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요단강 5

by 성일만


다윗과 골리앗


다윗(David)이라는 이름은 오늘 날 미국에서 가장 흔한 남자이름이다. 구약성서에 600번 이상, 신약성서에 60번 이상 이 이름이 나온다. 원래 다윗이라는 이름에는 ‘사랑 받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한 셈이다.

다윗은 복잡 미묘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을 일으킨 왕으로, 또 메시아의 조상이라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한편 감추고 싶은 과거도 많았다. 그의 진면목은 첩첩산중이고 오리무중이다.

다윗은 원래 평범한 목동이었다. 다윗이라는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사무엘 상 25:10 이런 말이 나올 만큼 다윗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그가 “한 사람의 생애가 온 세계 문학의 소재가 된 것은 다윗이 처음이었다(역사가 바루크 핼펀)”고 할 만큼 대단한 인물로 변신했다.

한 유대교 랍비는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고까지 말했다. 오직 신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윗의 인생은 그대로 장편 소설이다. 한낱 목동에서 왕이 됐는가 하면 늘 쫓기는 신세였다. 그에게 아슬아슬한 추격전은 일상이었다.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노출됐다. 협박범 가운데는 자신의 아들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이었다. 신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긴 시인이었지만 부하의 여인을 빼앗고, 그를 죽음으로 내몬 비정한 남자였다.

그의 인생은 고단했다. 음모와 배신이 늘 주변을 맴돌았고, 상승과 추락의 혼돈이었다. 찬사와 비난은 그를 비켜간 적 없었다. 그래도 많은 미국 어머니들은 여전히 잠들기 전 아들에게 다윗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거인 골리앗만큼 다윗을 빛나게 만드는 배역은 없다.

신학자 유진 피터슨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위대한 동화다”고 말한다. 다윗의 동화에는 뛰어난 스토리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극적인 역전 플롯을 담고 있다. 주인공 다윗은 본래 형편없는 주인공이다. 도저히 상대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나약한 소년이다.

골리앗과 맞선 다윗의 모습을 상상할 때 우리 뇌를 자극하는 연민은 몰입감과 카타르시스를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마치 복싱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과 챔피언의 차이 같다. 주인공 록키는 서른 살을 넘긴 무명 복서다.

사채업자에 고용돼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삼류인생이었다. 그의 상대인 챔피언은 근사한 무패의 핵주먹이다. 안타고니스트(주인공과 대립하는 관계)의 위세가 두드러질수록 독자는 더 깊이 스스로를 이야기 속으로 빠트린다.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고 골리앗의 신장은 2m를 넘겼다. 다윗은 성장 호르몬을 미처 다 소비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어머니가 이 둘의 신체조건을 맛깔나게 설명하는 순간 아이의 마음은 다윗 쪽으로 훅 기울어지고 만다.

몇 가지 보조기구도 활용됐다. 다윗은 어른들의 갑옷조차 몸에 맞지 않아 맨 몸으로 출전했다. 상상해 보라.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자신의 처지와 쏙 빼닮은 한 소년과 그보다 두 배나 더 큰 거인이 마주서 싸우려 하고 있다.

이때 또 하나의 숨겨 논 장치가 등장한다. 골리앗이 들고 있는 어마어마한 쇠로 만든 무기다. 블레셋 장수인 골리앗은 철제 칼을 들고 있었다. 아직 이스라엘에는 없는 무기였다.

이스라엘은 고작 청동기 시대였고, 블레셋은 이미 철기를 받아들였다. 21세기 다윗과 골리앗의 후예들 무기는 정반대다.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은 팔레스타인의 돌팔매(사제 로켓포)를 쏙쏙 집어 삼킨다.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건너 온 블레셋 민족은 일찍 철제 문명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무른 청동기 칼은 철제 칼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많은 이스라엘 장수들이 나가 떨어졌다. 하물며 다윗의 손에 들린 무기는 돌이었다. 철기와 석기시대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승자는 석기시대였다. 다윗은 돌팔매질 한 번으로 보기 좋게 거인 골리앗을 꺼꾸러뜨렸다. 이스라엘 군사들의 앞에 서서 큰소리칠 때만해도 골리앗은 수 천 년 후 자신의 이름이 조선소의 거대한 기중기에나 쓰이게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 남성들의 돌팔매질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성서에 ‘베냐민 지파 용사들은 돌을 던지면 조금도 헛되지 않았다 –사사기 20:16’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대결은 허구일 수도 있다. 최소한 상당한 과장이 섞여 있을 것이다. 유대교 랍비 데이비드 울프는 골리앗 사건을 다윗을 소개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심오한 장치로 파악하고 있다.

골리앗은 단지 도구로 쓰였다. 그의 덩치가 크면 클수록, 무기가 단단하고 날카로울수록 주인공 다윗이 더 돋보이게 된다. 그의 뛰어난 체격과 블레셋의 강력한 철제 무기는 결국 다윗이라는 주인공을 위한 밑밥에 불과했다.

다윗은 광야에서 성장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은 도시를 떠나 광야로 나왔고,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었다. 예수는 광야에서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이겨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삼자 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됐다. 사울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 우리 안에 넣어진 두 마리 수사자는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 사울의 군사력이 우위였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로 달아났다. 사울은 어린 왕 다윗과 권력을 나눠가질 의사가 전혀 없었다.

엔게디 광야는 사해 부근에 위치해 있다. 험악한 산세와 오아시스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소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황량하다. 낮에는 40도 이상 기온이 치솟고, 밤이면 한기를 느낄 정도다. 예루살렘 동쪽의 유대사막 1년 강수량은 10㎜ 밖에 안 된다. 내린 비는 금세 말라버린다. 물기를 잃은 흙은 단단해져 식물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적국의 왕으로부터 조그만 땅을 얻었다. 적의 적은 곧 아군이었다. 그 땅은 다윗 왕조의 기반이 됐다. 그에 앞서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혼인했다. 이로써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 지위를 확보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신분 상승에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그의 왕조를 흡수했다.

다윗에겐 여인이 끊이지 않았다. 광야 시절 인근 유대인 거부의 아내 아비가일을 만났다.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며 다윗을 비웃었던 자였다. 그가 죽은 후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했다. 거부의 재산은 고스란히 다윗에게 넘어왔다. 두 번의 결혼은 다윗의 권력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느 해 봄 다윗은 또 다른 여인을 만났다. 예루살렘 성안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게 된다. 장군의 아내 밧세바였다. 남편은 왕의 명을 받아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다윗은 은밀히 명을 내려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도록 만들었다.

중국 역사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촉나라 망제(望帝)는 부하인 별령에게 치수 사업을 맡겨 멀찍이 내보냈다. 그 사이 별령의 아내와 통정했다. 하지만 다윗과 달리 망제는 스스로 이를 부끄럽게 여겨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그가 떠나간 음력 이월이면 두견새가 슬피 울었다. 촉나라 백성들은 두견새가 울 때 마다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다윗과 그 여인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는 일찍 죽었다. 두 번째 아들이 솔로몬이다. ‘평화’와 ‘대신하는 자’라는 이중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다윗의 왕권은 늘 위태로웠다. 다윗은 사울 사후 유다 지파의 왕으로 옹립됐다. 하지만 나머지 지파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쪽에 지나지 않는 왕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각 지파의 독립성을 더 중시했다.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보듯 이는 유럽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윗은 12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의 왕일뿐이었다. 주변 인물들은 툭하면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다윗 스스로도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 -사무엘 하 3:39”고 토로할 정도였다. 스루야는 다윗의 여동생이다. 그에게는 조카들이었다.

다윗은 나중에 아들 솔로몬에게 “그들을 모두 죽여라”는 유언을 남겼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들을 모두 죽여야 했던 태종 이방원의 심정이 다윗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다윗 일대기를 쓴 데이비드 울프는 “그의 왕권은 밧세바 사건에 대한 세간의 악화된 여론,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의 어려움, 사울 잔존 세력과의 갈등으로 약화되었다”고 평가했다.

사울은 벤야민 지파였다. 그들은 별도의 나라를 세워 다윗과 대립했다. 둘로 쪼개진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선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예루살렘은 워낙 정복하기 어려운 지형 탓에 평화를 유지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은 말 그대로 난공불락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는 한 군데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그곳 주인들은 예부터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해 성 밖의 우물과 통하는 비밀수로를 만들어두었다. 다윗은 이 수로를 파괴해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다.

이 과정은 나중에 영화 ‘반지의 제왕 2’ 헬름협곡 전투의 모티브가 됐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후 다윗은 비로소 왕조의 주인이 됐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다윗은 통일 왕조를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소원대로 예루살렘에 묻혔다.

다윗은 쉽게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다. 데이비드 울프는 “그는 모순 덩어리다. 고귀함과 밑바닥 정서를 함께 지녔고, 고결한 시인이자 무자비한 정복자다”고 설명했다.

유진 피터슨은 “불행한 아버지였고, 신실하지 못한 남편이었다.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면 그는 시적 능력을 지닌 미개한 족장일 뿐이다. 그의 생애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그의 체험과 증언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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