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가운데 둘째 아들 이반은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멸에 대한 믿음도 없고 도덕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이반은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여서 신이 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며 경건한 수도사인 막내 동생을 몰아세웠다.
이반은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는 대신 약간의 빵을 제공하고 신비, 기적, 권위로 그들을 매혹시키면 저 하늘 위가 아닌 이 지상에서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반이 수도사인 동생 알로샤에게 소리쳤다.
“이봐, 수도사 나리, 어리석음이란 이 지상에 꼭 필요한 거야. 세상은 어리석음 위에 세워져 있고, 그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몰라.”
이반이 주목한 것은 빵이었다. 마귀의 첫 번째 요구는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에게 요구한 두 번째 요구는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5~7
소설 속 대심문관은 계속 예수를 향해 다그쳤다. 당신은 왜 그 때 이적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높은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돌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의 아들인 당신은 무슨 이유에선지 이적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이적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나? 이적의 능력이 없는 우리가 이적을 보여주려니 얼마나 가증스런 일을 해야 했겠나. 온갖 과장과 레토릭, 때로 거짓 시늉까지 해야 했어. 당신이 했더라면 쉬웠을 그 일을.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며 정중히 마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 유대인들은 한 때 자신들의 메시아로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자가가 그들에게 주는 압박감은 무거웠다.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저주였다. 나무 위의 저 사람을 진짜 메시아로 믿었던 그들이다. 얼마나 기다려온 메시아였던가. 그런데 그는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래에 있던 제사장과 관리들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너를 믿겠다”며 소리쳤다. 예수가 광야에서 들은 마귀의 음성과 같은 내용이었다. 성전 꼭대기가 십자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어느 것이 됐든 이전에 보여줬던 34가지 이적에 비하면 쉬운 일이었다.
그 순간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가 메시아다. 이스라엘의 왕은 나다”고 외쳤으면 어떻게 됐을까. 창을 든 로마 군인들이 일제히 땅에 엎드렸을 것이다. 세상은 평화로워지고, 유대인들은 자유를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반은 그런 예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십자가는 무거운 의미를 지닌 기독교의 상징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원래 십자가를 몹시 싫어했다. 비단 그 뿐 아니라 모든 로마인들은 되도록 십자가를 멀리했다.
로마 시민은 어떤 흉악 범죄를 저질러도 십자가 형벌만은 면해주었다. 이 형벌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십자가형은 로마인 근처에도 와서는 안 된다”고 확실히 선을 그었다. 형벌이 주는 공포와 잔인함으로 인해 식민지에서 반란에 참여한 정치범들을 본보기 삼아 십자가에 매달았다.
십자가 모형은 처음 보는 외국인들에게도 혐오감을 일으켰다. 16세기 중국에 선교사로 간 마테오 리치는 십자가 그림을 선교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선 글씨보다 그림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가 십자가 대신 떠올린 것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중국인들은 성 모자 상(像)에는 호감을 나타냈다. 여자(女)가 아이(子)를 안고 있으니 좋을 호(好)와 겹쳐서다.
콘스탄티누스는 어느 날 십자가에 관련된 꿈을 꾼 후 전쟁에서 이겼다. 이 후부터 그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모든 로마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게 했다. 십자가는 하루아침에 승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기까지 그리스 문화의 영향도 한 몫을 했다. 그리스인은 형상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스에 조각이 발달한 이유다. 초기 기독교에선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모든 우상을 배격했다. 그리스 문화가 스며들면서 십자가를 비롯한 형상들이 속속 도입됐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기독교의 비밀이 담겨 있다. 12사도의 한명인 요한은 그 비밀을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사용했다 –요한 1서 4;10”고 풀이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쓰려 했듯이 신은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십자가 위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아담이 저지른 원죄의 사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바울의 설명은 보다 구체적이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느님과 화목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6.” 바울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 피 흘림 이유를 “화목제물 -로마서 3:25”로 들고 있다. 신과 인간의 화해다.
두개의 칼
마태복음에는 두 개의 칼이 등장한다. 똑같이 예수가 말한 칼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네 검을 도로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2
둘 다 예수가 말한 칼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개의 칼은 서로 대립한다. 심지어 두 개의 칼은 서로를 부정한다. 칼집을 나온 두 칼의 용도는 완전히 다르다. 앞의 칼은 시퍼렇게 날이 서있다. 눈앞의 상대를 베지 않고선 단연코 칼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뒤의 칼은 전혀 날카롭지 않다. 오히려 칼의 원래 의미를 부인하고 있다. 칼은 무언가를 자를 용도로 만들어 졌다. 그러니 자를 대상이 사라졌을 땐 원래의 자리인 칼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칼집 밖의 칼은 살상무기지만 칼집 속의 칼은 하나의 쇠붙이에 불과하다.
마태복음에서 두 개의 칼을 얘기한 사람은 동일하다. 모두 예수가 한 말이다. 그러나 칼의 주인과 용도는 각각 다르다. 앞의 칼은 예수 자신의 칼이다. 예수는 검을 주러 이 땅에 왔다고 분명히 말했다. 앞의 칼은 무언가를 베어야만 한다.
예수는 이 땅에서 무엇을 베려했을까?
뒤의 칼은 베드로의 칼이다. 베드로는 그 칼로 스승을 체포하러 온 자의 귀를 베었다. 칼의 원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잘린 귀를 도로 제자리에 붙여준 후 칼을 빼든 베드로를 나무랐다. 칼의 목적을 부인한 것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마태복음 5:9. 그런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마태복음 10장에선 화평을 부인했다. 자신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했다.
마태복음 5장과 10장 사이에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주기를 거부한 화평은 무엇이고, 주려던 검은 무엇일까?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예수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다시 고쳐 명한다. 이번엔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예수의 칼과 베드로의 칼에는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태복음에 나타난 두 개의 칼은 독자에게 혼란을 안겨준다. 베드로는 그 칼로 사람의 귀를 잘랐다. 칼은 스승 예수를 붙잡으러 온 자에게 확실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칼집을 벗어난 칼은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
칼집에서 나온 칼은 무라도 잘라야한다. 그래야 칼의 체면이 선다. 하지만 예수는 잘린 귀를 도로 붙여주었다. 칼의 애초 목적을 부정했다.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며 제자를 나무랐다. 그리고 그를 붙잡으러 온 자에게 순순히 잡혀갔다.
베드로의 칼은 로마 황제의 칼이다.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선 누구나 함부로 칼을 가질 수 없었다. 오직 로마황제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칼을 소지할 수 있었다. 토마스 마틴 ‘고대 로마사’에 따르면 로마법은 함부로 칼을 쥔 자를 아예 반역자로 간주했다.
현재 칼을 든 자는 장차 칼을 들 자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로마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이유도 그가 칼을 손에 들까 봐서다. 칼을 든 자는 언제든 반란의 우두머리로 바뀔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다. 황제의 칼이 예수의 칼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1세기 무렵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땅의 모든 민족들은 로마 황제의 칼 아래 엎드렸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대 민중은 예수가 칼을 들고 황제의 칼에 대항하길 바랐다. 하지만 예수는 황제의 칼을 부정했다.
예수가 주려든 칼은 무엇일까. 예수의 칼은 흔한 대장장이의 칼이 아니었다. 그의 칼은 육신을 베기 위한 용도를 갖지 않았다. 그의 칼은 영혼을 베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로마 병사를 베진 않았지만 결국엔 로마 황제를 쓰러뜨렸다. 그 칼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을 순교자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그 칼은 노예상인 존 뉴튼의 마음을 찔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Amazing Grace·찬송가 405장)’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 예수를 본 후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하리라 –누가복음 2:34-35”고 예언했다. 기독교는 예수의 그 칼에 의해 세워졌다. 두 개의 칼, 즉 예수의 칼과 황제의 칼은 번갈아 가며 서양문명을 지배했다. 중세까지는 예수의 칼이 우세했다. 근대 이후 황제의 칼 시대로 돌아갔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