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 강은 칼과 법의 경계였다. 강을 건너면 더 이상 칼은 허용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칼을 가진 사령관은 왕이 되길 바랄 것이다. 로마인들, 특히 귀족들은 왕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로마 공화정을 유지하는 양대 축은 원로원과 민회였다. 원로원 의원 가운데 1년 동안 로마를 이끌어갈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했다. 그에 맞서는 지위로는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민관이 있었다. 호민관에겐 집정관의 결정을 거부할 권리가 주어졌다. 고대 국가에서 보기 드문 권력 견제 장치였다.
적절히 권력을 분산함으로서 로마는 독재자의 출현을 억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 골은 깊어 갔다. 결국 기원전 367년 리키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됐다.
이 법으로 인해 로마 시민은 누구나 원로원을 비롯한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됐다. 또한 평민 남성들은 귀족 여인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등장하면서 평민과 귀족의 해묵은 갈등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번영의 열매는 귀족들에게만 돌아갔고, 빈부의 차이로 인해 평민들의 불만은 겹겹이 쌓여갔다. 로마의 귀족들은 왕의 출현을 막기 위해 민중에게도 왕에 대한 증오심을 불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로마를 깊이 연구한 몽테스키외는 “뜻하지 않게 민중들의 가슴에 자유에 대한 엄청난 갈망까지 함께 심어주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권력의 추는 조금씩이나마 민중 편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약소국으로 출발했다. 힘없는 나라다 보니 자주 침략을 당했다. 하지만 로마는 외침을 성장의 발판으로 바꾼 흔치 않은 사례를 남겼다.
당초 로마 출발은 왕정이었다. 로마인은 그리스의 모든 것을 베꼈지만 정치만은 배우지 않았다. 국론 분열로 패망한 그리스식 정치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왕정은 길게 가지 못했다. 왕정의 붕괴는 치명적 스캔들 때문이었다.
7대 타르퀴니우스 왕의 아들 섹스투스가 귀족의 아내를 겁탈한 후 달아났다. 여인은 복수를 바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했다. 그 일로 섹스투스는 살해됐고 왕은 추방당했다. 이후 로마인들은 왕정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여 왔다. 하지만 왕정을 대신한 공화정은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누어져 반목을 되풀이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분열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분오열되어서는 로마를 초강대국으로 성장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로마 공화정을 연구한 퍼거스 밀러에 따르면 실제 카이사르 시기 로마 공화정 체제는 정치·사회적 격변을 감당하기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려했다. 원로원은 말만 많지 생산적이지 못했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체제를 만들어 원로원을 견제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이미 죽고 없었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편으로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스스로 기록한 ‘내전기’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서 등을 돌리며 그(카이사르 자신)를 버렸다”고 밝혔다. 그의 ‘내전기’는 독특하게 3인칭으로 쓰였다.
마침내 카이사르는 결론에 이르렀다. 루비콘 강을 건너야만 한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강을 건너면 반역자로 처단될지 모른다. 강을 건너지 않으면 무릎 꿇고 죽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
그 순간 카이사르는 나중에 그의 후손들이 뭔가 큰일을 도모할 때마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내전기’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상이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10분의 1 형벌
루비콘은 큰 강이 아니다. 그러나 강이 갖는 의미는 엄중했다. 반역과 충성의 경계선이었다. 카이사르는 군사들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제부터 전쟁이다.
상대는 게르만이나 갈리아 인이 아닌 로마인이다. 이 선택이 옮은 길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강을 건너기 전의 망설임은 저 편에 두고 왔다. 이제부턴 오직 승리하는 방법만 궁리할 것이다.
강은 좁고 수량도 풍부하지 못했다. 개울이라 불러도 될 강은 역사의 무게로 넘실거렸다. 출발은 좋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강을 건너자마자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함께 강을 건넌 병사들이 갑자기 카이사르에게 제대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대사를 앞두고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병사들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역시나 돈 문제였다. 병사들은 임금 인상을 시켜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막 강을 건너 내전에 돌입한 카이사르는 초반부터 복병을 만난 셈이다.
병사들은 “우리를 데려가려면 돈을 더 달라”며 단체행동을 벌였다. 명목은 제대였으나 실제론 임금 인상을 원했다. 큰 판이 벌어질 모양인데 이참에 단단히 한 몫 챙겨야겠어. 그들의 욕망은 현실적이었다.
사태의 핵심을 파악한 카이사르는 난감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당장 돈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밀렸다는 고약한 이미지를 남기게 됐다. 이미 병사들의 종군 거부로 여론의 손상을 입었다. 로마의 원로원은 멀리서 손을 가린 채 웃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체 행동에 나선 이들을 떼놓자니 당장 병력의 손실이 우려됐다.
카이사르는 병사들 앞에 섰다. 병사들은 카이사르의 입에서 타협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천하의 카이사르를 상대로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켰어. 카이사르도 어쩔 수 없군.
그러나 카이사르의 반응은 또 한 번 의표를 찔렀다. 다짜고짜 병사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로마 시민으로서의 신성한 군인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이유였다. 어이가 없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 카이사르의 다음 조치는 더 충격적이었다. 군법에 의해 병사들에게 이른바 ‘10분의 1형’을 선고했다. 로마군 내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인 이 벌은 사실상 사형이나 진배없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씩을 뽑아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때리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벌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우쭐했던 병사들은 단번에 기가 팍 죽었다.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사령관이 저렇게까지 독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이어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도리어 병사들을 벌주겠다고 펄펄 뛰었다. 앞으로의 전쟁 따윈 내 알바 아니라는 막무가내 태도였다.
순식간에 공수가 뒤바뀌었다. 난처해진 쪽은 병사들이었다. 까딱 잘못 처신하다간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로마 군의 군기는 엄중했다. 로마는 법의 나라다. ‘10분의 1’은 엄연히 군법에 의한 형벌이었다.
장교들의 간곡한 만류가 있었다. 그들은 “심정은 이해하나 대사를 앞두고 이러면 안됩니다”며 사령관을 만류했다. 카이사르는 어떻게 했을까. 짐짓 화를 거두는 척 연기를 했다. 장교들에 의해 등 떠밀려 못 이기는 척하며 현장을 떠나갔다.
카이사르가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카이사르 휘하 13군단 가운데 불참한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군기가 더 바짝 들어있었다.
카이사르는 쿠리오와 안토니우스에게 병력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파노와 아레초를 손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동부의 아욱시뭄에 무혈 입성했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령관 이하 병사에 이르기까지 바짝 날이 서 있었다.
한편 카이사르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시내는 패닉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내전기’에 이 상황을 간단하게 적어 두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로마는 공포에 휩싸였다.’
집정관 중 한 명인 렌툴루스가 먼저 로마를 탈출했다. 목숨을 건 카이사르와는 대조적인 행동이었다. 카이사르가 기병을 이끌고 로마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로마 시내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훗날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새로운 전술로 온 유럽을 장악했다. 그는 중국을 다녀온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여 ‘손자병법’을 번역해 읽었다.
그 무렵 유럽에는 도로와 교통수단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사 속의 전쟁’을 쓴 마이클 하워드는 “나폴레옹 이후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국가 간 전면전 양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그런 변화를 주도하며 자신만의 전술을 고안했다. 초반엔 승승장구했으나 뼈아픈 러시아 원정 실패로 엘바 섬에 유배당했다.
나폴레옹과 카이사르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정략결혼’이다. 나폴레옹은 변방의 코르시카 섬 출신이다. 집안은 가난했으나 욕망의 크기는 부유했다. 역시 카이사르와 겹쳐지는 부문이다.
가난과 욕망은 자석의 N과 N극처럼 서로의 거리를 넓히려 애썼다. 프랑스 혁명은 그런 나폴레옹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프랑스 혁명은 국왕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유럽의 왕들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국경을 넘어 자신들에게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힘을 합쳐 나폴레옹에 대항한 이유다.
왕실의 안락에 젖은 유럽의 왕들에게 절대 권력을 죽음으로 몰고 간 프랑스 혁명은 곧 공포였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프랑스와 싸웠다. 나폴레옹은 그들과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프랑스 총재정부는 한 때 나폴레옹을 이집트로 내보냈다. 겉으로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실상 나폴레옹을 멀리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영국 넬슨제독과의 나일 강 전투서 치명타를 입었다. 국내 정치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혼자 이집트를 빠져 나와 파리로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1년 후 군부를 등에 업고 제 1통령에 임명됐다. 그리고 1804년 황제에 즉위했다. 그 사이 이집트에 남겨진 3만 여 프랑스 병사 가운데 ⅓이 전사했다. 이 일로 나폴레옹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진 않았다.
나폴레옹은 26살의 청년 장군 시절 6살 연상의 과부인 조세핀과 결혼했다. 그녀에게는 두 자녀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 혁명 당시 사망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나중에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은 돈보다 신분이 더 중요해졌다.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과 재혼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도망치자 파리 신문의 첫 보도 제목은 ‘살인마 소굴을 탈출하다’였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가까워질수록 신문의 제목은 조금씩 변해갔다.
마침내 파리에 도착하자 ‘황제 폐하, 파리로 환궁하시다’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