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루비콘강 6

by 성일만

흔들리는 삼두체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문장이나 말은 길게 늘이기보다 짧게 끊기가 훨씬 어렵다.

‘갈리아 전쟁기’를 읽어 보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에 감탄하게 된다. 도저히 전쟁에 종군한 사령관이 직접 썼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이 같을까. 정적 키케로조차 “카이사르의 문장은 품격 높고 빛나며 장엄하고 고귀하며 무엇보다 이성적이다”고 극찬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게르만 족 병사들과 마주친 로마 군인들의 두려움을 숨김없이 적어 두었다. 그들은 로마 병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지금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신장은 유럽인들 가운데 작은 편이다.

두려움은 늘 직접 마주쳤을 때보다 상상단계에서 더 위세를 떨친다. 매 맞기보다 그 전의 공포가 더 아찔한 것과 마찬가지다.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 앞서 로마군들 사이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병사들은 게르만족과의 싸움에 나서기를 꺼려했다. 이런 상태로는 전투를 치를 수 없다. 임기응변의 명수 카이사르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카이사르는 각 군단 장교들을 소집했다. 그 자리서 카이사르는 다음 날 밤 10군단과 함께 캠프를 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10군단은 사실상 카이사르의 친위대였다. 훗날 이 10군단이 마침 멀리 주둔해 있어서 서로마가 멸망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나머지 군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자신을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다. 사령관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말이 차갑게 들리도록 노력했다. 고도의 심리 전략이 담겨있었다.

순간 10군단을 제외한 로마군 장교와 병사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를 전투에서 배제한다고? 우리더러 겁쟁이라고 말하는 거 아냐. 그들 마음속에서 모욕감이 두려움을 넘어섰다. 군인들에게 비겁함보다 더한 면박이 있을까. 아랫배에서 무언가 불끈하고 치밀었다.

카이사르는 장교와 병사들에게 수치심과 공포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다. 억지로 누르면 도리어 반발을 불러온다. 이는 기막히게 타이밍을 맞춘 승부수였다. 카이사르에겐 이런 일화가 수도 없이 많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루비콘 강을 건넌 다음 던진 그의 승부수도 절묘했다.

말은 그렇게 해놓았지만 밤에 잠을 이루진 못했을 것이다. 병사들이 따라나서지 않으면 전투는 하나 마나다. 하지만 기우였다. 카이사르가 밤중에 행군을 명령했을 때 6개 군단의 모든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고대의 전투는 왕왕 병사들의 사기만으로 결정 날 때가 많았다. 게르만 족 군대는 두 배나 많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완패 당했다. 로마 군인들은 게르만 군인들의 덩치에 겁을 먹었지만 게르만 군인 역시 로마 군의 조직력과 명성 앞에 떨고 있었다.

한편 갈리아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로마 정국 소식이 속속 전해졌다. 카이사르는 가만있진 않았다. 멀리서도 로마 정가의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삼두체제가 위험해진다. 그렇다고 속주 총독이 관할 지역을 벗어날 순 없다. 이는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었다.

어떻게 하면 삼두체제를 다시 공고히 할 수 있을까. 카이사르는 또 한 번 상대의 의표를 찔렀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몰래 피렌체 인근의 루카로 불러들였다. 루카는 로마의 영토 밖이었다. 속주 총독 카이사르가 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세 사람은 루카에서 삼두체제의 굳건함을 재확인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음 번 집정관 선거에 나가기로 합의했다. 폼페이우스와 달리 선거에서 반드시 이길 보장이 없는 크라수스를 위해 겨울철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여름이면 전쟁에 나서야 하는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휴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겨울엔 휴가를 얻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을 마친 후엔 각각 에스파냐와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나가기로 결의했다.

임기는 5년. 이 역시 관례를 무시한 처사였다. 더불어 카이사르의 임기도 4년 연장시켰다. 세 사람은 각각 10개 군단씩의 군대를 거느리고 유지비용은 국가에서 지급하기로 했다.

원로원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카이사르의 힘을 묶어두려다 도리어 자신들이 당하고 말았다. 거물 세 사람이 다시 힘을 합치자 원로원으로선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예상 밖의 조치를 또 하나 취했다.

라인 강 최초의 다리


키케로의 동생을 군단장으로 임명했다. 키케로는 상대편의 수장이다. 무슨 꿍꿍이였을까.

적이면서 친구인 키케로에 대한 우정이었을까. 아니면 원로원 수장을 꼼짝 못하게 묶어둘 인질을 데리고 있겠다는 속셈이었을까. 아니면 복합적인 이유일까? 어쨌든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카이사르에게 득이 됐다. 넓은 정치적 아량을 과시하는 한편 상대편 견제라는 실속도 챙겼다. 군인 자질 못지않게 정치적 수완을 가진 카이사르였다.

로마에서의 정치적 위기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갈리아의 내부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갈리아 인과 게르만 인들은 끊임없이 항거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배를 받고도 항거하지 않는 민족은 소멸된다. 그러나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자유를 순순히 용인할 리 없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인들의 기를 꺾기 위해 라인 강을 건너 그들의 땅 깊숙이 쳐들어갔다.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발한 방법으로 라인 강을 건넜다. 강위에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이 다리는 라인 강에 놓인 역사상 최초의 다리다.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다리를 놓은 인물이었다. 다리는 카이사르와 칭기즈칸을 연결시키는 묘한 공통점이다. 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 부족과 부족, 문명과 문명을 연결해 사람들의 내왕을 가능하게 만든다.

라인 강의 다리는 10일 만에 뚝딱 완공됐다. 로마군의 놀라운 공법과 파상적 기세에 눌려 게르만 인들은 항복 사절을 보내왔다. 카이사르는 이어서 브리타니아(오늘 날 영국)를 공략했다. 브리타니아는 갈리아의 배후 세력이었다. 그들은 갈리아 인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로마를 견제해 왔다.

기원전 55년 8월 26일 로마 군단이 브리타니아 땅에 상륙했다. 윈스턴 처칠은 이날을 ‘대영제국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으로서는 의미 있는 날이지만 카이사르에겐 지루한 하루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브리타니아 원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두지 않았다.

오히려 브리타니아 인들의 미개함에 대해 약간 언급해두었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로마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땅이었다. 부부사이조차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채 남녀가 뒤섞여 살면서 얼굴에는 괴상한 물감을 칠한 야만인들에게 로마의 귀족이 매력을 느끼긴 힘들었을 것이다.

라인 강 도강과 브리타니아 원정은 성공이었다. 그런데도 갈리아 부족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해 밀농사가 엉망이어서 식량 사정이 나빠졌다. 로마 군단의 식량 조달 사정도 악화됐다. 하는 수 없이 군단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 겨울을 나기로 했다.

중세시대 전략가 베게티우스는 그의 저서 ‘군사학 논고’에서 모든 전쟁의 핵심 쟁점은 보급 문제라고 단언했다. 베게티우스는 “굶주림은 칼 보다 무섭다”는 말로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고조 유방도 건국 후 논공행상에서 보급을 담당한 소하를 일등공신으로 꼽았다. 거친 전투를 치러 온 장수들이 항의했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사냥꾼의 지시에 따르는 사냥개에 불과하다”며 깎아내렸다.

전투에서 식량과 군수품 지원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겨울이 다가 오면서 로마군단의 식량문제 심각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갈리아 인들에게 굶주림은 로마의 칼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로마군의 조직력은 유럽 최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직력이 뛰어나도 수적 열세는 감당하기 힘들다. 식량 사정으로 인해 로마군은 여러 곳으로 분산됐다. 상대인 갈리아 부족들도 로마군의 속사정을 알아차렸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했다. 즉 불행은 홀로 찾아오지 않는다. 좋지 않은 일은 반드시라 할 만큼 연이어 찾아온다. 겨울철 식량 사정 악화로 고심 중이던 카이사르에게 불행한 소식이 전해졌다. 폼페이우스에게 시집간 딸 줄리아가 해산 도중 죽었다.

줄리아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해주는 끈이었다. 카이사르는 속주 총독이어서 로마에서 행해진 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가슴 아픈 일이었다.

또 다른 불행이 잇달아 카이사르를 덮쳤다. 사비누스 휘하의 군단 병사 9천 명이 갈리아 군의 속임수에 빠져 궤멸 당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온 이후 겪은 최대 참사였다.

한 갈리아 부족이 게르만 족 침입에 대한 거짓 정보를 흘려 사비누스 군단을 겨울 캠프 밖으로 끌어냈다. 갈리아 부족은 캠프를 떠난 사비누스 군단을 골짜기로 유도한 다음 습격하여 9천명을 몰살시켰다. 문제는 병사 9천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 군단의 몰살 소식은 갈리아 부족에게 저항의 동기를 부여했다. 가장 우려스런 점은 로마군에 대해 가졌던 그들의 두려움이 약화됐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그들과 로마군을 갈라놓는 장벽이었다. 벽이 높을수록 로마의 지배력은 단단했다. 그것이 무너지자 로마에 항거하는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은 점점 깊어갔다.


카이사르는 파비우스 등 3명의 군단장에게 전령을 보냈다. 그들에게 당장 키케로의 겨울 캠프로 달려가라고 명령했다. 나머지 군단장들은 현재의 위치를 지키게 했다.

일부 군단은 거리상으로 본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적은 사방에 널려 있었고, 아군의 수는 적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 상황은 점점 험악해져 갔다.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넋 놓고 있을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기병 400기만 거느린 채 키케로의 겨울 캠프를 향해 내달렸다. 도중 군단 하나가 이동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왔다. 주변 갈리아 부족의 동향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이유였다.

로마군은 사방에서 위협받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점령군이 아니었다. 그동안 누려왔던 심리적 우위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저항의 분위기는 전염병처럼 퍼져 갔다. 로마 입장에선 저항이었지만, 갈리아 부족들로선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온 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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