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루비콘강 15

by 성일만


옥타비아누스


키케로의 ‘의무론’은 오래 동안 유럽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된 책이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이 책은 루소, 로크에게 영향을 주어 근대 유럽의 시민사회론 형성에 밑거름이 됐다.

키케로는 공화주의자였다. ‘상시 독재관’에 지명된 카이사르와는 평생 다른 길을 걸어왔다. 키케로는 카이사르 암살자들로부터 직접 칼을 건네받은 사람이다. 카이사르를 찌른 바로 그 칼이었다.

그 자리서 키케로는 살인의 정당성을 찾고 있던 암살자들을 칭찬했다. 정작 키케로에겐 정적을 찌를 광기는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논리와 풍자로 카이사르를 곤경에 몰아넣었지만 칼을 들만큼 무모하진 않았다.

카이사르와 키케로는 적이면서도 서로 상대를 인정해주었다. 둘 사이에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카이사르가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고 귀환했을 때 키케로는 그를 마중 나갔다.

카이사르에게 생명을 보장받고 싶어서다. 하지만 멀리서 그를 바라볼 뿐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오랜 친구가 군중들 틈에서 쭈뼛거리는 모습을 발견한 카이사르는 선뜻 말에서 내려 그와 포옹을 나누었다. 키케로는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키케로와 카이사르는 상대에 대한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군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카이사르의 글 솜씨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로마사를 쓴 저자 가운데는 유독 명 문장가들이 많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손꼽히는 영어 명문이다. 윈스턴 처칠은 그의 자서전에서 “역사 공부는 기번에서부터 시작했다.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자 즉시 그 내용과 문체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했다.

처칠은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보다 51년 앞서 테오도르 몸젠은 1902년 ‘로마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독일인 가운데 최초의 노벨 문학상이었다. 로마를 연구한 몽테스키외나 마키아벨리의 문장도 수작이다.

로마인은 모방의 대가였다. 그리스의 모든 것을 받아 들여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음악, 시, 연극을 비롯한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수입했다. 심지어 종교까지 ‘메이드 인 그리스’를 고스란히 베꼈다.

그러나 미완성인 채 혼란 상태를 거듭해온 그리스의 고대 민주주의 정치만은 수입품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로마와 달리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을 정치에 참여시켰다.

아쉽게도 훈련되지 않은 중의(衆意)는 우의(愚意)로 전락했다. 로마는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다른 공화정을 발전시켰다. 로마 공화정(res publica)은 '인민의 것'이었지만 그리스와는 분명 달랐다.

고대 로마의 신학자 락탄티우스는 “누구의 것도 아닌 그들 자신의 것이었기에 로마인들은 국가적 안녕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자신의 개별적 이해는 그 다음이었다”고 주장했다.

로마의 엘리트들은 공화국을 건설하면서부터 1인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서 신속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했다.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지배체제는 소수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으나 시민 전체의 이익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정치 개혁을 희망했으나 번번이 원로원에 의해 좌절됐다.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결단으로 원로원을 무력화시켰다.

종신 독재관이었던 카이사르가 살해됐다. 로마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됐다. 카이사르는 제 1 상속인으로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했다. 이제 겨우 18살 소년이었다.

제 2 상속인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였다. 유언장을 작성하던 카이사르는 몇 개월 후 자신이 제 2 상속인의 칼에 찔려 죽게 될 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물론 데키우스도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설마 자신의 이름이 있을 줄 몰랐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카이사르는 18살 소년에게 후일을 맡겼다. 자신이 죽을 때쯤 옥타비아누스가 충분히 장성하리라 예상하지 않았을까. 카이사르 같은 탁월한 인간도 문득 닥쳐 온 죽음 앞에선 무기력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안토니우스였다.

‘내가 아닌 옥타비아누스라니!’

대체 십대 소년이 무슨 수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간단 말인가. 모두가 염려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눈은 정확했다. 18살 옥타비아누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란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을 마친 후에도 로마 시내는 여전히 민중들의 분노가 지배하고 있었다. 암살범들이 설 땅은 좁았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은 되도록 멀리 달아나야 했다.

이런 어수선한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안토니우스가 조금만 더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가졌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카이사르와 달리 그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갖지 못했다.

그는 평생 추종했던 카이사르보다 폼페이우스를 더 닮았다. 절호의 기회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놓치고 말았다. 정적들은 달아나고 지도자를 잃은 민중은 새로운 리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정치인에게 일의 우선순위 파악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에 있었다. 로마는 사실상 무주공산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무렵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왔다. 18세 옥타비아누스는 여러모로 안토니우스와 달랐다. 나이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참모들은 그의 로마행을 말렸다. 당분간 로마의 불안정한 정세를 관망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대부분 십대 소년들이라면 참모의 의견에 따랐을 것이다. 로마에서 벌어질 격랑에 휩싸이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같은 나이의 카이사르는 최고 권력자의 말을 무시하고 아내와의 이혼을 거부했다. 그리고 기약 없는 망명의 길에 올랐다.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리스는 안전지대였다. 자신을 보호해줄 병력도 곁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행 배에 올라탔다. 그곳에 당장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에 남아서는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다. 권력을 차지하려면 로마로 가야한다.

로마에 도착한 그의 첫 번째 행동은 기막혔다. 옥타비아누스는 먼저 키케로부터 찾아갔다. 세련된 정치 행위였다. 노인들은 예의바른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기 마련이다. 60대 노(老) 정객 키케로는 진심으로 옥타비아누스를 반겼다.

그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라는 부담스런 적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키케로의 착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평범한 10대 소년이 아니었다. 키케로를 어떻게 이용할 지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키케로는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공화정 복귀를 꾀하려 들었다. 그를 도와주는 척하며 안토니우스 견제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카드였다.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판단이었다.

퍼거스 밀러에 따르면 “이 무렵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전통적인 공화정제로는 정치사회적 격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공화정에 집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도움으로 19살에 집정관에 선출됐다. 로마 역사상 가장 어린 집정관이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오판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곧 키케로를 배신했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또 다른 삼두동맹에 합의해 버렸다. 원로원이 삼두동맹에 얼마나 시달려 왔나. 키케로는 십대 소년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새 삼두동맹은 원로원을 말살하려 들었다. 첫 번째 목표가 누구였을까? 안타깝게도 키케로였다. 카이사르에게 키케로는 적이면서 친구였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키케로는 친구도 적도 아니었다. 오직 이용한 후 제거해야할 대상일 뿐이었다. 카이사르라면 친구인 키케로에게 사약까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차도살인 수법이었다. 그는 키케로 제거에 안토니우스의 힘을 빌려 썼다.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도 않았다. 키케로는 졸지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팍스 로마나


몰락한 노 정객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곳저곳 도망 다니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키케로의 목은 로마의 광장에 내걸렸다. 그의 혀는 따로 잘려져 전시됐다. 로마정가를 쥐락펴락해온 혀였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옥타비아누스는 용의주도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치밀함과 인내심을 두루 갖고 있었다. 도무지 10대 같지 않은 10대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추모 경기를 개최했다. 민중들로 하여금 카이사르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고, 그의 후계자가 누구인지를 각인시키게 만들었다. 그에게 민중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설마 이런 반응까지 내다보고 한 일이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추모 경기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아버지(유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음)의 유언이었으나 박수는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왔다. 돈을 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다.

몽테스키외는 ‘로마의 흥망성쇠에 대한 원인 고찰론’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처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민중이 카이사르를 잊게 하는 대신, 그들의 눈앞에 카이사르를 다시 불러낸 셈이었다.’ 놀라운 정치 수완이었다.

양귀비와 클레오파트라는 동서양의 대표 미인이다. 그녀들의 삶은 미인박명을 떠올릴 만큼 짧았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의 전성기였다. 성당(盛唐)으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당의 화려함은 양귀비라는 한 아름다운 여인에 의해 퇴색을 길로 접어들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은 ‘안록산의 난’을 불러왔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전과 후로 나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녀의 비극은 한 남자의 노욕에서 비롯됐다.

황제였던 현종은 어느 날 양귀비를 보고 홀딱 반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이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며느리였다. 아들의 여인, 하지만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고, 남자에게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현종은 원래 어진 임금이었다. 때늦은 사랑이 그를 무너뜨렸다. 현종의 나이 이미 60대, 양귀비는 아직 10대였다. 억지로 양귀비를 품에 안은 현종은 그만 정치를 잊었다.

현종은 양귀비의 비호를 받던 안록산을 중용했고, 그로 인해 내란을 불러왔다. 난의 과정에서 현종은 양귀비를 잃었다. 현종은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준 후 그녀를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서양의 꽃 역시 눈물 속에 일찍 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적들을 하나 둘 제거해 나갔다. 결국 그와 안토니우스 둘의 승부로 좁혀졌다. 안토니우스는 이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 있었다.

20대 초반의 클레오파트라는 적극적인 애정 공세로 카이사르를 함락시켰다. 20대 후반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로맨틱 이벤트를 연출했다. 나일 강에 띄워 논 호화 요트 안에 감미로운 음악과 댄서들까지 갖춰 놓고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 힘만 앞세운 이 남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차지했다. 두 연인은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을 최후 결전 장소로 선택했다. 악티움의 바다에 옥타비아누스를 수장시키려 했다. 안토니우스는 항우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전투에 대동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모든 면에서 우위였다. 함선의 수나, 크기, 병력 등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결과는 반대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눈으로 목도한 아름다운 이집트 여왕은 개전 초 갑자기 달아나 버렸다.

궁중 생활에 젖은 여왕에게 전쟁은 현실 지옥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도망쳐 버리자 안토니우스는 망연자실했다. 결국 그의 해군은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

안토니우스는 자결할 것이니 클레오파트라만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의 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거짓으로 자신의 죽음을 전했다.

충격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따라서 죽었다. 고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미인계를 사용해 끝까지 이집트를 지키려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거부했다.

로마인끼리 벌인 14년간의 내전은 종료됐다. 옥타비아누스의 다음 조치는 또 한 번 의표를 찔렀다. 원로원에 나가 의원들 앞에서 공화정 복귀를 선언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모두가 왕정의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공화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감동한 원로원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성스러운)’라는 칭호를 그에게 선물했다. ‘성스러운 자’는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속주 방위를 맡기로 했다. 속주 방위는 번거로운 일이다. 그 힘든 일을 몸소 맡으려 했다.

실제로는 군사 지휘권을 영구히 손에 넣으려는 술책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40세에 집정관에서 물러났다. 이번에도 원로원은 박수를 보냈다. 대신 호민관의 특권을 요구했다.

호민관은 집정관보다 아래 직책이다. 원로원은 겸손함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언제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호민관에겐 집정관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1년으로 한정된 호민관 특권이 자동 갱신될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다. 이로써 그는 군사력과 원로원에 대한 거부권을 한 손에 쥐게 됐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옥타비아누스의 성공 이유를 이렇게 평가했다. “공격적인 야수는 전쟁 지휘관으로서 최악일 때가 많다. 그런 유형보다는 유화정책을 사용할 줄 알고, 사람을 조작할 줄 알고,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줄 아는 협동적인 인물이 훨씬 낫다.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이런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이유로 안정적인 제국 체제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5현제 시대를 거치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했다. 로마의 힘에 의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이 시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로마가 만든 길은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 서쪽의 스코틀랜드에서 동쪽의 키프로스에 걸친 광대한 시장에서 아프리카 올리브기름과 스페인 산 생선이 함께 거래됐다. 로마 제국은 ‘오르비스 테라룸(orbis terrarum)’ 즉 세계라고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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