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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2. 2022

망각의 강 레테 11


무함마드 사후     


신의 대리인이 죽었다. 그의 추종자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신의 사도는 영원히 그들의 곁에 있을 것 같았다. 충직한 우마르는 누군가 무함마드의 죽음을 전하자 “거짓말하지 마라!”며 그를 칼로 찌르려 했다. 그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친구인 아부 바크르가 사위의 죽음을 확인했다. 무함마드는 어린 부인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죽어 있었다. 바크르는 “무슬림들이여! 무함마드가 죽었다. 하지만 알라는 살아있으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고 선포했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예언자의 죽음은 움마 내부에 동요를 일으켰다. 종교 집단 내의 권력 다툼 양상은 세속에 뒤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이상이다. 움마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한 것은 선지자 자신이 후계자를 미리 점찍어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와 첫 부인 하디자 사이에는 2남 4녀의 자식이 있었다. 아들 둘은 어릴 때 죽었다. 여성은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누군가 칼리프가 되어 움마를 이끌어야 했다. 칼리프란 신의 대리인, 혹은 지도자를 의미한다. 

칼리프의 선출이 지체되면 더 많은 이탈자가 생겨날 것이다. 예언자가 죽자 이미 많은 이슬람교도가 사원을 떠났다. 선지자를 잃은 이슬람은 위기에 직면했다. 무함마드가 유언을 남기지 못한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추측이 있어 왔다. 

죽음을 앞둔 그는 유언을 하려 했다. 그는 내심 사촌이자 사위인 첫 번째 남자 무슬림 알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어 유언을 남기려 할 때마다 주변에서 교묘하게 저지했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치료와 요양이 먼저라고 막아섰다. 다분히 고의성 짙은 행동이었다. 

친구이자 장인인 아브 바크르와 우스만은 이슬람 조직 내부에 강력한 지지 세력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부유한 상인으로 무슬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슬람 군대를 이끌던 우마르도 그들 편이었다.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수였다. 알리를 지명하려던 무함마드의 속내를 아는 아부 바크르 무리들은 그의 입을 막아야만 했다. 바크르와 우스만, 그리고 알리 지지 세력 사이의 대립은 나중에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서게 만들었다.  그 갈등은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현재도 소수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는 무슬림간의 합의에 의해 통치자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니파는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시아파는 무슬림을 이끄는 사람은 반드시 선지자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고 믿고 있다.  

움마 내부의 다수가 바크르를 추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직계 가족을 제외하면 첫 번째 무슬림이었다. 하지만 알리와 그의 아내 파티마는 그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알리와 우마르간의 결투로 신의 뜻을 가름하기로 했다. 이기는 쪽에 신의 뜻이 함께 한다는 결론이었다. 알리의 칼이 부러지는 바람에 우마르의 승리로 끝났다. 바크르가 무함마드의 대리인 즉 칼리프로 선출됐다.  


바크르는 2년간 집권했다. 바크르의 치세는 늘 전쟁으로 분주했다.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그들에게 등을 돌린 세력들과의 전쟁이었다. 무함마드는 평소 “종교를 강요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부 이탈자가 속출하자 바크르는 어쩔 수 없이 같은 무슬림을 상대로 칼을 들어야 했다. 

한 번 무슬림은 영원한 무슬림이다. 이 원칙에 따라 배교자는 배반자로 간주됐다. 바크르의 치세는 길지 않았다. 그는 마함마드와 달리 자신의 후계자를 지정해 두었다. 장군이었던 우마르였다.

말이 장군이지 우마르는 거친 사내였다. 툭하면 싸움질을 해댔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엔 술도 잘 마셨다. 움마의 지도자들은 바크르의 후계자 지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건달 같은 우마르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 외로 알리가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가장 강력하게 반대할 것으로 짐작했던 알리가 우마르의 편에 서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남자 무슬림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는 움마 내에 확실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바크르의 뒤를 이은 우마르는 10년간 집권했다. 당초 움마의 지도자들은 우마르의 치세에 대한 염려가 상당했다. 전투에 능한 군인이었지만 치세에는 무능할 것이라는 예단이었다. 정작 우마르는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자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 편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내적인 갈등이 줄어들었다.

군인 출신답게 전쟁에도 능했다. 우마르는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시리아, 서쪽의 팔레스타인과 동쪽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사방에서 정복 전쟁을 벌였다. 이슬람 세력이 제국으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로 불릴만했다. 

우마르는 두 번의 중요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636년 야르무크에서 동로마제국과 만나 그들을 물리쳤다. 비록 동로마제국이 페르시아의 후예인 사산제국과 오래도록 패권 경쟁으로 쇠락해 있었지만 로마를 이긴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중동의 패권 교체를 알리는 결정적 승리였다. 

우마르가 이끄는 이슬람은 5년 뒤 네하벤드 전투에서 사산제국을 무찌르는 또 한 번의 이변을 연출했다. 이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그들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와 함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는 오늘날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이다. 

이슬람 제국 군대와 사산 제국 군대가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둘 사이의 위상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사산 제국의 장군은 상대의 남루한 복장을 보고 “옷 두 벌과 대추야자 한 자루씩을 나눠 줄 테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곧 돌아가야 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밝혀졌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도 우마르였다. 그는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던진 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너희와 함께 살 것이다. 너희는 원하는 신을 숭배해도 좋다. 우리의 방식이 마음에 들면 우리를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방식대로 살아도 좋다.” 

이슬람의 신과 삶의 방식이 더 우수하다는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장군출신 2대 칼리프 우마르는 어이없게도 노예가 찌른 칼에 살해당했다. 3대 칼리프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먼 친척으로 부유한 상인 출신이다. 

우스만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자 그의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우스만은 끝내 부인과 이혼하고 무함마드의 딸과 결혼했다. 이슬람은 우스만 시대에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3대 칼리프 우스만은 강력해진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성장과 함께 부작용도 커졌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됐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제정신은 시나브로 형식적으로 바뀌어갔다. 내부 갈등이 격해져 우스만 역시 폭도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다.      

수니파 시아파     


4대 칼리프로 알리가 선출됐다. 예언자를 가장 많이 닮은 정통성을 지닌 지도자였다. 알리는 생전 무함마드를 여러 차례 암살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무함마드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자주 있었다.  

한 번은 예언자의 삼촌까지 포함된 암살단이 그를 죽이려 했다. 무함마드는 황급히 피신했고, 그 자리에는 알리가 대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살단은 알리를 죽이지 않았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면서 사실상 형제나 다름없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가 그를 입양해 키웠기 때문이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부인 하디자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슬람에 입교했다. 남자로는 첫 번째 무슬림이었다. 

첫 남자 무슬림 알리는 움마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슬람 제국은 정복 전쟁을 통해 성장했다. 수많은 전리품은 제국을 살찌웠지만 빈부의 차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권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재능을 늘 감춰두고 있다. 기회만 있으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제국의 확장에 따른 혜택이 하층민까지 고르게 주어지긴 어려웠다. 새로운 부유층이 등장한 이면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그림자처럼 배회했다. 4대 칼리프 알리는 무함마드의 초기 움마 정신을 회복하고 싶었다. 아직 나눔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알리는 분배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고루 잘 살자는 그의 외침은 이미 잘 살고 있는 부유층들을 자극했다. 함께 나누면 그들의 몫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들은 새 지도자 알리를 점차 불편한 존재로 여겼다. 기득권을 누려온 집단들은 새 칼리프의 말에 순순히 따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과 뜻이 잘 통하는 무아위야를 중심으로 뭉쳤다. 새 세력들에겐 나름대로 명분이 필요했다. 공정한 분배 때문에 속상하다고 주장할 순 없었다. 그들은 3대 칼리프 우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무함마드의 젊은 부인 아이샤가 부유층 편에 섰다. 그들은 새 지도자 알리가 우스만을 암살한 자들과 한편이라고 선동했다. 이슬람의 움마는 무함마드의 부인과 사위 두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불행한 일이었다.      

두 세력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각각 군사를 모았다. 다행히 큰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극적으로 화해했다. 그러자 이 일로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알리 측 일부 세력이 몰래 아이샤의 캠프를 공격했다. 

알리가 배신했다고 오해한 아이샤는 즉시 반격했다. 알리가 승리했지만 양측 사이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투가 끝난 후 비로소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음을 알았다.  

무아위야는 끝까지 알리에 대한 반발을 이어갔다. 결국 양 측은 시핀에서 또 한 번 군사적 충돌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패색이 짙던 무아위야는 야비한 방법을 동원했다. 병사들에게 저마다 무기 끝에 코란을 붙인 채 싸우라고 명했다. 알리의 군사들은 코란을 손상시킬까봐 마음 놓고 상대를 공격할 수 없었다. 

결국 양측은 이슬람 제국을 나누어갖기로 합의했다. 무아위야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치하고 제국의 나머지는 알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알리는 얼마 후 급진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슬람 제국은 통째로 무아위야의 수중에 떨어졌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를 무함마드의 적법한 계승자로 받들었다. 죽은 알리 대신 그의 아들 후세인을 옹립했다. 무아위아는 후세인마저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메카의 카바 사원에서 그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후세인은 72명의 군사만을 대동한 채 사원으로 향했다. 후세인 일행은 노상에서 기습을 당해 전원 사망했다. 무아위야는 정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알리와 후세인의 죽음 이후에도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알리를 이맘이라고 불렀다. 공동 기도를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알리를 무함마드의 유일한 적법 계승자로 내세운다. 실제 무함마드는 설교 도중 “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알리를 당신들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 적 있었다.  

알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시아파로 불린다. 아랍어로 ‘일당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수인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언행인 수나를 따르는 무리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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