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 레테 2

by 성일만

하나님의 아들


대심문관은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왜 이제야 나타났나?”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자비로운 신이라면 간절히 원할 때 곁에 있어 주어야 하지 않나. 그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서 나타나 바라지도 않는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단 말인가. 대심문관의 말은 거침없었다.

“이제야 간신히 질서가 잡혔다. 겨우 체념하고 우리 방식대로 살아가려 애쓰고 있는데 뒤늦게 와서 그 알량한 재주로 무얼 어떡하겠단 말인가. 세상을 바로 잡는다고? 웃기는 소리. 당신의 무성의한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언제나 제 때 나타나지 않는 그 굼뜬 방식!”

예수는 대심문관의 힐난에 아무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심문관은 예수의 침묵을 이해했다.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해야 했다.

“세상이 변했단 말이야!”

대심문관의 음성은 확신에 찬 채 떨리고 있었다.

“1500년이 지났어. 그래, 맞아. 해답은 바로 마귀의 말에 있었어. 차라리 그 때 당신이 순순히 마귀의 뜻에 따랐더라면 세상의 비극은 없었을 거야.”

이 말을 예수의 면전에 퍼부어대면서 대심문관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1500년 전엔 내가 왜 이 자에게 쩔쩔매야 했나. 한없이 나약한 눈을 가진 저 젊은이에게. 그 때의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그때 왜 그랬나?”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예수에게 돌렸다. 그 때의 일이란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겪은 참담한 경험을 말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태복음 4:1~11


예수가 이 땅에서 행한 첫 번째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이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첫 번째 요구와 비슷했다. 둘 다 예수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예수는 특히 떡 이적에 관한한 전문가였다.

고작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지 않았나. 어디 그 뿐인가, 그는 툭하면 이적을 행해 왔다. 그러니 돌로 떡을 만들라는 요구 정도는 오히려 마귀가 예수를 배려한 셈이다.

대심문관은 “그 때 왜 빵(떡)을 만들어주지 않았느냐”며 예수를 몰아세웠다. 대심문관은 “인간이란 본디 나약한 존재여서 신이 부여한 자유를 누릴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당신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반납 받고 대신 빵을, 즉 물질적 안락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줬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궁은 신랄했다.

“천상의 빵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이 너의 뒤를 따른다고 해도,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만한 힘이 없는 수백만 명, 수억 명의 인간들은 어떻게 되나? 너에게는 고작해야 수만 명에 불과한 위대하고 강한 자들이 더 소중하고, 나머지 수백만 명, 약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인간들은 그저 위대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한단 말이냐? 천만에, 우리에게는 약한 자들도 소중해.”

대심문관의 주장은 간단했다. 네가 진실로 인간을 구원하기 원한다면 그 때 마귀의 말대로 돌을 떡(빵)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이 세상에는 빵을 준다고 하면 엎드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에겐 결국 빵이 가장 소중하다.

그 때 악마의 요구대로 빵을 만들어줬더라면,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근심이 사라졌을 것이다. 이 말을 할 때만큼 대심문관은 스스로에게 진심을 느꼈다.

-위 내용은 신약성경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어령의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를 참조해 재구성했다.

2천 년 전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지상에 왔을까.


사마리아 여인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하기 전 예수는 뜻밖의 장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절차 같았다. 마치 단세포가 변이를 거듭해 거대한 공룡이 된 것처럼. 발설 대상 역시 의외였다.

예수의 생애는 평범한 30년과 메시아로서 공생애 3년으로 구분된다. 공생애 이전 30년 동안 그는 자신을 꽁꽁 숨겨 왔다. 주변의 누구도 그가 그 분(메시아)인줄 몰랐다.

그의 제자들조차 스승의 10대, 20대 시절은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는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였을 뿐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예수가 인근 사포리스 신도시 공사에 참여해 노동을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공생애를 시작하고도 예수는 한 동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예수는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을 상대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처음 발설했다. 유대인들이 펄펄 뛰면서 반발할 장소와 사람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상대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극이었다. 서로 말을 섞기조차 거부해온 대상이었다. 메시아라는 말에 담겨 있는 무게를 감안하면 그의 사마리아 선언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왜 하필 사마리아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상대로 했을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래 한 핏줄이었다. 같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벌여 이긴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서쪽의 지중해와 동쪽의 요단강을 그들만의 거룩한 경계로 삼았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사후 둘로 나누어졌다. 영민한 지도자 솔로몬이 죽자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높은 세금을 매겨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세율을 부가하는 지도자는 인기를 얻지 못한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은 따로 왕을 세워 북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나라가 둘로 쪼개진 것이다. 남과 북은 각각 정통성을 주장했다.

북 이스라엘은 7번 째 오므리 왕 시절 아예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 이후부터 남 유다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마리아인으로 불렀다.

사마리아인은 차츰 유대인들의 기피 대상으로 전락했다. 유대문헌인 벤 시라에는 “우리가 전적으로 혐오하는 민족이 셋 있는데 세일과 블레셋에 사는 자들이다. 또 하나는 민족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는 놈들이다. 세겜에 거주하는 멍청한 족속들이다”고 꼬집었다. 세겜의 멍청이들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이다. 유대인들에게 천적이나 다름없는 블레셋 족들보다 더 경멸했다. 다윗과 싸운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 족이다. 같은 민족을 적보다 더 무시했다.

유대인이 순수 혈통을 고집해 온 반면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의 혼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늘날 유대인은 혈통과 상관없이 유대교를 믿거나 부계 혹은 모계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으로 폭넓게 인정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부계보다 모계를 더 중시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신을 섬겼지만 예배를 드리는 성전의 위치가 달랐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의 성전을 정통으로 고집했다.

한 나라 두 민족은 서로 내왕조차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 발을 들려놓을 수 없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로 그리심 산을 찾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늘 유혈이 낭자했다. 툭하면 보복 살인이 이어졌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어떤 갈릴리 사람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살해당했다. 유대인들은 그에 따른 복수로 사마리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이런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풀이 됐다. 말만 같은 민족, 이웃일 뿐 실제로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사마리아 땅에서 그곳 여인을 만났을 무렵을 전후로 예수의 언행은 전과 많이 달라졌다.

예수는 좀처럼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환전상들에겐 예외였다. 그들은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 성전을 찾은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 먹는 자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집었다.

한편 유대인 관리를 만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3:16”며 자신의 핵심 교리를 설파했다.

이후 예수는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땅에서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려 했다. 대부분 이 노선을 가는 유대인들은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택한다.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첫 째는 안전을 위해서고, 다음으로는 적의(敵意)와 편견으로 가득한 그 땅에 굳이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예수는 왠지 모르지만 그 길을 선택했다.

예수는 사마리아의 시골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해가 중천에 떠 있던 우물가였다. 여인의 이름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사마리아 여인으로 불린다. 이 여인은 예수로부터 미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역사적 고백을 듣게 된다.

여인이 말했다. “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이가 오실 줄 알고 있습니다.” 시골 여인이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을까. 그만큼 메시아를 염원하는 사마리아를 포함한 온 유대 민족의 열망이 컸다는 증거다. 여인은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유를 설명했을 것이다. 다만 성서의 저자는 굳이 그 과정을 생략했다.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그라 –요한복음 4:26 ”

이 말은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성서 전체를 통해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낸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예수는 철저히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주문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였다.

예수는 왜 그토록 중요한 메시아 선언을 적지(敵地) 사마리아에서 이름 없는 여인을 상대로 했을까. 당시 유대인 열심당원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했다. 열심당원은 과격파들이었다.

예수의 제자 중에도 열심당원이 있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시몬이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다시 한 번 이웃에 대해 연민을 나타냈다. 내용은 이랬다.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었다. 그는 강도를 만나 돈을 몽땅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태롭게 됐다. 맨 먼저 그의 곁을 지나간 사람은 제사장이었다.

이 엄숙한 종교인은 땅에 쓰러져 있는 동포를 못 본 척 스쳐지나갔다. 검은 제사장 복장을 휘날리며 자신의 길을 재촉했다. 다음으로 레위 사람이 그곳에 왔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레위 사람들은 모세의 직계 자손들이다.

그들은 농사나 일반 노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성전 관리를 맡아 보았다. 그 역시 그냥 지나갔다. 다음에 온 사람은 하필 사마리아인이었다. 유대인들이 “신이여, 저들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상이었다.

부상당한 유대인은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저자가 나를.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주막으로 자신을 데려가 보살펴주는 것은 물론 주막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봐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으리라 –누가복음 10:35”고 하지 않나.

프랑스 형법에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고의로 구해주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이를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라 부른다. 예수가 소개한 선한 사마리아인을 기념하기 위한 법률이다.

메시아가 유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묵직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간절히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며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사마리아에선 이적을 그쳤다. 단지 자신이 그임을 밝히기만 했을 뿐이다.

여인이 예수에게 물었다. “우리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네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만 드립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요?” 여인은 같은 민족이 성전 문제로 반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여인아 나를 믿어라. 이(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중략) 다만 바른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예배를 드리면 된다.”

예수는 사마리아에서 한 마디의 설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주 보여주던 이적 역시 행하지 않았다. 단지 한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땅에) 믿는 자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요한복음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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