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끼리의 전쟁
카이사르의 군대가 다가오자 로마 안의 분위기는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엔 애써 무시하던 귀족들은 차츰 두려움에 휩싸였다.
일부는 서둘러 로마를 탈출했다. 공포는 막상 당했을 때보다 상상 단계에서 더 위협적이다. 피난 대열은 점점 늘어갔다. 10개 대대의 병사를 거느린 집정관도 황급히 달아났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지켜 본 백성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왕의 집에 불을 질렀다. 선조가 한양을 굳게 지키며 죽기를 각오했다면 왜란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지 5일 째 되던 날 폼페이우스마저 로마를 떠났다. 캠프에서 자신의 군사들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폼페이우스의 탈출 소식은 즉시 카이사르에게 전해졌다. 이제 로마는 무주공산이었다. 손만 뻗치면 카이사르에게로 굴러오게 됐다.
그런데 로마로 향하던 카이사르는 갑자기 진군 방향을 바꾸었다. 로마가 아닌 폼페이우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는 남쪽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브린디시 항이 목표였다. 카이사르는 그의 뒤를 따라잡으려고 행군 속도를 높였다.
도중에 갈리아 총독 후임자인 에노발부스가 카이사르를 저지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에노발부스는 엇비슷한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에노발부스는 불안에 떨었다. 폼페이우스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폼페이우스로부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에노발부스는 측근들과 탈출을 모의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이 그를 붙잡아 카이사르에게 넘겼다. 카이사르는 에노발부스를 비롯한 여러 명의 반대 측 인물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행군도중 생포한 폼페이우스의 부장 마기우스도 방면했다. 이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키케로는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편마저 버리는 폼페이우스”라며 개탄했다.
폼페이우스 군단은 3월 17일 브린디시 항을 출항했다. 그의 함대가 향한 곳은 그리스였다. 자신의 주력 부대가 주둔한 곳이었다. 이로서 ‘로마인끼리의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로마는 손쉽게 장악했지만 그리스로 간 폼페이우스와 자신의 반대편에 선 히스파니아(스페인) 속주에는 많은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당시의 심정을 ‘갈리아 전쟁기’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위험보다 보이지 않는 위험에 더 취약하다.”
카이사르는 로마인끼리의 전쟁을 치른 후 직접 ‘내전기’를 썼다. 희한하게 자국민끼리의 내전이 외부인과의 전쟁보다 더 잔혹하다. 희생자도 더 많이 나온다. 한국전도 그랬고, 미국의 남북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남북전쟁’은 영어로 ‘Civil War’ 즉 내전이었다.
미국은 4년의 내전에서 60만 명의 군인을 잃었다. 이는 역사상 미군이 참전한 어떤 전쟁보다 많은 전사자 수다. 미국이 독일, 일본과 치른 2차 대전(1939~1945) 전사자의 두 배다.
한국전쟁에선 3만 7천 명, 월남전서는 5만 8천 명의 미군이 희생됐다. 무기의 살상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19세기 중반 남북전쟁(1861~1865)이 오히려 더 많은 미군의 목숨을 요구했다.
20세기 캄보디아 내전에선 전체 국민의 20%에 해당하는 170만 명이 학살됐다. 그 기간 캄보디아는 문자 그대로 ‘킬링필드(killing field)’였다.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선 100일 만에 100만 명이 살해됐다. 보스니아 내전에선 이슬람교도에 대한 인종청소를 명목으로 30만 명을 죽였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남한 군인 14만 7천명, 북한군 5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남한의 민간인 희생자 수만 80만 명이다. 한국 정부 발표여서 북한 민간인 희생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죽거나 부상당한 군인의 수가 남북한 합쳐 190만 명이 넘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보다 히스파니아를 먼저 공략했다. 주변 정리를 마친 후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려는 의도였다. 카탈루냐 지방의 일레르다(오늘 날 스페인 레리다 주의 주도인 레리다)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상대는 7만 8천의 보병에 기병 5천이었다. 카이사르 측은 보병 2만 7천에 기병 3천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승리를 확신했다. 저쪽 진영에는 폼페이우스 같은 유능한 장수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정략론’에서 이 전투를 앞둔 카이사르의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이 싸움에선 도저히 질 수 없다. 장군이 없는 군대와 싸워서 어떻게 패할 수 있나.”
카이사르는 군관들과 백인대장들에게 돈을 빌려 미리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유머인지 지나친 여유인지 혼란스럽다. ‘내전기’에 적은 카이사르 스스로의 해석은 이렇다.
“이는 백인대장들의 충성과 병사들의 사기를 한꺼번에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계책이었다.”
돈을 나눠준 것이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왜 일석이조라고 했을까? 돈을 빌려준 장교들은 원금과 이자의 회수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했다. 카이사르가 패하면 돈을 돌려받을 길이 막막해진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이길 것으로 확신하고 돈을 빌려 주었다. 실제로 뜻밖의 보너스를 지급받은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돌 하나 던져 두 마리 새를 잡는 말 그대로 일석이조였다.
초반 전황은 카이사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인간의 머릿속 계획을 막아선 것은 자연이었다. 계획은 인간이 세웠지만 그것의 성취는 자연의 도움 없이 불가능했다. 천하의 카이사르도 자연 앞에선 무기력했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위치한 상대 진영을 고립시키기 위해 보급로 차단을 시도했다. 그러나 애써 건설한 두 개의 다리가 폭우로 유실됐다. 비는 계속 퍼부어 댔다. 이렇게 되자 고립된 쪽은 오히려 카이사르 진영이었다. 카이사르 진영에선 금세 식량이 부족해졌다. 고대 전쟁은 곧 병참 싸움이었다. 카이사르는 위기감을 느꼈다.
저편에서 카이사르의 내부사정을 눈치 챘다. 제 아무리 카이사르라도 보급선이 단절되고선 견딜 수 없다. 상대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쟁의 신’ 카이사르에게 패배를 안겨줄 것을 생각하니 짜릿했다.
마지막 결전
그들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다. 사슴을 잡기도 전 미리 불부터 피운 셈이었다. 그들은 마치 승리한 것처럼 편지를 적어 로마로 보냈다. 과장되고 부풀려진 이 보고서가 전해지자 로마의 많은 정치인들이 다시 폼페이우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것이 세상인심이었다. 사람들은 승자의 편에 서길 원했다. 하지만 샴페인 잔의 냉기가 미처 가셔지기도 전에 전황은 역전됐다. 상대는 ‘창조적 천재’ 카이사르였다.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쌓은 경험을 응용해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벼운 나무로 선체를 꾸리고 버드나무를 꼬아 그 위를 가죽으로 덮었다. 튼튼하진 않지만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새로 만든 배를 이용해 병사들을 강 건너로 보내 교두보를 마련했다.
1개 군단을 건너편으로 이동시킨 다음 불과 이틀 만에 다리를 만들어 연결시켰다. 이미 다리로 라인 강을 건너 본 카이사르였다. 병사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자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이젠 카이사르 측의 식량조달이 자유로워진 반면 상대편은 꼼짝없이 굶게 생겼다.
상대 진영에서 탈영자가 속출했다. 폼페이우스 휘하 장군들은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승패가 갈리자 현지의 민심이 출렁거렸다. 히스파니아 동북부 지역 주민들이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맹세해 왔다.
많은 수의 병력들이 달아나고 그 뒤를 ⅓ 가량의 카이사르 군대가 쫓고 있었다. 사기가 오른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의 차이다. 상대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카이사르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왔다.
히스파니아 부총독은 카이사르에게 “우리는 단지 총사령관 폼페이우스에게 충성한 것뿐이다. 진심으로 간청하는 바이니 조금이라도 동정심이 남아 있다면 부디 극형만은 피해 달라”고 애원했다. ‘내전기’에 쓴 카이사르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비굴하고 절망적인 자세’였다.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른바 ‘카이사르 키즈’였다. 한때 집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반 카이사르 편 유력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청년 가이우스 쿠리오는 열렬한 카이사르 지지자였다.
그는 호민관으로 활동하며 카이사르를 도왔다. 로마의 젊은이들 가운데 아버지와 반대편에 선 ‘카이사르 키즈’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개혁 정책에 매료되어 있었다.
반면 보수적인 장․노년층은 대부분 원로원을 지지했다. 안타깝게도 쿠리오는 아프리카에서 전사했다. ‘내전기’에는 쿠리오의 전사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의 아픈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카이사르는 진심으로 쿠리오를 아꼈다. 그만큼 상심이 컸다. 젊은 쿠리오의 죽음은 넘치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자신감은 양날의 칼이다. 부족하면 허해지고 넘치면 위태로워진다. 쿠리오의 경우는 명백히 후자였다.
카이사르는 쿠리오에게 ‘아프리카 북부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소탕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당초 그에게 주어진 부대는 4개 군단이었다. 하지만 그는 2개 군단을 시칠리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자신감이 넘쳐서다.
쿠리오는 ‘바알의 문’으로 불리는 곳에 진지를 마련했다.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포에니 전쟁 당시 진지로 삼았던 유서 깊은 장소였다. 때와 장소 모두 영웅탄생의 배경으로 최상이었다. 혹시 그는 이런 신문 제목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젊은 쿠리오, 위대한 아프리카누스의 대를 잇다.’
그러나 상대는 백전노장이었다. 쿠리오의 오늘은 그의 어제였다. 젊은 날 스스로도 간직했던 무모함을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누미디아 국왕은 코끼리 부대를 데리고 쿠리오의 부대를 향해 진군했다.
쿠리오는 조바심을 냈다. 서둘러 공을 세우고 싶었다. 히스파니아로부터 카이사르의 승전 소식이 전해졌다. 속히 코끼리 부대 격파 소식을 카이사르와 로마에 알리고 싶었다.
쿠리오의 조바심은 부대의 움직임에서도 드러났다. 숱한 실패를 맞본 노련한 장수는 상대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긴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경험의 차이였다.
누미디아 왕은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며 쿠리오의 조바심을 자극했다. 승리에 취한 쿠리오는 지나치게 깊숙이 적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상대가 반격을 개시하자 비로소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기병대장이 쿠리오에게 도주를 권유했다. 훗날을 기약하자는 충언이었다. 쿠리오는 이를 거절했다.
“카이사르가 맡긴 군대를 모두 잃고 돌아가 어떻게 카이사르의 얼굴을 본단 말이오.” 쿠리오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보다 100여 년 앞선 항우의 최후를 연상시키는 대목이었다.
싸우면 매번 이기던 항우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죽음을 맞았다. 강을 건너 달아나 훗날을 도모하자는 주변의 만류에 항우는 “그 많은 병사들을 잃고 무슨 낯으로 그들 부모를 본단 말인가”라며 거절했다. 항우 나이 갓 서른이었다. 젊은 쿠리오의 말과 판박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이기고 지는지는 것은 병가(兵家)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거늘 수치심을 참아내야만 진정 대장부가 아니겠나”며 항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 시에 나오는 사자성어가 권토중래(捲土重來:실패를 했지만 훗날 실력을 길러 다시 도전함)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12월 로마로 돌아갔다. 법무관 레피두스의 도움으로 독재관을 거쳐 집정관에 선출됐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이라는 합법적 지위를 가진 채 폼페이우스를 상대할 수 있게 됐다. 거꾸로 폼페이우스는 반란군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혼자였다. 반면 폼페이우스 쪽은 로마의 올스타 군단으로 불릴 만했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물론 그의 장인 스키피오, 카토(흔히 그의 할아버지와 구분하여 소 카토라고 부름), 렌툴루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아들 브루투스(나중에 카이사르를 죽여 유명하게 된 바로 그 이름) 등 맹장들이 참전했다.
더구나 카이사르의 부장이면서 그의 전술을 가장 잘 이해하는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병사의 수에서도 폼페이우스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렇다고 기죽을 카이사르는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적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로 향했다. 폼페이우스는 두 군데 캠프를 차려 놓고 카이사르 선단의 상륙을 저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늘 상대의 예측과 달리 움직였다.
겨울에는 아드리아 해의 해풍이 심해지는 탓에 항해가 어려웠다. 설마 겨울은 피하겠지. 다들 그렇게 예상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상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차이였다.
1월 4일 이탈리아 항구를 떠난 카이사르의 1진은 다음 날 그리스 땅을 밟았다. 방해는 없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예상하지 못해서다. 폼페이우스는 천혜의 요새로 불리는 디라키움에 주둔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전 병력을 동원하여 디라키움을 포위했다.
식량 보급을 끊으려는 의도였다. 6월 들어 벌어진 6번의 전투에서 백인대장을 포함한 2천명의 적을 사살했다. 카이사르 측의 손실은 20명에 불과했다.
일이 잘 풀려가나 싶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진영 내부에서 불상사가 발생했다. 갈리아인 두 명이 동족 기병들의 봉급을 빼돌리다 적발된 후 탈영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가 카이사르 측 군사기밀을 발설했다.
폼페이우스는 60개 대대를 투입하여 그들이 일러준 카이사르 진영의 허점을 공격했다. 천 여 명의 사망자를 낸 카이사르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뼈아픈 패배였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평원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폼페이우스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미리 점찍어 둔 곳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추격하며 병사들에게 “승리가 눈앞에 있으니 가서 전리품과 보상금을 차지하라”고 자극했다. 강행군에 지친 병사들에게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폼페이우스는 평원의 고지대에 진영을 마련했다. 전투를 치르기 유리한 위치였다. 카이사르는 언덕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지형적으로 불리한 곳이었다. 수적으로도 모자랐다. 폼페이우스 군은 보병 4만 7천, 기병 7천기로 구성됐다.
카이사르 군은 보병 2만 2천, 기병 1천 기였다. 보병의 수도 문제였지만 기병의 열세가 더 아쉬웠다. 통상 기병 1기는 보병 10명을 감당하고도 남았다. 카이사르는 ‘창조적 영감’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