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 레테 1

by 성일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하계(下界)에는 5개의 강이 흐른다. 레테는 그 중 하나다. 레테이외에도 그곳에는 슬픔의 강 아케론, 비탄의 강 코키토스, 불의 강 플레게톤, 지상과 하계를 구분하는 강 스틱스 등이 있다.

레테는 고대 그리스어로 망각을 의미한다. 즉 레테는 망각의 강이다. 죽은 자가 이 강물을 마시면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 비로소 하계의 일원이 될 준비를 끝내는 것이다.

레테는 원래 하계 수면 궁전을 지키던 좀 모자라는 호위병이었다. 그는 죽음의 세계로 이끄는 인도자이지만 삶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과 함께 영혼이 새로 환생하기 전 이 물을 마시게 강요하는 두 가지 배역을 맡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죽음은 삶에, 삶은 죽음에 망각이라는 부채를 요구한다. 반드시 모든 기억을 잊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이승의 일에 연연하는 한 죽음은 결코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잊는 자만이 새로운 단계로 나갈 수 있다.

레테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멍포와 비교된다. 멍포는 영혼의 환생에 앞서 국물을 마시게 해 그 때까지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린다. 흥미롭게도 동서양의 하계에는 공히 망각의 물이 존재한다.

레테는 실재하지 않는 강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스펜서의 말처럼 ‘망각의 강’ 레테는 종교라는 증식가능을 갖추었다. 지상에 없는 강이 결과적으로 7개의 강 가운데 지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다.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피어시그는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한 사람이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 부른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 한다”고 주장했다.

망상과 실재의 구분은 논쟁적이다.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갈리기도 하고,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맞서기도 한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종교 그 자체는 실재다. 따라서 레테의 영향력은 어느 강보다 더 구체적이다.

지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 중에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는 인류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우선 예수를 알아야 한다. 나무에 의지하면 토템이지만 십자가 예수를 믿으면 기독교다.

불교는 넓고 큰 바다다. 그 가운데 한국 불교의 주류인 선불교에 대해 알아본다. 달마에서 성철에 이르는 선불교의 맥을 더듬어 보았다. 이슬람교에 대해선 무함마드의 일생과 시아파, 수니파로 나누어진 그들의 분열 과정을 알아봄으로서 대략 살폈다.


예수는 누구일까


‘성녀(聖女)’ 테레사 수녀가 서울을 방문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녀에게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평소 그녀는 이런 일을 싫어했다. 그런데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나중에 전해진 이유가 그녀다웠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그녀는 연옥 영혼 한 명씩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다. 그곳에서 죄를 깨끗이 씻어낸 다음에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그녀는 기뻐했을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의 영혼을 구해냈으니. 이 얘기를 들은 김수환 추기경은 “그 날 이후 연옥이 텅 비었겠네”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테레사 수녀는 원래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어느 해 인도와 히말라야를 여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겨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길을 바꾸었다.

미국의 한 부자가 인도 캘커타로 그녀를 찾아 왔다. 인도의 빈민가는 그의 상상보다 훨씬 비참했다. 이런 곳에서도 인간이 살고 있구나. 그는 솔직히 테레사 수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수녀님 같은 분이 이런 환경에서 저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테레사 수녀가 답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변장하고 계신지 찾고 있는 중이랍니다.”


예수는 누구일까.

예수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서양 문명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21세기에도 그 영향력은 살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막상 예수의 진면목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는 그를 구불구불한 긴 머리를 가진 서양 사람으로만 이해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의 재림을 바라고 있다. 막상 우리 눈앞에 예수가 나타나면 과연 그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2천 년 전의 아마도 아랍인을 닮은 얼굴을 예수로 인정할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재림 예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소설 속에서 예수는 16세기 다시 인간 세상을 찾았다.

1500년 만에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스페인 세비야였다. 그 시기 가장 종교 갈등이 심각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이단심문소’가 설치돼 이슬람교인은 물론 ‘한 지붕 두 가족’ 유대교인들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있었다.

양과 염소는 철저히 구분되었고, 유대교를 포함한 이단들에게는 엄격한 통행제한 규칙이 적용됐다. 예수는 영적으로 황폐한 그곳에서 병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1500년 전에 이 땅에 처음 왔을 때처럼 그의 손길은 자비로웠다.

죽은 자를 살려낸다는 소문은 온 세비야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500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비야의 영혼을 책임진 대심문관은 예수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그 역시 1500년 전이나 똑같았다.

대심문관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1500년 전 대제사장이나 빌라도처럼 그는 예수가 가진 위험을 직감했다. 아울러 예수를 그냥 내버려 두면 대심문관이 애써 쌓아올린 기독교라는 성전이 무너져 내릴 것임을 알았다. 1500년 전엔 로마와 식민지배체제였지만. 그의 머릿속에 기독교와 예수는 분명 달랐다.

대심문관에게도 순진무구한 시절은 있었다. 한 때였지만 진심으로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예수처럼 되 보려고 광야에서 고행을 자청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예수와 달랐다.

광야에서의 40일 동안 그도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죽음 이후에는 오로지 어둠밖에 없다는 것을. 또 다른 생이란 결국 성전의 주춧돌을 놓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이곳 현재의 나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다. 죽음 이후엔 다시 어둠이다. 광야에서 그가 절실히 깨달은 사실들이다. 현실로 돌아 온 그는 기꺼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

대심문관이 차가운 말투로 예수를 몰아세웠다.

“우리들과 함께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야.”

그는 악마를 이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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