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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2. 2022

망각의 강 레테 10

아랍인의 뿌리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모두 114장 6천여 절로 되어 있다. 무함마드를 통해 전달된 알라의 계시를 기록해두었다. 코란은 최초의 아랍어 책이기도 하다. 코란이 없었더라면  아랍 국가들에서 공통으로 쓰고 말하는 아랍어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코란은 유일신 알라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명시했다. 원래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에 순종, 무슬림에는 복종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신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어야 비로소 이슬람교도를 의미하는 무슬림이라 할 수 있다. 

무슬림은 최대한 자신의 몸을 낮춘다. 온몸을 굽혀 땅에 이마를 대는 가장 낮은 자세로 오로지 알라에게 순종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한다. 신 앞에 한 없이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통해 몸과 마음은 온전한 평화에 이를 수 있다.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했다. 초기 메카 시절 계시들은 온건하고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메카에서 밀려나 메디나로 옮긴 이후 계시는 조금씩 폭력성을 띠기 시작했다. 

흔히 메디나 장으로 불리는 코란의 후반부에 이르면 슬슬 전쟁을 부추겼다. 전쟁의 부산물인 전리품을 얻고 나면서부터다. 상대적으로 관용성은 옅어져 갔다. 이 무렵부터 비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간 622년을 원년으로 간주한다. 이를 헤지라라고 부른다. 이슬람 역사에서 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날과 함께 가장 중요한 날로 간주된다. 둘 다 신의 인도로 이루어졌다.  

이슬람은 헤지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헤지라 이전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따르는 소수의 추종세력에 불과했다. 헤지라 이후 비로소 법과 체제를 갖춘 종교 공동체로 성장했다.  

메디나로 이주(헤지라) 이후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가 세워졌다. 무리를 뜻하는 집단에서 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움마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신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슬림은 전쟁을 통해 성장했다. 말씀에 앞서 칼이 먼저 상대를 제압했다. 칼에 굴복당한 상대는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는 스페인의 남미 정복 과정과 유사했다. 폭력에 짓밟힌 피 정복자 인디오들은 태양신을 버리고 예수를 선택했다. 

무함마드는 ‘바드르 전투’서 300여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950명의 메카 군을 무찔렀다. 이후 신의 예언자로서 그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메카 군은 1만 여명의 대군을 조직해 다시 쳐들어 왔으나 패배했다. 무함마드는 630년 메카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후 이슬람의 정복지는 빠르게 늘어났다. 교세도 급속히 확장됐다. 그러는 동안 초기의 순수한 열정은 조금씩 퇴색되어 갔다. ‘하디스’는 무슬림끼리의 전쟁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하디스’는 지켜지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632년 사망했다. 생의 마지막 8년 동안 그는 80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이슬람 공동체의 수입원을 늘려주면서 교세 확장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전리품은 골고루 나누어졌고, 정복민은 이슬람 신도로 탈바꿈했다. 

무함마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무함마드는 일찍부터 고아로 자랐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 이미 죽었고, 어머니마저 6살 때 세상을 떠났다. 삼촌에게 의지했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이는 대부분 종교 창시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부처나 예수의 어린 시절 역시 마찬가지다. 평범했던 어린 시절은 종교적 숭배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은 누구나 신비로움과 상관없이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무함마드는 고향 메카에서 양 떼를 치는 목동으로 자랐다. 이는 당시 중동에선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토착민인 하심 가문에 속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아랍인의 소금’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전기는 하심 가문의 뿌리를 오늘날 이라크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과 연결시키고 있다. 아랍인과 유대인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랍인은 그의 장자 이스마일의 자손들이다. 유대인은 그의 본부인에게서 낳은 이삭의 후손들이다. 

무함마드는 메카 시절 설교에서 “인간은 혈통과 부족, 신분을 떠나 오직 신(알라)에 대한 믿음만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를 연결하는 중요 상업도시였다. 카바 사원으로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인한 수입이 상당했다. 주민에게는 하나의 신을 주장하는 무함마드가 불편했다. 장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메카의 상인들은 무함마드를 도시에서 추방시켰다.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를 살펴보면 같은 사안을 두고 초기와 후기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이슬람 문화에서 문제가 돼온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도 그랬다. 특히 무함마드의 부인 하디자의 생전과 사후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하디자는 남편보다 15살 연상이었다. 남녀를 통틀어 첫 무슬림이기도 한 그녀의 움마 내 지위는 상당했다. 참고로 첫 번째 남자 무슬림은 무하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다. 

하디자는 움마의 중요 의사 결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해도 여성의 발언권은 상당했다. 그러나 부인 하디자가 죽은 후 여성에 대한 무함마드의 ‘하디스’는 변했다.      


헤지라     


무함마드의 ‘하디스’가 변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여성에 대한 개인감정이나 나이에 따른 변화일 수도 있다.  가령 무함마드는 양아들의 부인에게 반해 그 둘을 이혼하게 한 다음 며느리와 결혼한적 있었다. 이는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위반한 행위였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샤리아’ 자체를 바꾸었다. 심지어 신의 계시를 기록한 코란까지 동원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코란 33장 37절에 따르면 ‘양자로 맞이한 아들들이 아내들과 이혼했을 때 믿는 사람들이 그 아내들과 결혼함에 어려움이 없도록 함이라’고 되어 있다. 

혼자된 여인들에게 재혼의 기회를 주려는 듯 보이지만 무함마드 자신의 행위를 교묘히 정당화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알라의 명령’이라고 주장했다. 며느리와의 결혼을 위해 신의 계시를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이다.      

중동은 3700여 년 전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지역이다. 이 일대는 유목민의 땅이다. 원래 법은 정주보다 유목사회에서 더 강조된다. 한 곳에 머물러 살면 법보다 예절이 더 강조된다. 뻔히 아는 처지에 자꾸 법, 법하고 따지면 서로 민망해진다. 반면 떠돌이들 사이에는 보다 강력한 법의 굴레가 필요하다. 예절만으로 그들을 구속시킬 순 없다. 법은 예절보다 훨씬 엄격하다. 

이슬람의 샤리아도 마찬가지다. 지나칠 정도로 엄벌 위주다. 알라를 부정하면 교수형에 처한다. 도둑질을 하면 손이나 발을 자르고, 남의 눈을 멀게 한 자는 그 눈을 도려낸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매니큐어를 칠한 여성의 손가락을 자르기도 한다. 지금도 샤리아는 이슬람 국가 법 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법과 물의 관계다. 이슬람의 법 ‘샤리아’는 ‘물가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을 지녔다. 사막에서 물은 곧 생명이다. ‘물이 흐르는 길’을 의미하는 한자 법(法)과 닮아 있다. 물 수(水)와 갈 거(去)가 만나 법이 됐다.  

여성에 대한 ‘샤리아’와 ‘하디스’의 변화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노년에 많은 여성과 혼인했다. 그의 마지막 부인 아이샤는 고작 6살에 아버지의 권고로 선지자에게 시집갔다. 그녀가 너무 어린 탓에 무함마드는 혼인 후 3년 동안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아이샤는 마함마드의 친구이자 나중에 칼리프에 오른 아부 바크르의 딸이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에선 아이샤를 여전히 ‘믿는 자의 어머니’로 받들고 있다. 

노년의 선지자와 어린 부인 사이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느 날 무함마드는 한 젊은 남자가 아이샤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목도했다. 공공연히 “나중에 선지자가 죽으면 아이샤와 결혼하겠다”고 말해온 남자였다. 

무함마드는 분노했다. 이후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더욱 보수적으로 변했다. 그 젊은 남자의 아이샤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다. 아이샤의 자매와 결혼한 후 둘 사이에 낳은 딸에게 연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이샤 역시 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3대 칼리프가 죽자 자신을 사랑해온 남자를 그 자리에 추대하려다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이 전쟁에서 아이샤의 연인은 그녀에게 향하던 화살을 대신 맞고 죽었다. 영화 같은 엔딩이었다.

무함마드는 점점 더 여성들에 대해 엄격해졌다. 처음과 달리 외출 할 때에는 반드시 온 몸을 천으로 가리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이슬람 여성들의 옷차림은 더욱 제한적으로 변했다. 현재 그녀들의 복장에는 부르카, 히잡, 차도르, 니깝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주로 입는 부르카는 여성의 신체를 모조리 가리는 가장 엄격한 복장이다. 두 눈조차 망사로 가려 겨우 걸을 수 있도록 꽁꽁 싸매고 다닌다. 니깝은 부르카에서 두 눈의 망사를 떼 낸 복장이다. 

니깝은 입은 여성은 신체 가운데 유일하게 두 눈만 드러나 있다. 차도르를 입은 여성은 얼굴을 볼 수 있고, 히잡은 일반 복장에 머리카락만 가린 것이다. 이슬람 여성들은 가족을 제외한 남자들에게 절대 머리카락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가난하게 성장했다. 고아가 된 후 대상의 무리에 섞여 장거리 원정을 다녔다.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무함마드의 인생은 20대 중반에 이르러 극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과부였던 부자 여성 하디자를 만났다. 

처음엔 그녀의 상단을 수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했다. 무함마드는 25살의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신부 하디자의 나이는 40살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청년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장인을 술에 취하게 만든 다음 급하게 식을 올렸다. 둘은 2남 4녀를 두었다. 하디자의 나이를 감안할 때 전부 무함마드의 자식은 아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 어릴 때 죽고 딸 파티마만 아버지 곁에서 끝까지 함께 했다. 그녀의 남편 알리는 4대 칼리프이자 시아파의 원조가 된다.

결혼 이후 무함마드는 단숨에 부유한 대상으로 변했다. 혼인은 급속히 그의 신분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허전함을 느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종종 동굴 속에 들어가 명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의 환상을 보게 된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되던 해였다.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무함마드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그에게 “읽어라”라고 명했다.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천사가 준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계시를 받게 된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의 지위는 알라 다음으로 절대적이다. 그 외에도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 5명은 이른바 최상위 예언자에 속한다. 천사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2년 동안 예언자로서 수련기간을 거쳤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신한 무함마드는 마침내 메카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메카 주민들은 대부분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여러 신을 모신 카바 신전 순례자들은 그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나타나 유일신 알라를 외치자 좋게 여길 리 없었다.  

메카 주민들에겐 장사의 밑천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함마드는 비 무슬림이 나중에 겪어야 될 지옥에 대해 설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욕설이었다. 무함마드의 삼촌조차 “우리더러 지옥에나 가라고?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우릴 불러 모았냐”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 대부분은 아내 하디자와 조카 등 가족과 집안 노예들이었다. 그들을 제외하면 범죄자이거나 소외 계층이었다. 무함마드는 설교할 때마다 욕을 듣거나 어디선가 날아오는 돌을 피해야만 했다.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간 알라신을 널리 전도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무함마드는 전략을 바꾸었다. 말로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칼로 추종자를 만들면 된다. 그에게는 칼이 없었다. 없으면 빌려 쓰자. 무함마드는 용맹한 샤이반 부족에게 칼을 빌렸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이는 유목 사회의 철칙이다. 칼을 빌려준 샤이반 부족에게 전쟁에 따른 막대한 수익을 보장했다. 더불어 여성 성 노예도 덤으로 안겨주었다. 그들의 칼은 이슬람교 세 확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무함마드의 세력이 커지자 덩달아 견제도 심해졌다. 무함마드는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넘겼다. 결국 그는 메카를 떠나야만 했다. 무함마드와 그가 이끄는 이슬람은 622년 메카에서 북쪽으로 350㎞ 떨어진 메디나로 이주(헤지라)했다. 이슬람은 이를 자신들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카에서 밀려난 무함마드는 점점 더 무력에 의존하게 됐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동맹을 맺은 세력 가운데는 악랄한 범죄자 집단인 ‘알 사아릭’도 있었다. 

‘알 사아릭’은 태생부터 험난했다. 사생아나 아랍인과 흑인 여성 노예 사이에 태어나 버려진 아이를 길러 전사로 활용했다. ‘늑대들’이라는 별칭은 그저 얻은 게 아니었다. ‘알 사아릭’의 잔인함은 일대에서 따를 집단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에 대한 공포심을 적절히 활용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잔인해졌다. 

‘알 사아릭’과 힘을 합친 무함마드는 다시 메카를 넘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받자 메카 주민들 사이에 무함마드 동조 세력이 늘어났다. 메카 지역의 건달이었던 왈리드조차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다양한 세력이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뭉쳤다. 그들 사이에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이 필요해졌다.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로 접어든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가장 먼저 한 것 역시 법의 도입이었다. 

무질서한 집단들이 모였으니 법은 되도록 엄격해야 했다. 음주나 혼외정사를 한 자들은 채찍이나 돌팔매 처분을 받았다. 남의 재산을 훔치면 손을 자르고, 무슬림 부족을 공격하면 팔이나 다리를 잘랐다. 법이 엄격해진 이유는 그만큼 무질서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쟁의 결과물에 대해선 공평한 분배를 원칙으로 했다. 이슬람이라는 조직이 커질 수 있었던 이유다. 신의 계시를 기록한 코란에는 전리품의 배분을 규정하고 있다. “전쟁에서 얻은 물품의 1/5은 알라와 선지자와 고아들과 불우한 자들과 여행 중에 있는 자들의 것이다. -코란 8장 41절”

전쟁은 거룩한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했다. 전쟁 대신 지하드 즉 성전(聖戰)이라는 명칭이 사용됐다. 전쟁을 통해 무함마드는 점점 세력을 키웠다. 마침내 그는 메카를 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메카는 종교와 상업이 발달한 도시다. 하지만 군사력은 그리 세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무난히 메카를 접수했다. 이후 메카의 우마이야 족장과 손을 잡았다. 이 부족은 나중에 이슬람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떠오르게 된다. 

무함마드가 생애 마지막으로 치른 전쟁은 동로마 원정이었다.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제국을 넘볼 만큼 커졌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동로마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얼마 후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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