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루비콘강 5

by 성일만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는 오디세우스의 현실 판 인물이었다. 로마 귀족인 그에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집정관이었다. 최고 권력에 오르기 위해선 두 가지가 요구됐다. 우선 집정관이 되려면 그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또한 선출직이어서 꾸준한 주변 관리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대통령에 당선 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1년 임기의 집정관을 마친 다음엔 부유한 지역의 속주 총독으로 나가길 희망했다. 집정관은 무보수다. 재임하는 동안 선심정책을 펼치다보면 꽤나 돈이 든다. 비워진 주머니는 속주 총독으로 나가서 채웠다. 수탈은 가장 용이한 돈벌이였다. 집정관이 되어 명예를 높이고, 그 사이 비어진 주머니는 총독 기간 동안 만회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 선출됐다. 그런 다음 먼저 농지법 개혁부터 관철시켰다. 땅은 로마인들에게 생계의 원천이었다. 카이사르 당시엔 빈부의 차이로 인해 내부의 갈등이 커져 있었다. 땅을 너무 많이 가진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농사지을 작은 땅조차 없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농지개혁에 반대했다. 농지는 그들의 부를 보장해온 바탕이었다. 농지 개혁은 한 마디로 귀족들의 땅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이었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농민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자는 개혁 법안을 그들이 고분고분 받아줄 리 없었다. 카이사르는 민중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민회에서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큰 산 하나를 넘은 카이사르는 규정에 따라 속주 총독으로 나가야 했다. 문제는 지역이었다. 카이사르가 어디를 선택할까. 원로원은 분주히 안테나를 가동했다. 비워진 주머니를 채우려면 스페인이나 부유한 중동 쪽이 유리했다. 당시의 갈리아(오늘 날 프랑스와 독일 서부 일대)는 가난한 지역이었다. 여전히 미 정복지로 남은 로마의 골칫거리였다.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을 희망했다. 원로원이나 반대편 세력들에겐 놀라운 선택이었다. 그는 왜 스스로 험지에 가려고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먼저 실익부터 챙기려든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뒤따라올 더 큰 이익을 고려했다. 영토의 확장은 장차 그의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갈리아 총독은 3~4개 군단의 병력을 거느렸다. 실 병력은 곧 권력의 원천이다. 총독의 거주지는 루비콘 강에서 불과 30㎞ 북쪽인 라벤나였다. 수도 로마와는 군대의 행군 속도로 단지 사흘거리다. 카이사르의 원모심려를 눈치 챈 원로원은 그제야 뒷목을 부여잡았다. 뒤늦게 위험신호를 감지했다. 도둑에게 몽둥이를 집어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카이사르 같은 위험한 인물이 수도 로마의 코앞에 군대를 갖고 있으면 화약고 옆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민회를 통해 원로원의 뜻을 꺾었다. 카이사르는 민중의 성향을 잘 파악했다. 민중은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집단이다. 카이사르는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이제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는 4개 군단을 보유하게 됐다.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당시 로마군은 유럽 최강이었다. 로마군이 강했던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반적으론 로마군의 조직력과 전술이 손꼽힌다.

레이첼 로던의 의견은 매우 신선하다. 그는 ‘탐식의 요리’라는 저서에서 회전식 맷돌의 발명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이 맷돌로 인해 로마 군인들은 보다 빨리 양질의 식사를 제공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주장이다. 복싱의 승패는 반드시 주먹의 강도에 달려 있지 않다. 제대로 힘을 쓰려면 잘 먹어야 한다.

로마군은 전략적 유연성과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한 군대였다. 1개 군단은 보병 5천명과 300명의 기병대 그리고 별도의 공병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군단은 열 개의 대대로 나뉘어져 유명한 백부장(centurion)들에 의해 지휘됐다.

로마는 건국 초 징병제를 유지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 했다. 카이사르 당시엔 모병제로 바뀌었다. 이후 로마군은 점차 사병화의 길을 걸었다.

군인들을 모집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군 사령관은 속주에서 부를 챙겨 병사들에게 나눠줘야 했다. 공평한 분배는 지휘관의 필수 덕목이다. 자신의 것을 많이 챙기려하면 말썽이 났다.

속주 총독은 병사들이 제대할 때 앞으로 살아갈 터전인 농지나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현금을 나눠 주었다. 병사들은 그런 총독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 과정을 통해 군대는 차츰 사병화의 양상을 띠어갔다.

사병을 많이 거느린 사령관은 어느새 로마 정가의 위협 대상으로 떠올랐다.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부임을 한사코 반대한 이유다. 카이사르에게 충성스런 4개 군단이 주어지면 원로원에겐 목 안의 가시를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인들은 알프스 북쪽의 갈리아 인과 게르만 인을 미개한 민족으로 여겼다. 그들에겐 제대로 된 국가조직이 없었다. 부족 단위로 곳곳에 산재한 채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갈리아에만 대략 100개 정도의 부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우선 그들의 바지 차림에 질색했다. 로마 남성은 원피스 형태의 근사한 토가를 입었다. 군인의 전투 복장조차 치마 모양이었다. 당시 로마인들 사이에 바지는 촌스러움을 넘어 미개함을 상징하는 옷차림이었다.

갈리아 인들과 게르만 인들은 서로 사이가 나빴다. 갈리아는 게르만의 침략에 늘 시달려 왔다. 게르만 쪽의 땅과 기후가 더 척박했기 때문이다.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만(독일)의 충돌은 2차 대전까지 쭉 이어졌다.

갈리아 인들에겐 다행스럽게 라인 강이라는 천연의 방벽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 인들은 틈만 나면 강을 건너왔다. 그들에겐 나름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라인 강의 동쪽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숲은 외부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게르만 인들은 줄곧 온화한 기후의 라인 강 서쪽을 넘봤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필연적 과정이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다름 아닌 먹거리와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이동하는 과정이었다.

이미 많은 게르만 인들이 강을 넘어와 살고 있었다. 게르만 인들도 같은 이유로 동쪽의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오늘 날 레만 호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 노릇을 한다. 레만이라는 말은 갈리아 어로 버드나무라는 뜻이다. 레만 호 일대는 온화한 기후로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 본부가 있는 로잔, 몽트뢰 등 세계적 휴양지를 끼고 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족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2천 년 전 레만 호 일대에는 헬베티라는 갈리아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게르만 인들에게 시달려 왔다.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서쪽으로의 이주를 희망했다. 하지만 이주를 위해선 로마 속주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했다. 카이사르는 대규모 부족 이동이 지닌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민족 이동이라는 큰 일이 쉽게 마무리 될 리 없었다. 어느 부족이나 좋은 땅과 온화한 기후를 원했다. 그런 곳이라면 이미 살고 있는 부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고분고분 보금자리를 내줄 리 없었다. 그들은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도중에 거쳐 와야 할 부족들과의 충돌도 예상됐다. 오늘 날 유럽의 난민 문제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부족 간의 전쟁을 야기할 것이고 이는 속주의 안정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니 속주 총독으로선 이주를 허락할 수 없었다.

헬베티족의 사정도 딱했다. 서쪽으로부터 게르만족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죽긴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결국 이주를 결정했다.

예상대로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의 이동 경로 곳곳에서 충돌이 감지됐다. 조만간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카이사르는 즉시 사태에 개입했다. 헬비티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헬베티족의 사정을 이해했지만 속주 전체의 안정을 고려해야 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위기


갈리아와 게르만 군의 바탕은 기병대다. 반대로 로마군은 중무장 보병 중심이었다. 당시 로마인은 농경민족이었다. 로마에는 말(馬)이 흔치 않았다.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고전한 이유도 기병의 열세 때문이었다.

말의 기동성면에서도 꽤 차이가 있었다. 카르타고 기병대에는 누미디아와 스페인 산(産) 말이 있었다. 둘 다 알아주는 명마들이다. 말을 모는 기병들의 숙련도 역시 현저히 떨어졌다. 당시엔 말의 등자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등자 없이 말을 타려면 허벅지로 말의 잔등을 단단히 조우고 타는 고도의 마술(馬術)이 필요했다. 말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 군인들에겐 그런 재주가 없었다. 유럽에 등자가 등장한 것은 8세기에 이르러서다. ‘유럽 속의 전쟁사’를 쓴 마이클 하워드는 “등자의 발명 이후 유럽의 전쟁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는 창조적 천재로 불린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의미다. 헬비티족과의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우선 아군의 약점인 기병대의 열세를 인정했다. 대신 이를 장점인 보병의 활용으로 극복했다.

로마 군의 보병들은 전통적으로 3열 횡대 대형을 고수했다. 로마보병들의 기본 무기는 창과 칼이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밀집 대형을 짠 다음 영화에 나오 듯 큰 방패를 앞세워 고슴도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는 긴 창을 사용해 적을 공격했다. 근접전이 벌어지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내 찌르고 베었다. 로마 보병의 두텁고 짧은 칼은 근접전에 유리하게 만들어졌다.

헬베티족은 로마군에 비해 세 배나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전술이나 대형이 없었다.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지르는 동네 형은 무술 고단자를 이기지 못했다. 로마군에게 짓밟힌 그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그들은 2천년 동안 스위스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로마 정국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로원의 ‘말 폭탄’ 키케로가 뜻하지 않는 일로 곤욕을 치렀다. 이 일은 나중에 기독교의 로마 선교 밀알이 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로마에 기독교를 전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었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로마 군에 체포됐다. 바울은 군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로마 시민이라고 밝혔다.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시민은 재판을 받지 않고는 처형될 수 없었다. 바울은 재판을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로마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는 클로디우스가 만든 법률 때문이었다. 로마의 호민관 클로디우스는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에 처한 자를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이 법으로 인해 사도 바울이 로마로 올 수 있었다. 기독교는 로마 판테온의 여러 신들을 몰아내고 서기 392년 로마 전 지역의 국교가 됐다.

묘하게도 이후 로마는 제국의 영화를 잃어 갔다. 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를 서로마 멸망(476년)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기독교의 도입 혹은 최소한 그 남용은 로마 제국 쇠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인내와 무기력의 교리를 설교했다. (중략) 황제들의 관심은 점차 병영에서 종교로 바뀌어 갔다”고 주장했다.

클로디우스 법안의 실제 타깃은 원로원의 키케로였다. 그는 처음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국은 점점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키케로와 카이사르는 묘한 사이였다. 적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였지만 적은 적이었다.

키케로는 귀족파, 카이사르는 평민파를 대표했다. 그러면서도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교양을 인정했고, 키케로는 카이사르 저서라면 빠짐없이 탐독했다.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는 클로디우스 법안을 내세워 멀리서 키케로를 몰아세웠다. 싸움에서 패배한 키케로는 그리스로 망명을 떠났다. 이로써 원로원 내에서 카이사르의 최대 정적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원로원이 온전히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손 놓고 가만있진 않았다. 원로원은 은밀히 삼두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 카이사르와 로마의 폼페이우스 사이를 이간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들은 읽어보지도 않은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친밀한 사이 적을 떼어 놓아라(親而離之).”

원로원은 정치집단이다. 정적이 자리를 비운 기회를 먼 산 불 보듯 하진 않았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했다. 그들은 좀 더 다루기 쉬운 쪽인 폼페이우스를 집중 공략했다.

그들이 사용한 전술은 초보적인 수법이었다. 폼페이우스 띄우기였다. 유치하지만 때로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 권력의 추가 기울어지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는 멀어질 것이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누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이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막강한 권한을 안겨주었다. 향후 5년간 로마의 식량 문제를 그에게 위임했다. 엄청난 특혜였다. 예나 지금이나 식량 문제는 곧 생존권과 직결된다.

로마는 식량의 대부분을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수입했다. 그것을 컨트롤하는 권한은 생사여탈권을 의미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식량 조달과 함께 해군의 지휘권까지 덤으로 얹어 주었다.

경제권에 더해 군사력까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다. 폼페이우스라는 호랑이는 이제 양쪽 날개까지 등에 달았다. 권력의 추가 폼페이우스에게 쏠리면 삼두체제는 흔들리게 된다. 원로원이 노리는 바였다.

원로원은 하나하나 카이사르의 권력을 해체해 나갔다. 집정관 선거에선 자파 후보를 1등으로 당선시켰다. 이 무렵 키케로는 원로원의 얼굴로 로마 정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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