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일만 Sep 20. 2022

망각의 강 레테 5


로마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사라졌다. 하지만 예수는 놀라운 반전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죽은 지 3일 만에 그는 부활했다. 예수가 행한 마지막 이적이었다. 

그가 죽은 자를 살린 적은 있었지만 스스로를 사망의 늪에서 건져낼 줄은 제제들조차 예상치 못했다. 제자들 가운데는 그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도마 같은 이도 있었다. 조심스런 성격의 도마는 스승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 상처를 직접 확인하려 들었다.

도마는 3년 동안 예수를 따라 다니며 숱한 이적을 지켜본 인물이다. 죽은 나사로의 소생을 직접 본 도마조차 스승의 부활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를 보았다는 친구들의 말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며 여전히 의구심을 풀지 않았다. 

결국 예수는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상처 난 자신의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고 권했다. 창에 찔린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도마는 비로소 의심에서 벗어났다.      

그런 다음 도마와 예수가 주고받은 대화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의 활동은 탄력이 붙었다. 그 중에는 12제자는 아니었지만 기독교를 탄압하는 자에서 회심한 바울도 있었다. 예수가 준비해둔 비장의 카드인 셈이다. 기독교가 로마로 건너간 데는 바울의 역할이 컸다. 바울은 제국의 심장 로마로 건너가 선교를 했다. 

그가 로마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로마법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로 가기 전 그곳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 편지 즉 로마서에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담겨져 있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그 자체로 성서 전체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신약 또는 복음의 가장 완벽한 설명서다”고 평가했다. 

로마서의 핵심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다. 한문이어서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뜻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기독교가 한낱 유대의 종교에 그치지 않고 온 세계로 퍼져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교리다.

원래 구원의 대상은 유대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야곱의 사다리’를 통하지 않고는(이스라엘과 요단강 편 참조)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구원이 유대인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인간으로 확대하기까지 초대 교회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 수장이던 야고보와 바울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는 교회 내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다. 하지만 결국엔 바울이 이겼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로마서 10:13 간단하고 편리한 메시지다. 바울의 주장은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심오하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비밀 –골로새서 2:3’이라고 표현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밝힌 논리는 선명하다.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겨났고 그로 인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됐다 –로마서 5:12~21”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됐다는 ‘이신칭의’다.     

기독교는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 왔다. 비로소 로마 내에서 종교로 인정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커진 몸집으로 인해 네 명의 황제에 의해 분리 지배되고 있었다. 내전을 통해 이를 다시 통합한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할 명문이 필요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에서 해답을 찾았다. 신이 하나이듯 황제도 오직 한 명뿐이다. 황제는 신으로부터 세상을 지배할 권력을 부여받았다. 신이 내린 권력이니 누구도 넘볼 수 없다. 이런 논리를 들었을 때 콘스탄티누스가 얼마나 기뻐했을까.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논리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던 생각이 기독교인들의 입에 흘러나왔다. 딱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아니었던가.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했다. 덕분에 그에게 대제(the Great)라는 과분한 호칭이 주어졌다.   

밀라노 칙령이 발효된 지 61년 후 최초로 교회와 황제의 권력 사이에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74년 데살로니카에서 벌어진 교회 소요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을 학살했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이를 이유로 황제의 부활절 예배 참석을 불허했다. 1075년에 벌어질 ‘카노사의 굴욕’의 서막인 셈이다. 황제는 밀라노 주교에게 간청하여 겨우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세속에 대한 교회 권력의 우위를 처음으로 확인한 사건이었다. 예수의 칼이 황제의 칼을 누른 것이다. 마침내 테오도시우스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표했다. 

윌 듀런트는 ‘문명 이야기’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초기에 보여준 모습보다 더 위대한 드라마는 인류사에 없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수를 늘려갔고, 원수들은 혼란을 야기했으나 그들은 질서를 유지했다. 쇠로 된 검 앞에서는 말씀의 검으로 싸웠고, 잔학성에는 소망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를 쓰러뜨렸다. 가이사(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경기장에서 만나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국교 선포 이후 기독교는 거침없이 영토를 확장시켜갔다. 유럽 모든 나라에서 예수의 칼은 황제의 칼을 능가했다. 오늘 날 유럽의 기독교 영토는 좁아들고 있지만 신대륙과 아시아에서 여전히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유럽의 역사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으로 양분된다. 이 둘은 오랜 동안 충돌해왔다. 아테네는 헬레니즘, 예루살렘은 헤브라이즘을 상징한다. 헬레니즘은 이성, 헤브라이즘은 계시라는 상반된 토양 위에 서 있다. 

역사가 기록해둔 이 둘의 첫 번째 만남은 2천 년 전 바울의 아테네 방문이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 중 아테네(신약성경의 아덴)에 들렀다. 당시 세계의 수도는 로마였지만 문화의 수도는 아테네였다. 

두 나라 가운데 국력은 로마가 앞섰으나 지적 수준은 그리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좀 산다하는 로마인은 모두 자녀를 그리스로 유학 보냈다. 카이사르도 한 때 그리스에서 공부했다. 로마인들은 대화중에 가끔씩 헬라(그리스)어를 써야 배웠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8세기 영국인들이 프랑스어를 말해야 인텔리 대접을 받은 것처럼.

바울은 지중해 항구에 인접한 다소 출신이다. 교육도시로 꽤 이름 높았던 곳이었다. 조국을 떠난 유대인들이 살고 싶어 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의 자식 교육열은 대단했다. 

바울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연 헬라어에도 능통했다. 신약 성경의 중심을 이루는 바울의 13서신은 모두 헬라어로 쓰였다. 그리스어 언어학자 멜란도르프에 따르면 13서신에서 보인 바울의 헬라어 표현력은 매우 뛰어난 수준이라고 한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사상의 거장들을 낳은 철학의 도시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기독교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데아는 곧 영원한 진리를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플라톤 철학을 접한 미켈란젤로는 “나의 조각은 돌덩어리 안에 숨어 있는 이데아의 나머지 부분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작업에 불과하다” 고 말했다.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눈앞의 세계는 가상일뿐이다. 그 안에 내재된 원형, 곧 이데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조각가의 진정한 할 일이라는 고백이다.  

철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첫 문장이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1” 말씀이 곧 이데아라는 주장이다.

신약성서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것(Being sure of what we do not see –히브리서 11:1”이라고 가르친다. 보이는 것만 믿는 이성과는 거리가 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명백한 차이다. 

바울의 아테네 전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바울 연구가 귄터 보른캄의 냉정한 평가에 따르면 실패작이다. 바울이 유명한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청중들은 저 히브리인이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리스 청중들은 조롱을 남기고는 일제히 떠나갔다.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던 대목에 이르러서다.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죽은 사람의 부활은 뜬 구름 잡는 얘기였다. 

생물학적으로 한 번 죽음에 이른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간혹 들리는 예화는 거짓이거나 일시적 심장 박동 정지를 죽음으로 오판한 것이다. 첫 만남은 어긋났지만 아테네 청중들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 후 아테네인들은 2천 년을 훌쩍 넘긴 현재까지 변함없이 부활을 믿고 있다.       

한반도에 최초의 십자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임진왜란(1592~1598년) 때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무라이 출신이 아니어서 쇼군(將軍)이 될 수 없었다. 도요토미는 일본 열도를 통일한 후 대륙까지 넘보려 했다. 신무기 조총을 앞세워 조선부터 침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그의 근위무사였다. 스스로 5만석의 영지를 지닌 영주이기도 했다. 고니시는 임진년 당시 맨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왜군의 선봉장이었다. 

1592년 4월 14일 왜군 선발대가 부산포에 상륙했다. 당시 왜군의 상당수는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불법의 힘을 빌려 무사히 귀향하겠다는 일종의 부적이었다. 

고니시의 부대만은 낯선 깃발을 들고 있었다. 붉은 바탕에 그려진 흰 십자가였다. 이 깃발은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띌 만큼 표가 났다. 이순신은 십자기 깃발을 ‘난중일기’에 적어두었다. 한반도에 출현한 첫 십자가였다. 

그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1794년(정조 18년) 12월 23일. 두 번째 십자가가 조선 땅으로 유입됐다. 이번엔 침략군이 아닌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 의해서다.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첫 가톨릭 신부였다. 주문모에 의해 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조선 땅에 생겨났다. 

가톨릭은 당초 제사를 허용하는 등 유연하게 접근했다. 나중에 제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많은 순교자를 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신유박해가 일어나 주문모를 비롯한 약 100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다시 200년이 지난 2020년 현재 한국 기독교인의 수는 약 1360만 명(개신교와 천주교 포함·네이버 참조)을 헤아린다. 한국 인구의 27.2%에 해당된다. 예수가 세운 교회는 이 땅에 2만 개를 헤아린다. 



작가의 이전글 망각의 강 레테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