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급보
카이사르는 로마 제일 빚쟁이였다. 그는 남의 여자를 넘볼 때와 마찬가지로 돈을 빌릴 때도 당당했다. 돈은 주로 정치적 지경을 넓히는 데 사용했다. 그에게는 크라수스라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동맹’의 일원인 인물이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와 반대로 로마 제일의 부자다. 카이사르는 그에게 큰돈을 빚지고 있었다. 대개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쩔쩔 매는 법이지만 카이사르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삼두동맹은 원로원의 방해로 위기를 맞았지만 루카에서 다시 의기투합했다. 이 회담에는 120명의 원로원 의원이 들러리로 참석했다. 그만큼 삼두동맹은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삼두동맹은 폼페이우스의 아내 즉 카이사르의 딸의 죽음으로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페르시아)에서 전사하면서 결국 삼두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크라수스는 8개 군단이나 대동한 채 파르티아 원정에 참가했다. 크라수스는 오리엔트 지역 지배를 통해 더 많은 부를 쌓기를 희망했다. 로마 제일의 부자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오리엔트의 경제력은 어마어마했다. 갈리아가 아프리카의 빈곤 국가라면 오리엔트는 서유럽인 셈이다.
주머니 속의 돈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크라수스 역시 빈손으로 떠났다. 어마어마한 부도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진 못했다. 그는 돈복을 타고 났지만 불행하게도 전쟁터에서 수레나스라는 유능한 적장을 만났다.
칸나에서 한니발에게 패한 이후 로마가 한 인물에게 이렇게 처참하게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로써 삼두정치로 대표되던 로마 정계는 다시 ‘해쳐 모여’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조카딸인 옥타비아와의 혼인을 제안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손을 뿌리쳤다. 오히려 반 카이사르 파인 스키피오의 딸과 재혼했다. 사랑을 위한 선택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를 향한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쯤에서 우리 헤어져. 싸늘한 이별 통보였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 이어 폼페이우스를 잃었다. 이후 그는 카이사르의 적으로 돌변했다. 원로원이 바라 온 그림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2년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단독 집정관에 선출됐다.
그 즈음 민중들에 의해 원로원 건물이 불탔다. 당황한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전권을 내주었다. 폼페이우스라면 최소한 독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원로원의 예상이었다.
몽테스키외는 폼페이우스가 의외로 소심한 면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는 두 번씩이나 절대 권력 반지를 차지할 기회를 잡고도 자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단순한 인물이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욕망의 크기부터 달랐다. 이 점에 대해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와 손잡은 사실이 자신의 부족한 선견지명 탓이었다고 인정하는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폼페이우스의 가장 큰 잘못이다”고 슬쩍 비꼬았다.
원로원은 조금씩 카이사르를 옥죄어갔다. 카이사르에게 군대 지휘권을 내려놓으라고 강요했다. 카이사르는 호민관 쿠리오를 통해 타협안을 제시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두 사람 모두 군사 지휘권을 갖지 못하게 하자는 수정안이었다.
쿠리오의 수정안은 가결되었다. 그러자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엉뚱하게 비상상태를 선포해버렸다. 그리고는 폼페이우스를 찾아가 그의 손에 절대반지를 쥐어주었다. 폼페이우스에게 로마의 모든 군사지휘권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삽시간에 로마 정국은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 2차 대전 승리를 안겨준 정치인이다.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은 자신의 수상 소식에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직업 문학가가 아니어서 그랬을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탁월한 문학적 가치”를 수상 이유로 꼽았다. 문학적 가치가 반드시 직업 문학가의 전유물은 아니다. 팝가수 밥 딜런도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만약 2천 년 전에도 노벨 문학상이 존재했더라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나 ‘내전기’는 능히 영광을 차지했을 것이다. ‘내전기’는 첫 구절부터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카이사르의 급보가 집정관에게 전달되었다.’
어딘가 익숙한 첫 문장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장미의 이름’ 첫 문장을 연상시킨다. ‘장미의 이름’은 “나는 발레라는 수도원장이 펴낸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로 시작한다.
한 권의 책은 베네딕트 수도회 아드송 수도사의 수기였다. 어라, 수도사의 수기를? 대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들었지? 독자의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 그 순간 독자는 에코가 펼쳐 둔 픽션의 덫에 걸려든다.
‘장미의 이름’은 소설가 이인화에게 ‘영원한 제국’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에코는 카이사르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카이사르의 급보에는 ‘만약 폼페이우스가 군대지휘권을 포기하면 나도 포기하겠다. 원로원이 이 제안을 거부하면 나는 나의 권리와 로마의 권리를 지키는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이 제안은 집정관 마르켈루스에 의해 부정됐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최종 권고’를 내렸다. ‘최종 권고’는 비상시에만 주어지는 긴급 명령이었다.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민을 ‘반역자’로 간주됐다. 그가 군사령관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항복하느냐, 반역자가 되느냐’였다.
갈림길에 선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모았다. 듣기만 해도 가슴 떨린다는 카이사르의 명연설이 시작됐다. 다음은 ‘내전기’에서 스스로 밝힌 연설 내용이다.
“나는 지난 9년 동안 그대들의 총 사령관이었다. 로마를 위한 그대들의 노고는 본인의 지휘와 하늘의 도움으로 빛나는 전과를 만들어냈다. (중략) 이제 그대들에게 카이사르의 명성을 지켜주고 적들의 공격을 물리쳐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장면에서 카이사르의 대범함을 칭송했다. 그는 ‘군주론’에서 “결단과 행동 사이가 길지 않았다. 이는 제국을 갖기를 원하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며 카이사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판세는 녹녹치 않았다. 카이사르의 곁에는 제 13군단 밖에 없었다. 실 병력 수는 고작 4천 명 내외. 더구나 이탈리아반도는 12월 초면 장마철로 접어든다. 갈리아에 있는 카이사르 병사들이 합류하려면 눈 덮인 알프스를 넘어야 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폼페이우스도 그런 이유로 카이사르가 당장 루비콘 강을 건너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곁을 지키는 병력 수는 적었고, 계절 탓으로 인해 멀리 떨어진 지원군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12월이 장마철이라는 점은 폼페이우스를 안도시켰다. 폼페이우스에게는 로마 남쪽 나폴리 인근 카푸아에 2개 군단이 있었다. 언제든 동원 가능한 병력이었다. 여러모로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카이사르는 죽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카이사르의 부하들은 모두 그를 따랐다. 13군단의 모든 병사들은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전원 카이사르와 행동을 같이 했다. 지휘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한 명의 예외자는 카이사르가 가장 신임했던 부장 라비에누스였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보호자, 피보호자 관계였다. 로마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 사이다. 카이사르에 대한 배신이라고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