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인기
그도 나름 계산은 서 있었다. 아내 일은 아내 일, 사적인 일과 정치를 구분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된다고 해도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로마정가의 최대 주주인 자신에 비하면 한참 뒤처졌다.
카이사르라는 대행업자 칼을 빌려서 자신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 여자문제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함도 보여주고. 연적이라는 소년 취향 감정은 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이 순간 몽테스키외의 재치 있는 표현을 빌리면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카이사르에게 신뢰를 헌납하고 만 꼴”이 됐다.
카이사르는 한 발 더 나갔다. 폼페이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또 한 명의 인물을 끌어들였다. 폼페이우스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인물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돈 많은 남자 크라수스였다.
폼페이우스는 애써 크라수스의 장점을 가볍게 보려고 노력해왔다. 돈 많은 것 하나 빼면 대단치 않은 사내였다. 실제로 세간의 평이 그랬다. 하지만 돈은 상상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해도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오만이 불러온 오판이었다. 카이사르는 평민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있었다. 거기에 자금력이 더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폼페이우스가 한 번 쯤 심각하게 품어 봤어야할 의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라는 배경을 과신했다. 내 뒤에는 그들이 있어. 실제로 당시 로마는 원로원의 세상이었다. 모든 일이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그러나 인기와 자본이 결합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가 간과한 또 한 가지 사실. 저편에 버티고 있는 카이사르라는 정치 9단이 품은 무궁무진한 상상력이었다.
카이사르는 슬슬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폼페이우스-카이사르-크라수스의 이른바 ‘삼두체제’가 갖추어졌다. 카이사르는 무난히 로마 제일의 권력자인 집정관(Consul)에 선출됐다.
막강한 삼두체제의 등장으로 원로원은 큰 타격을 입었다. 삼두체제가 혹 공화정을 흔들지 않을까. 설마 왕정이 다시 오나. 원로원은 아직 그런 걱정까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카이사르는 여전히 정치적으론 미숙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이 카이사르를 본격 견제했더라면 ‘루비콘 강’은 인류의 기억에 작은 개울로만 남았을 것이다. 로마인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왕의 출현도 없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왕정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가진 민족이었다.
심지어 황제시대에 들어서도 스스로의 정체를 공화정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원로원은 삼두체제를 고안해낸 카이사르가 왕위까지 노린다고 보진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때만 해도 카이사르 역시 왕이 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단순히 덩치가 크진 로마에는 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로마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인민의 것(res publica)’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주인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 로마는 극심한 빈부 차이로 신음했다. 그런 혼란스러움을 방치하다가는 공화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로마는 황제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전성기를 구가했다. 오현제 시대(서기 96~180)에 이르러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강력한 로마제국의 힘에 의해 평화가 지속된 200년간)’의 태평성대를 구현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만약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오현제 시대를 선택할 것이다. 로마 제국은 덕과 지혜(virtue and wisdom)로 인도되는 절대 권력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평가했다. 다분히 유럽적인 사고의 틀이다.
선행이나 미덕을 의미하는 영어 virtue는 라틴어 비르투스(virtus)에서 왔다. 비르투스는 올바름을 의미한다. 비르투스는 남성을 가리키는 비르(vir)로부터 파생됐다. 로마인은 올바름을 남성의 도덕적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덕(virtus)은 로마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고대 로마사’를 쓴 토마스 마틴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오래 된 것, 경험에 의해 검증된 것을 좋아했다. 로마인들은 덕과 신의, 존경심 등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핵심적 가치라고 여겼다.”
카이사르는 절대 반지 즉 절대 권력을 원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보다 한 발 앞서 절대 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집정관을 버리고 개선식을 선택했다. 절대 권력의 위험성은 부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번은 “로마의 공화정 시대는 존중할 만하지만 제국이 되면서 타락했다”고 꼬집었다. 덕과 지혜를 갖춘 절대 권력이라는 가정은 이미 전제에서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절대 권력은 덕 같은 거추장스러운 동행자를 같은 마차에 태우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삼두체제를 공고히 다지기위해 갓 22살이 된 딸 율리아를 47살의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독신이었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실세 가운데 한 명인 피소의 딸과 재혼했다.
부녀가 모두 정략결혼을 한 셈이다. 딸의 결혼은 아버지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이로써 카이사르는 삼두체제를 단단히 하는 한편 원로원 내부에도 지지 세력을 심어두게 됐다. 서서히 로마 정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가고 있었다.
느리게 그러나 철저하게.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원형은 ‘오디세이아(Odysseia)’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마는 문화 선진국 그리스의 많은 것을 모방했다. 심지어 신화마저 그리스 것을 베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로 바꾼 것도 로마인이다.
오디세이아에는 유럽 문명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가 애덤 니컬슨은 ‘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서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가 중요한 이유는 유럽인들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오디세이아는 아테네와 트로이 간의 오랜 전쟁을 끝낸 이후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다. 아테네는 ‘트로이의 목마’를 이용해 전쟁을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고향 앞으로.’ 하지만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리스의 신들은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 신들은 오디세우스를 고난의 여정으로 인도했다. 오디세우스는 지옥(하데스)에까지 내려갔어야 했다. 조니 뎁 주연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도 이 장면이 패러디됐다.
오디세우스는 하데스에서 지상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를 만났다. 아킬레우스는 불사의 몸이지만 유일한 약점인 발꿈치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아킬레우스가 오디세우스에게 한 말은 너무나 애처롭다.
“죽음에 대해 나를 위로하려 마시오. 죽은 자들의 왕이 될 바엔 차라리 촌구석에서 남의 노예로 살겠소.”
지상의 영웅도 죽음 앞에선 초라해졌다. 지옥의 영화는 이승의 굴욕만 못했다. 반신(半神) 반인(半人)의 아킬레우스마저 지옥에선 편치 않았다. 살아 있을 때 모든 이의 부러움이었던 그의 당당함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오디세우스는 권태로운 천국을 거부했다. 여신 칼립소가 향나무 장작 타는 냄새로 가득한 천국의 섬에서 더불어 영생을 누리자고 유혹하지만 그는 떠나갔다. 정착의 거부는 유목·해양민족의 숙명이다.
머리는 인간, 몸은 새의 모습을 한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했다. 세이렌의 모습은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로고에 그려져 있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항해사 이름이다. 이처럼 오디세이아는 서양 문명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꽁꽁 묶어 위기를 넘겼다. 그는 영악한 인간이었다. 상대를 속이는 일에 능했다. 그가 고안한 트로이의 목마도 결국 속임수였다. 외눈박이 괴물 펠리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탈출할 때도 역시 속임수를 썼다.
유목·해양 문화에 속하는 서양문명은 속임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 점에서 농경과 정주를 위주로 한 동양문명과는 거리감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약삭빠른 인물이었고 이스라엘인들의 조상 야곱 역시 속임수의 명수였다. 동양문명이라면 이런 조상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