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1967년 이스라엘 대법원은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2천 년 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자는 것이다. 자신들의 조상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와 무관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스라엘 대법원의 논리는 이랬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인들에게 물어야 마땅하다. 다시 재판이 열리게 되면 이탈리아 로마의 법정에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사람은 로마인 총독 빌라도이기 때문이다.
당시 십자가형은 주로 반(反) 로마 반란 주동자들에게 적용됐다. 사형수들이 공개 장소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줘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다. 로마는 관대한 종교정책, 개방된 시민권 제도를 통해 제국을 유연하게 다스렸지만 저항하는 자들에게까지 너그럽진 않았다.
로마는 서유럽에서 아프리카북부, 중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속주로 불리는 식민지를 두었다. 속주를 다스리는 로마인 총독에게 부여된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혹독하게 쥐어짜서 많은 세금을 걷어내고, 그에 반항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가 유대 속주에 적용한 세율은 전체 소득의 30% 이상이었다. 기껏 농사짓고 장사해서 돈을 벌어 봐야 로마인들에게 다 빼앗기니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유대 땅에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로마군은 반란을 이유로 한꺼번에 2천여 명을 십자가에 매단 적도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얼마 전 고향 나사렛의 세포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예수는 부모나 이웃들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에 따르면 1세기 초 30년 동안 200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15만 명이 민중 봉기로 인해 사망했다. 로마의 탄압이 극심할수록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간절히 바랐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은 반란의 중심지였다. 나사렛은 몇 차례 반란과 그에 따른 로마의 탄압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황폐한 지역으로 변했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예수의 제자 빌립의 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요한복음 1:46”라고 비웃은 것도 그런 연유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해있다. 갈릴리 사람들을 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메말랐다. 랍비 문학가들은 ‘촌뜨기’라는 말로 갈릴리 사람들을 얕보았다. 갈릴리 사투리는 같은 유대인들에게 늘 놀림거리였다. 어떤 지역에선 갈릴리 사람들이 회당에서 구약성서 토라를 낭독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 나사렛이라는 말의 어원은 ‘가지’에서 나왔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그의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사야서 11:1’ 는 예언을 남겼다.
예수의 죄목은 내란선동죄였다. 이스라엘 군중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정치범으로 간주했다. 빌라도는 당시 10년이나 이스라엘 총독 자리에 있었다. 긴 기간 동안 체득한 교훈은 반란의 징후가 있을 시에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원래 총독 관저는 한가로운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탓에 예루살렘의 임시 거처로 옮겼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군중들의 소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로마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빌라도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 매우 잔인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그는 가차 없이 군중 소요를 진압했다. 병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군중들에게 마구 몽둥이를 휘둘렀다.
소요의 원인은 빌라도가 예루살렘 성전의 성물을 자신의 물 잔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겐 묵과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빌라도는 예수의 처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를 살려둠으로써 더 큰 소요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했을 뿐이다.
로마군은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기원전 957년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40년 후였다. 성전의 서쪽 벽 일부는 남았다.
유대인들이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 ‘통곡의 벽’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남부 마사다 요새에 모여 마지막 결사 항전을 벌였으나 서기 73년 936명이 전원 자결했다. 그 후 2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자지구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유대인들은 속속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1800년대 초에도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옛 고향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유대계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원과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소집한 시오니스트 회의를 중심으로 옛 땅에 유대인 수를 늘리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영국이 이 움직임에 동조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주민이었던 아랍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 정부를 세우려 했던 영국은 이내 불가능한 목표임을 깨달았다.
유대인들은 이 지역에 ‘하가나(Haganah:히브리어로 방위라는 의미)’라는 민병대를 설립해 이주한 동포들을 보호했다. 하가나는 라빈, 샤미르, 베긴 등 세 명의 이스라엘 총리를 배출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상호 거부감을 확인한 영국은 두 개의 분할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아랍인들은 이마저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 유대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1919년 10만 명에서 2차 대전 후에는 60만 명으로 증가했다.
아랍인의 수도 100만 명까지 폭증했다. 얼마 전만해도 40만을 조금 넘길 정도였다. 이민자를 늘리기 위한 시온주의 투쟁은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라는 큰 빚을 진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유대인들에겐 거저 굴러온 땅이 아니었다.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 이 지역에 두 개의 국가 안을 의결했다. 아랍인들은 극렬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스라엘 민병대가 100명의 아랍인을 살해하자 그들은 77명의 유대인을 죽이는 것으로 보복했다.
이스라엘은 이듬 해 5월 독립을 선언했다.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5개국이 즉각 이스라엘을 침략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무기와 병력에서 모두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아랍군은 긴 수송라인 탓에 식량과 무기를 적절히 공급하지 못했다. 연합군 사이의 의사소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완승은 아니었다. 겨우 수도인 텔아비브로의 진격을 막아내는데 그쳤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해 주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은 오히려 체코를 통해 소련제 무기를 제공받았다. 구소련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1948년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겨우 78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전쟁으로 6천 명 이상이 죽었다. 부상자는 3만 명에 달했다. 이스라엘은 이후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렇다고 비극이 멈춘 것은 아니다.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에는 여전히 폭발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강을 건너 온 히브리인들은 이편과 저편의 확실한 경계선을 그었다. ‘야곱의 사다리’ 이용자는 유대인으로 제한됐다. 요단강의 이편엔 천국이, 저편엔 지옥이 있을 뿐이다.
동양의 장자는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요단강을 기준으로 한 이편과 저편의 구분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