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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3. 2022

망각의 강 레테 13


죽음     


종교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위해 만들어졌다. 인간의 특이한 발명품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낭떠러지가 없다면 종교는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대체 죽음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이처럼 작게 만드는 걸까. 

죽음은 막다른 터널 같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다. 어떤 이는 출구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들은 출구를 통해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갈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곳에 가 본 사람들은 있지만 무사히 돌아온 사람은 없다. 그러니 설만 무성할 뿐 누구도 그 터널의 내부를 모른다. 

죽음은 기나긴 잠이지 않을까. 이른 아침 수술대로 향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나는 이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 할지 모른다. 유명 종합병원 수술대기실에는 이미 많은 환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 모두 이 긴 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라겠지.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좌우로 늘어선 그들의 눈빛이었다. 새벽 무거워진 공기를 뚫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들의 간절함이 전해졌다. 

암 병동이어서 나를 포함 대개는 암 환자들이었다. 더러는 이 긴 잠에서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러는 운 좋게 깨어나 이 순간을 꿈처럼 떠올리겠지. 어차피 삶은 꿈이고, 죽음은 현실이다. 

마지막 순간 돌아보면 떠나온 언덕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지 않을까. 지나고 나면 다 짧게 느껴진다. 지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 없다. 내 삶은 언제나 지속되는 줄 알았다.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무치게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죽어보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어차피 죽으면 알게 될 것을 서둘러 알 필요도 없다.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죽음의 세계다. 그런 미몽에서 헤매는 사이 죽음은 차츰 나와 무관한 일이 됐다.  

막상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가정에 놓이자 아무런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긴 잠에서 깨어나길 기도하는 수밖에는. 당신께서 거두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절박한 하소연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첫 번째 눈으로 들어온 것은 빛이었다. 태어났을 때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이 무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나와 회복실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기억은 선명하다. 천정에 매달린 조명이었다.

수술실에 누워 마지막으로 본 것 역시 빛이었다. 천정에 있는 둥근 모양의 불빛이었다. 회복실과 다른 점은 등이 여러 개였다. 그 빛을 보며 하나, 둘, 셋 헤아렸다. 그 이상 더 셌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빛을 본 순간 나는 소원대로 잠에서 깨어났다. 배에 맹렬한 통증이 있었고, 내 몸 여기저기에 플라스틱 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폐로 호흡하였고,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 순간 잊어버렸다. 얼마나 간절히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랐는지. 맹세는 일상이 되었고, 꿈은 현실이 됐다. 죽음은 다시 잊혔다. 내 삶과 분리된 채 둥둥 떠다녔다. 

암 병동에서 만난 환자들에게서 가장 자주 들은 질문은 “왜 하필 내가?(Why Me?)”였다. 그들은 말했다.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는데, 나보다 나쁜 놈들이 세상천지인데, 왜 하필 내가 암에 걸려야 하나? 그러면서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푸념했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하늘이 공평한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가 70편의 열전 가운데 ‘백이와 숙제’편을 맨 앞에 둔 것도 그 때문이다. 

백이와 숙제는 사마천이 아니었더라면 누구도 기억 못할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 둘로 첫 편을 삼은 이유는 공평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의로운 사람들이다. 주나라가 천자의 나라 은을 멸하자 반역을 한탄하며 산으로 숨어들었다. 결국 온갖 고생을 하다 굶어서 죽었다. 

의로움이 이처럼 구박받는데도 무슨 천도(天道) 따위가 있냐고 사마천은 항변한다.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연은 고생 고생하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자식이 죽어도 울지 않던 공자는 안연의 죽음 앞에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통곡했다. 

그런가하면 떼강도 노릇을 하며 인육을 먹는 도척(盜跖)이라는 자는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하늘이 정의롭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게 ‘백이와 숙제’편에서 던진 사마천의 질문이다.  

역사가 사마천이 공평과 정의에 천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마천은 이릉이라는 장군을 변호하다 한(漢)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로 인해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았다. 남성의 생식기를 도려내는 벌이다. 사마천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 끊어지는 듯 했다”며 궁형을 당한 심정을 토로했다. 

억울한 이를 변호하다 스스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하나. 그는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한 역사책의 완성을 위해 차마 죽지 못했다. 그가 죽지 않음으로써 인류는 사기(史記)라는 위대한 지적 유산을 보유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고 했다.   


   

시편 23편     


죽어야 겨우 그 죽음만큼의 다리가 생긴다

다짐은 스스로에게 놓은 징검다리 같은 것 

다짐이 희미해질 즈음 가슴속에 품은 돌덩이

하나씩 내려놓고 딛고 가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중략)     

거짓말처럼 생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김완의 시     


사람들은 저마다 영화로운 삶을 꿈꾼다. 참담한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로마황제나 페르시아 왕자의 삶은 영화로움의 끝이다. 2차 대전 당시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의 삶은 어떨까. 삶의 의미를 따져볼 작은 공간이나마 있을까.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대제(The Great)로 불린다. 그는 이 호칭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더 그레이트’가 된 이유는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였기 때문이다. 

박해를 피해 지하의 음침한 동굴에서 숨어 지내던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 비로소 지상으로 나왔다. 정작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죽기 얼마 전에야 세례를 받았다. 아마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권유 때문이지 않을까. 그냥 죽기엔 저 너머 웅크리고 있는 아득한 어둠이 불안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개선식을 올린 황제였다. 개선식은 큰 공을 세운 지휘관이나 황제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시내로 입성하는 행사였다.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듯 로마의 개선식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콘스탄티우스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로마로 들어갔다. 역대 어느 개선식보다 요란한 퍼레이드였다. 당시 황제들은 로마에 살지 않았다. 밀라노나 비잔티움에 주로 거주했다. 황제 콘스탄티우스도 태어나 처음으로 로마를 구경했다. 

제국의 오랜 수도 로마의 번성은 밀라노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곳곳에 우뚝 선 신전과 극장, 검투경기장의 웅장한 자태는 보는 이를 압도했다. 섬세한 대리석 조각들은 로마인의 고상한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마에는 황제의 칼로 누를 수 없는 도도함이 흘렀다. 콘스탄티우스는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페르시아 왕자에게 나직이 로마를 보고 있는 소감을 물었다.

“이만한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도 ‘역시 마지막에는 죽겠지’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더군요.”

페르시아 왕자의 대답이었다. 죽음은 신의 창작물 가운데 가장 공평하다. 신은 곳곳에 불평등을 심어두었지만 오로지 죽음의 망토만큼은 누구도 피할 수 없게 골고루 씌워두었다. 

죽음은 페르시아 왕자에게나 가장 비참한 삶의 주인공에게나 균등하다. 다만 그것을 맞이하는 방식이나 태도에선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이 즐겨 부른 노래다. 다윗이 지은 시편 23편이다. 그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수용소에 끌려와 의미를 모르는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몸이 노동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지면 독일군은 그들을 가스실로 보냈다. 유대인들은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 사형수들이 형장으로 걸어가는 것)의 마지막 걸음을 옮기면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다시는 산자의 몸으로 이 길을 되돌아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까.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니고, 오로지 유대인으로 태어난 죄였다. 

나치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스스로 처한 고난에 대해 신에게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고난을 잘 견뎌 온 욥조차 나중엔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 있구나 –욥기 3:26”며 불만을 터트렸다. 

데드 맨 워킹을 옮기는 그 순간 차라리 욕이라도 실컷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들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천연스럽게 노래했다. 로마를 둘러 본 페르시아 왕자는 그의 마지막 순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편히 갔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버리고 떠나기란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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