 그도 마지막 재앙 앞에선 무너졌다. 자신의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인간과 가축의 장자와 처음 난 것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변이었다. 람세스 2세의 장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 이집트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오직 유대인들만 그 재앙에서 벗어났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넘어 오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유월절(pass over)이라 부른다. 우리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이다.

죽음의 사자는 유대인의 집을 그냥 지나쳤다. 이 마지막 재앙 앞에 파라오도 무릎을 꿇었다. 유대인들은 급하게 이집트를 빠져 나왔다. 그 바람에 광야에서 발효되어 미쳐 부풀지 않은 빵을 먹어야 했다. 그를 기념하여 지금도 유월절에는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을 먹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래지 않아 절망했다. 홍해라는 거대한 물의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편 유대인들을 떠나보낸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노예가 없으면 신도시 건설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는 전차 600대와 병력을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추격했다. 앞은 바다, 뒤는 파라오의 군대에 처한 유대인들은 모세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죽기보다는 노예로 사는 편이 낫다고 소리쳤다. 성서는 광야 기간 동안 적어도 12번의 반란이 있었다고 기록해 두었다. 출애굽은 고난과 반란의 연속이었다.

신은 홍해를 가르는 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왜 온갖 고난을 주고 나서야 신의 권능은 발휘되는 것인지. 종종 신의 행위에 대해 이런 의문을 품게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답은 간단하다.

“신앙은 기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 신앙에서 나온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것이다. -마태복음 17:20” 예수의 대답이다.

유대인의 광야 유랑은 40년 동안 이어졌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감안할 때 한 사람의 일생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었다. 유랑 무리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다. 툭하면 그들끼리 싸웠다.

유대인 무리에는 아직 법(法)이 없었다. 때문에 집단의 재판장을 겸하고 있던 모세에겐 할 일이 많았다. 모세의 장인이 사위에게 법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2백만 집단에겐 훨씬 이전부터 법이 필요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소문을 공유할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150명 내외다. 침팬지의 경우 20~50 마리 정도다. 이를 넘으면 공식서열, 직함, 법이 필요해 진다.”고 주장했다.

자칫 그들에게 족쇄로 인식될 수 있는 법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을 어떻게 설득시킬까. 모세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율법 시대를 열었다. 그는 혼자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커다란 돌 판을 갖고 내려 왔다.

십계명이라 부르는 열 가지의 기본법이 적힌 돌이었다. 그 밖에도 수 백 개의 이르는 하위 법이 속속 제정됐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입법자로 불리는 이유다.

광야에서 40년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가나안을 눈앞에 둔 지점에 이르렀다. 그 사이 모세는 노인이 됐다. 노인 모세에겐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가나안 땅을 밟아 본 후 죽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모세의 작은 소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세가 신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아서다.

유대 백성이 물을 원하자 신은 모세에게 “바위에 명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 –민수기 20:8”고 명했다. 그런데 모세는 무리의 불평에 흥분한 나머지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쳤다. 물은 쏟아졌으나 그 일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신의 명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지팡이를 두 번 내리친 죄다.

오직 ‘약속의 땅’을 바라며 40년을 버틴 모세는 그 땅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산 위에 올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소망의 땅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와 대지를 적시고, 풀을 자라게 해 그 풀로 양을 살찌우고 밀과 과일을 익게 하는 땅 –신명기 33:28’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모세의 입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여기서의 이스라엘은 1인칭과 3인칭을 겸한다. 즉 모세 자신일 수 있다.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

미국의 작가 앤디 루니는 “모든 사람이 산의 정상에 서길 원하지만, 행복은 산을 오르는 동안에 있다”고 말했다. 시인 고은은 ‘그 꽃’이라는 시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고 노래했다. 누구나 정상에 서야 행복해질 거라고 믿지만 정작 오르는 동안 곳곳에 숨겨져 있는 행복을 놓치고 있다.

헬렌 켈러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빛과 꽃과 천상의 음악이 가득한 기쁨 넘치는 삶을 주어 감사드린다.” 그녀는 어린 시절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은 장애인이다. 그런데도 빛과 꽃과 음악에 감사했다.


요단강


모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은 “모세는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등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과 직접 대면한 인물이다. 모세 이전 신을 본 사람은 모두 죽음을 당 했다. 심지어 신전의 지성소에 몰래 들어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신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모세는 ‘스스로 있는 자-출애굽 3:14’를 보고도 죽지 않았다. ‘스스로 있는 자’는 신이 자신을 표현한 말이다.

모세는 홍해를 가르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을 직접 만난 사람이고, 이적을 행사했다. 카리스마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민족을 이끌게 된 여호수아는 여러모로 전임자와 달랐다. 당장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에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현재의 요단강 수량 정도면 별 문제없다. 이스라엘의 관계 사업으로 지금의 요단강은 걸어서도 건널 정도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 사해로 흐른다. 요단강은 해수면보다 아래로 흘러 당시의 기술로는 그 물을 농업에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꽤 수량이 풍부했다. 특히 우기엔 더했다. 마침 강을 건너야 할 시점이 우기였다.

200만 명의 대규모 집단이 그 강을 건너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상당한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이 불가피했다. 백성들이 터트릴 불만의 크기는 강물의 수압보다 더 거셀 것이다.

주변에선 여호수아를 흔들어댔다. 너도 나도 “좀 더 강해져라”며 핀잔을 주었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전체가 무너진다. 여호수아는 원래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투보다 믿음에 더 의지했다.

여호수아를 연구한 트렌트 버틀러는 “모세가 그를 택한 이유는 특이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있는 엄중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에서 후계자를 지명했다”고 주장했다.

여호수아는 전투보다 제의에 더 익숙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점이 오히려 불안했다. 모세는 신의 도움으로 번번이 전투에서 이겼다. 여호수아는 무엇으로 자신들을 보호할까. 그가 모세처럼 신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백성들의 불안감은 모세와 같은 뛰어난 리더의 후임자가 겪어야할 숙명이었다. 무얼 해도 그는 전임자보다 부족해 보였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은 어디서나 통용된다.

200만 유대민족의 앞에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국(神國)은 저만치 국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유단강의 의미는 특별했다. 강 이편은 차안(此岸)이고, 저편은 피안(彼岸)이다.

강을 건너고 나면 신국이었다. 나중에 국경을 넘고 난 다음 유대인들은 믿기지 않는 집단행동을 벌였다. 신성한 땅에 발을 들여놓은 대가였다.

우선 강을 건너는 일이 급했다. 그 다음 일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가나안의 여러 민족과 벌일 전쟁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그들의 성(城)은 단단했다. 더구나 200만 유대집단에겐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는 오직 신의 뜻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니 무기를 가질 이유가 없었다. 군대도 따로 조직하지 않았다. 이기도 지는 것은 물론 그 밖의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달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Deus vult!)이다.” 이는 1095년 십자군 전쟁을 선언하며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한 말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쉽게 떠나가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그들은 신참 사령관을 닦달했다.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수아 1:6”

이 말은 구약성경 여호수아서 1장에만 네 차례 반복된다. 요단강을 눈앞에 둔 유대민중의 불안감을 요약한 문장이다. 이는 곧 그들 스스로에게 던지는 심리적 주술이기도 했다.

적진을 살피고 온 정찰병들이 돌아 왔다. 그들의 보고는 더욱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정찰병 12명 가운데 10명이 “적들의 체격이 장대하여 우리를 메뚜기처럼 본다”고 실토했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고대 전투에서 신장과 체격의 현격한 우열은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대 백성들 사이에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여태 허비한 시간과 지나온 거리가 얼만데. 진영 내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런 상황에선 목소리 큰 사람들이 우세하다. 심지어 그들은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했다. 새 지도자는 충분한 권위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이 떠나온 이집트는 나일 강의 규칙적인 범람으로 농사짓기에 편리했다. 노예일망정 목숨과 연명할 최소한 양식은 보장받았다. 가나안 땅엔 무엇이 있나. 이곳에 도착해서 들은 정보에 들리는 따르면 가나안에서의 농사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해야 한다. 큰 강을 곁에 둔 이집트의 사정과 정반대였다. 그곳에선 강물이 지천이었다.

일반 백성들에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지도자 몇몇만 그 이유를 주장할 뿐이다. 눈앞의 저 강을 무사히 건넌다 치자. 강 저 편 여리고 성은 일대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다. 그 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메뚜기처럼 여긴다고 하지 않나.

그래도 돌아갈 순 없었다. 간신히 분위기를 다독여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시기는 4월로 추정된다. 우기의 끝 무렵이어서 제법 강물이 불어나 있었다. 걸어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백성들은 강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갔다. 어쩌자는 걸까. 제사장들이 맨 앞에 섰다. 그 뒤를 2백만의 백성들이 뒤따랐다. 강 건너 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분명 집단 자살로 여겼을 것이다. 넘실거리는 강물로 바리바리 짐을 진 사람들이 술에 취한 듯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선두로 걷던 제사장들의 몸이 요단강 강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강물의 흐름은 거침없었다. 제사장들의 몸이 물에 푹 잠겼다. 모두가 숨죽여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200만 명이 강물에 수장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조금 전까지 맹렬했던 기세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강은 서서히 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사장의 뒤를 따르던 백성들은 아예 강바닥을 밟으며 걸었다.

2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이 모두 건널 때까지 강물은 흐름을 멈추었다. 여호수아로 짐작되는 성서의 기자는 이 진기한 장면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표현은 간단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생략)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생략)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났더라. -여호수아 3:15-17)

요단강은 신국의 국경으로서 제 기능을 드러냈다. 신국으로의 첫 진입답게 찬란한 이적이 펼쳐졌다. 이보다 더 적절한 퍼포먼스가 있을까. 신이 행한 이적에 반응하듯 유대인들은 곧바로 놀라운 집단행위에 돌입했다.

요단강을 건너면 곧바로 여리고 성을 만난다. 높고 단단한 성벽을 두른 천혜의 요새다. 가나안 인근에 이만한 조건을 갖춘 성이 없었다. 더구나 성안에는 물과 식량이 풍부했다. 방어를 위한 모든 것을 갖춘 성이었다. 이곳은 기원전 7000년께부터 집단 거주지로 자리를 잡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에 이른 것은 약 7만 년 전으로 알려졌다. 약 18,000년 전부터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나면서 지구는 호모 사피엔스의 삶에 적합한 기후로 변했다.

각종 곡식들이 주변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후 인류는 떠돌이 생활방식을 버리고 정착을 늘려갔다. 영구 정착촌이 생겨나면서 야생곡물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원전 8500년 무렵 중동에는 여리고 같은 정착촌이 여럿 나타났다.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디딘 유대인들이 처음 행한 일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도착 즉시 요란한 입국 절차를 밟았다. 여리고 성 앞에서 돌칼로 모든 남자들의 할례를 단행했다. 유대인들이 타 민족과 구분하기 위해 행해온 제의(祭儀)였다.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그들은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선 금속을 제단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남자들은 오로지 거친 돌로 피부의 일부를 잘라냈다. 마취 없이 수술을 자행해졌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픔보다 더 큰 문제는 이후에 벌어질 지도 모를 상대의 공격이었다. 이 순간 적이 쳐들어오면 이스라엘 민족은 몰살당할 처지였다. 그런데도 모든 남성이 태연히 할례를 단행했다.

할례를 끝낸 유대인 남자들은 일제히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고통은 차치하고 꼬박 며칠 동안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적과의 전투를 눈앞에 두고 자진해서 무장해제를 해버린 셈이다.

할례는 요단강, 야곱의 사다리와 함께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구분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를 거쳐 오는 동안 유대인들은 할례를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무 할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신성한 땅에 무 할례의 몸으로 입장할 순 없었다. 문제는 방어태세였다. 이제 곧 전쟁에 임할 전사들이 벌렁벌렁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들은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이 있을까. 하필 이런 상황에서 수술을 단행해야 했을까. 꼼짝없이 전멸당해도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상대의 반응이었다. 유대 군사들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리고의 군사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즉시 공격을 가하면 손쉬운 승리가 보장됐다. 이런 사실을 간과했을까, 아니면 함정으로 오인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성서의 기자는 상대의 조용한 반응에 대해선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는지, 상대가 공격해 올 경우 어떤 대비책이 있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여리고 성의 방비는 단단했다. 성벽을 부셔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공성(攻城)을 위한 기본적인 장비도 없었다. 그런데 성벽은 어이없는 방식으로 무너졌다. 오로지 나팔을 불며 여러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을 뿐인데 돌로 만든 성벽이 저절로 해체됐다.

유대인들은 말없이 엿새 동안 성을 빙빙 돌았다. 그저 묵묵히 성을 돌고 또 돌았을 뿐이다. 7일 째 되는 날엔 제사장 7명이 나팔을 불며 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 그에 맞춰 백성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성벽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설명 불가능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여리고 성에서 유대인들은 잔인했다. 성을 정탐할 때 도움을 준 여인과 그녀의 집안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주민과 그들의 가축마저 죽였다.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멸하라는 신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신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당연하다. 훗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과 대 제사장 사무엘의 갈등에서도 신은 ‘모든 생명을 남김없이 죽이라’는 사무엘의 편을 들었다. 모든 생명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물론 그들의 가축까지 포함됐다.

요단강 저편에 속한 생명에게 자비란 없었다. 이를 통해 1948년 개국 이래 주변 국가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온 이스라엘의 밑바탕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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