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루비콘강 9

by 성일만

브루투스 너마저!


전쟁에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나에게 있고, 이기는 이유는 적에게 있다.

-손자병법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세워졌다. 서로마 제국은 기원 후 476년 멸망했다. 서로마만 해도 천년 넘게 지속됐다. 동로마제국은 다시 천년을 이어가 1453년에 무너졌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이 시기까지 이어진다. 2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다룬 역작이다. 기번의 뛰어난 문장은 독자들에게 덤으로 주어진다. 호흡이 긴 만연체 문장은 처칠에게 영향을 주었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 처칠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로마제국은 작은 마을에서 비롯됐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개의 소국과 도시로 나누어져 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변두리에 불과했다. 남쪽과 북쪽의 큰 나라들이 로마를 에워싸고 있었다. 로마는 그들에 기대어 간신히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런 로마가 어떻게 팍스 로마나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예일대 교수 에이미 추아는 ‘관용’을 키워드로 꼽았다. 로마는 피정복민들과 시민 자격을 공유했다.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로마 번영의 원인으로 공화제를 꼽았다. 이는 고대국가에선 보기 드문 제도였다. 더불어 로마의 초대 일곱 왕들이 하나같이(타르퀴니우스의 말년은 좀 다르지만)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몽테스키외는 ‘로마의 흥망성쇠에 대한 원인 고찰론’이라는 긴 제목의 논문에서 “역사상 그 어느 곳에서도 그처럼 뛰어난 정치 지도자들이 연이어 나타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로마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건설됐다.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왕이 됐다. 로마는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로물루스는 사비니 족과 혼인동맹을 맺고 그들에게 시민권을 나눠주었다.

시민(civis)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국민과 시민은 다르다. 국민(nation)은 소속을 나타내지만 시민(citizen)은 참여를 의미한다. 시민 쪽의 연대가 더 강력하다. 시민에는 국정에 참여하는 주권자의 개념이 녹아있다.

로마의 왕정은 기원전 6세기에 무너지고 공화정이 대신 들어섰다. 한 명에게 주어졌던 권력은 다수의 귀족들에게 분산됐다. 로마에서 권력을 가진 자에겐 의무라는 준 강제적 부담이 뒤따랐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다. 로마의 귀족들은 이를 부담이 아닌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제국 말기에 가서는 오블리제가 무너졌다.

로마 귀족들은 전쟁에 직접 참가해 승리를 거두는 일을 최대의 영예로 삼았다. ‘고대 로마사’를 쓴 토마스 마틴에 따르면 “(이는) 로마가 숱한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난한 민중들은 오히려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하지만 병력 제도가 모병제로 바뀌면서 용병들이 들어와 로마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479년에 이르러 로마는 여러 나라와 전쟁을 치르느라 더 이상 동원할 군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웃나라가 쳐들어왔다. 귀족인 파비우스 가문이 그들 일문으로만 군대를 조직하여 참전했다.

파비우스 가문 병사들은 전원 전사했다. 이 일은 로마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처럼 됐다. 귀족들은 세습된 지위를 누렸고, 평민과 자신들을 구분을 위해 그들만 붉은 색 신발을 신었다.

전쟁을 끝낸 귀족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더 이상 손에 무기를 들지 않았다. 평시에도 무기를 계속 갖게 되면 로마라는 공동체가 위험에 빠진다고 보았다. 킨킨나투스(BC 519~BC 438)는 외부의 침입을 물리친 후 독재관이라는 자리를 내던지고 평범한 농부로 돌아갔다.

로마는 농업과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 하지만 북쪽의 에트루리아, 남쪽의 칼라브리아에 막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더구나 지중해 저편에는 해상강대국 카르타고가 버티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는 이들 강적들과 싸워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무려 100년 이상 지속됐다. 전쟁의 양상은 독일과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항전을 보는 듯했다. 로마의 촘촘한 조직력과 한니발을 앞세운 카르타고의 화려한 개인기와의 대결이었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1)서 로마는 한니발이라는 명장에 막혀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조직력의 로마는 끝내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한니발의 오판


독일은 2014 브라질 월드컵 결승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었다. 리오넬 메시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는 현란한 개인기를 자랑했다. 메시는 7차례나 FC 바르셀로나를 스페인 프리메라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최고의 선수였다. 그러나 ‘전차군단’ 독일의 조직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르헨티나는 2010 남아공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서도 번번이 독일에 막혔다. 남아공 월드컵 결승서는 메시와 이과인이라는 최강의 투톱을 앞세우고도 0-4로 대패했다. 조직력이 개인기를 이긴 결과였다.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기원전 241)서 2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섰다. 로마 군대 운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패장에 대한 용서다. 고대국가에선 보기 드문 파격이었다. 패장은 패전을 통해 배운다. 로마는 패장을 다시 장수로 기용해 적과 싸우게 했다.

1차 포에니 전쟁서 로마는 처음으로 해군을 가졌다. 그렇더라도 지중해의 패권 국가 카르타고의 해군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로마의 창의성은 바다에서도 빛을 발했다. 전함의 뱃머리에 대못이 박힌 충각을 설치하는 혁신을 꾀했다. 적선의 갑판에 충각을 꽂은 다음 배위로 올라가 장기인 백병전을 치렀다.

갓 창설된 로마 해군은 여러모로 미숙했다. 카르타고와의 해전을 치른 후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났다. 지휘관의 미숙으로 6만의 병사가 바다에 수장됐다.

다음 해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로마는 일 년 전 해난사고 책임자를 다시 지휘관으로 보냈다. 이유를 불문하고 패전 지휘관을 처벌하는 카르타고와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패장의 경험까지 소중히 여기는 로마.

어느 쪽이 더 현명한가?


카르타고에는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이 있었다. 그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알프스 행군을 성공시켰다. 그런 다음 칸나이 전투서 하루 만에 로마군 3만 명을 몰살시켰다.

당시 한니발의 나이는 28세. 마흔을 넘겨야 비로소 군단 지휘권을 주는 로마인들에겐 충격이었다. 승리에 취한 한니발은 결정적 오판을 범했다.

한니발은 칸나이의 패배로 로마와 이탈리아 도시들 사이에 맺은 로마 동맹이 와해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마의 동맹국들이 줄줄이 카르타고로 넘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강자의 편을 택하는 것은 국제정세의 당연한 줄서기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니발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태였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 시민권이었다.

로마를 제외한 나머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주민 역시 로마 시민이었다. 물론 이런 사태에 대비해 로마가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로마 시민권은 유사시에 대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는 동맹국의 시민들에게도 그들과 똑같은 자격을 부여했다. 로마 시민권은 로마가 오랜 동안 공들여 완성한 ‘정치적 건축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이 건축물을 이해할 순 없었다.

로마군이 지연작전을 펼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물러났다. 로마인은 적국인 카르타고로부터 해군 전술을 배웠다. 그런 다음 해전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쳤다. 한니발의 전술을 익힌 스키피오는 육상에서마저 한니발을 물리쳤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2년 카르타고로 건너가 자마에서 한니발을 꺾었다. 한니발의 전술을 응용해 적지에서 그를 쓰러뜨렸다. 그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프리카누스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얻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떠올랐다. 카르타고의 지배영역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스페인을 장악해 막대한 은광 수입원을 확보했다. 로마 원로원은 스키피오에게 ‘제 1인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 그를 탄핵하여 시골 별장으로 내쫓았다. 로마 원로원이 얼마나 권력의 독점을 경계하는 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로마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을 당했다. 로마시내가 불탔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로마인은 잔뜩 금을 쥐어주어 그들을 돌려보냈다. 로마는 완전히 파괴됐다. 상흔은 깊었지만 로마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폐허가 된 로마를 떠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빠진 깊은 수렁을 성장의 동력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먼저 패배의 원인부터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민낯을 직시했다. 로마의 문제점이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진단이 나오자 곧바로 처방에 돌입했다. 로마인들은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을 제정했다.

이 법으로 인해 평민들도 귀족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모든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됐다. 평민 남자들은 귀족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됐고, 원로원 진출도 가능하게 됐다. 이 법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쪽은 믿기지 않게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시련을 통해 함께 살지 않으면 함께 망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원로원(Senatus)은 당초 왕의 조언자 그룹으로 출발했다. 왕정이 끝난 후 로마의 가장 권위 있는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로원은 공화정의 중추였다. 그들은 왕정복귀를 막기 위해 권력의 독점 가능성을 늘 경계해 왔다.

300명(나중엔 더 늘어났지만)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의사결정 과정은 실상 비효율적이었다. 회의는 툭하면 길어졌고, 말로 포장된 거짓이 진실을 압도했다. (오늘 날 한국의 국회를 생각해 보라.) 그런 이유로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로마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원로원은 독재자의 가능성을 지닌 카이사르를 견제했다.

로마는 1년 임기의 집정관에 의해 관리됐다. 평시에는 두 명의 집정관을 두었지만 위급한 상황에선 한 명의 독재관을 선출했다. 빠른 의사 결정을 위해서였다. 집정관은 원로원 의원 가운데 투표로 선출됐다.

전쟁 시에는 집정관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로마는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따로 호민관 제도를 두었다. 호민관은 집정관에 대항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거부권은 집정관의 권력 견제에 활용됐다. 나중에 로마의 황제는 군 사령관이면서 호민관 특권의 보유자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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