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일만 Sep 22. 2022

망각의 강 레테 12

십자군 전쟁      

    

이슬람교가 출현하기 전까지 아랍은 작은 부족들끼리 각각의 모자이크로 흩어져 살았다. 그들에겐 통일된 언어조차 없었다.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원래 아랍이라는 의미는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을 뜻했다. 히브리어로 아랍은 사막을 의미한다. 그들은 사막에서 떠돌며 생활한 탓에 특정 지역이나 특정 종교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통일된 아랍은 제국으로 성장했다. 

서쪽 스페인에서 동쪽 인도를 넘어 신장,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확장됐다. 이슬람은 아바스 왕조(750~1258)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8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2백 여 년은 이슬람의 황금기였다.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인구 10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다. 목욕탕만 만 개에 이르렀다. 이 화려한 도시에서 ‘아라비안나이트’가 탄생했다. 

1071년 이슬람과 동로마 사이에 오늘 날 튀르키예(터키)의 만지케르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는 이슬람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었다.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단단한 요새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승자는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였다. 

충격을 받은 비잔티움의 대주교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자존심 문제가 끼어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 따위를 논할 단계가 아니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대주교는 편지에서 “동로마가 무너지면 서방의 기독교 왕국들이 위험해진다”고 호소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곧 동방원정을 결심했다. 그에게는 명분과 실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명분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장악된 성지 예루살렘 회복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더 복잡했다. 교황은 동로마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바랐다. 많은 귀족들이 교황에 의견에 동조했다. 

그들 대부분은 영지를 갖지 못한 귀족들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오직 장남에게만 영지가 상속됐다. 따라서 무늬만 귀족인 백수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동방원정은 새로운 영지 확보의 기회였다. 

‘신이 그것을 바란다.’

교황의 말이 그들의 욕망에 불을 질렀다. 영지에 대한 욕구에 종교적 명분까지 더해져 너도 나도 예루살렘의 향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십자가 모양의 붉은 천을 앞가슴에 달았다. 동방 원정대가 십자군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가장 먼저 셀주크 군과 전투를 벌인 십자군은 유럽의 정규군이 아니었다. 농민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 셀주크 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 승리로 인해 셀주크 군은 유럽의 군대를 얕잡아 보게 됐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두 번째 만난 십자군은 처음의 무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전투 경험을 가진 정규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전투에 능했지만 잔인하기도 했다. 십자군은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던 도시 니케아를 정복했다. 십자군은 사도 바울이 처음 교회를 세운 안티오크에서 대규모 살상을 저질렀다. 

마라에선 “항복하면 모두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후 성문을 열어주자 주민 모두를 살해했다. 심지어 그들은 인육을 먹기도 했다. 이 때 만해도 이슬람 세력은 단합되지 못했다. 이집트는 멋모르고 십자군을 환영하기도 했다. 이집트와 칼리프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슬람 진영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들이 뭉치지 못한 만큼 십자군 측에선 전쟁이 수월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정복에도 마라와 같은 전술을 사용했다. 누구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입성한 후 주민의 거의 전부를 살상했다. 유대인들을 회당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대학살은 흩어진 이슬람을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슬람의 한 장군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에데사라는 주요 도시를 탈환했다. 그의 뒤를 이어 살라딘이라 이슬람 최고의 영웅이 등장하면서 전쟁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살라딘은 하나하나 실지를 회복해 나갔다. 마침내 1187년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을 몰아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십자군들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지를 빼앗긴 유럽은 가만있지 않았다. 성지를 되찾기 위해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 1세를 비롯해 세 명의 왕을 파견했다. 

3차 십자군은 이전과는 규모와 사기가 달랐다. 리차드 1세는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며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했다. 예루살렘 목전에 이르렀을 때 조금씩 변화가 생겨났다. 리차드 1세와 살라딘은 몇 차례 전투를 통해 서로를 인정하게 됐다. 살라딘은 병중의 리차드 1세에게 약을 보내주기도 했다. 

잉글랜드에서 동생 존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리차드 1세는 살라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 보장, 기독교 성소 보호 등을 약속하는 대신 이슬람이 그곳을 다스린다는데 서로 합의했다. 

십자군 원정은 200년 동안 총 8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교황권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결국 교황이 아비뇽으로 이주하는 수모까지 겪게 된다. 귀족들의 장원을 중심으로 한 농업경제는 몰락했다. 대신 베네치아를 위시한 도시의 상업경제가 새롭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결국 유럽은 르네상스라는 새 물결에 휩싸기에 된다. 이슬람 문명의 유입과 함께 그들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아시아라는 거대한 기회의 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십자군 전쟁은 결코 고상한 성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언론은 특히 이슬람과의 충돌에 십자군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남용한다. 십자군 원정은 숱한 상처와 희생을 남긴 채 실패로 끝났지만 유럽인들을 가장 큰 수혜자로 만들었다.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     


중세와 근세는 1492년을 기점으로 나누어진다. 그 해 세계사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 두 개의 큰 사건이 벌어졌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이 자국 땅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콘키스타다. 

우마이야 왕족은 8세기 아바스 왕조에 의해 밀어냈다. 대부분 죽음을 당했으나 아브드 알 라흐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는 스페인 안달루시아로 도망가 그곳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라흐만은 스페인 남부의 기독교인들과 싸워 756년 이슬람 왕조를 수립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장장 700백 년 넘게 이 지역을 지배했다. 1492년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비로소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유럽을 비롯한 서방 언론은 이슬람에 대해 비우호적이다. 서방 언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해온 우리 역시 이슬람에 대해 조금은 왜곡된 시선을 갖고 있다. 그들은 왠지 후진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다. 

할랄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음식은 맛없고, 먹기에 불편할 것 같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모두 테러리스트일 것만 같다. 중동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의 책임은 이슬람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견해들은 일정 부분 맞지만 대부분 틀렸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 음식은 중국, 프랑스와 함께 세계 3대 음식으로 불린다. 돼지고기가 재료에 들어가지 않지만 맛은 기막히다. 돼지고기는 무슬림들에겐 절대 금지다. 심지어 돼지고기를 요리한 조리기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코란은 돼지고기를 ‘알라가 아닌 사악한 신들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슬림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않았다 –사도행전 10:14”며 돼지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들이 돼지고기를 멀리하는 이유는 무더운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돼지고기는 더운 기후에서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인 아랍인들에게 집에서 키우는 돼지는 사육에도 불편했을 것이다. 그들의 돼지고기 불용은 많은 부분 환경 탓이다. 

유대교인이나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지만 소고기는 먹는다. 힌두교도는 그 반대다.  농경민족인 인도인들은 소를 다양하게 활용한다. 소는 우유와 버터 같은 유제품을 주는 한편 밭을 경작할 때도 요긴하다. 심지어 그들의 똥을 연료로 쓴다. 따라서 소를 죽여서 단지 고기를 얻는 것보다 그들을 살려서 보다 다양한 이득을 보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인도인들은 소를 죽이지 않았다. 

아랍은 유럽의 근대과학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중세는 기독교와 플라톤의 결합이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득히 잊힌 인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슬람을 통해 유럽으로 역수입됐다. 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들의 정신적 원조 가운데 한 명이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파라비, 이븐 시나, 루슈드 등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이어 왔다. 특히 이븐 시나는 제 2의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렸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들의 책들이 유럽으로 번역됐다. 

유럽인들은 이슬람 학문을 통해 지리학과 의학에 눈을 떴다.  이슬람의 지리학은 유럽의 신대륙 발견에 밑바탕이 됐다. 하지만 훗날 유럽의 제국주의에 의해 이슬람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게 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7세기 아론은 천연두에 관해 최초로 밝힌 ‘의학 총서’를 내놓았다. 10세기 압바스는 암의 절제술과 식이요법 등을 주장했고, 이븐 시나는 알코올의 소독 효과를 입증했다. 유럽인들은 인도에서 발명된 0의 개념을 이슬람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전 세계 무슬림의 수는 대략 20억 명이다. 2022년 기준 전 세계 인구 수 80억 명의 25%에 해당된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는 50여 개국이나 된다. 그들의 90%는 수니파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들의 종주국이다. 이란을 종주국으로 하는 시아파는 10%에 그친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순나를 철저히 지킨다. 반면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단지 말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본다. 신이 이맘이라는 연결자를 통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예시한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에게 천국은 최종적인 삶의 종착지다. 천국이라는 보상에 집착해 기꺼이 잔혹한 테러의 선봉에 선다.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순결한 처녀 72명의 시중을 받으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현재의 삶이 고단할수록 천국의 달콤한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이슬람이전에도 아랍 남자들은 여러 명의 여자와 혼인할 수 있었다. 그 수는 전적으로 그의 경제적 능력에 달려 있었다. 수적 제한은 없었다. 남편이 전쟁, 질병, 여러 지역을 떠돌다 죽는 경우 과부가 되는 여인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다.

무함마드는 코란에 부인의 수를 네 명으로 제한했다. 대신 이들 부인들을 반드시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코란 4장 3절에는 “여성과의 결혼은 네 번이라도 좋다. 그러나 부인에게 공평하지 못할까 두려우면 한 여자 혹은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과만 결혼하라 코란 4:3”고 제시했다.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은 여자 노예를 의미한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일신이란 유대인들의 고유한 개념이었다. 두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은 코란에 69번 나온다. 방주를 만들어 인류를 구한 노아는 40번, 출애굽을 이끈 모세는 그보다 많은 136번 언급되어 있다. 

두 종교는 공히 예루살렘을 성지로 삼았다. 무함마드는 아내 하디자가 죽은 후 예루살렘을 여행했다. 그곳의 어느 언덕에서 신이 내려준 사다리를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 이를 기념해 이슬람교도들은 초창기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렸으나 나중에 메카로 바뀌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국가, 이데올로기 등과 함께 “인류가 개발해낸 상상 속의 질서”라고 정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에 따르면 적어도 2060년까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작가의 이전글 망각의 강 레테 1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