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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7. 2022

박정희와 한강 9


자의반 타의반     


치밀한 성품의 김종필은 거사 후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에 따라 거사 3일 만에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구성됐다. 입법, 사법과 행정을 망라한 초법적 권력기구였다. 

그런데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쿠데타 공신들끼리 자리다툼이 일어났다. 30명의 최고위원 자리를 놓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마치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한 후의 초기 한나라 조정 같았다. 공신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난리가 아니었다. 

8기생 김형욱은 “왜 우리 자리가 이것뿐이냐”고 거칠게 항의하다 7기생 장경순에게 뺨을 맞았다. 최고위원들은 민정이양 계획을 놓고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과 박정희의 측근들은 최소 5년가량의 장기 군정을 바랐다. 

장도영을 정점으로 한 비주류들은 되도록 빨리 민간에 권력을 되돌려 주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이렇게 되자 장도영은 쿠데타 주류 세력의 걸림돌로 떠올랐다. 장도영은 한나라 유방에게 한신 같은 존재였다. 

권력을 잡기까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으나 그와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나라 건국이후 진행된 ‘토사구팽(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의 희생양이 된 한신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장도영은 7월 3일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방첩부대 노태우 대위(훗날 대한민국 13대 대통령)가 이끈 체포조에 의해서다. 이에 앞서 계엄사령관이었던 장도영은 5월 27일 비상계엄 상태를 경비계엄으로 한 단계 완화시켰다. 이 조치는 김종필을 비롯한 주류 세력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장도영의 의장자리는 박정희가 차지했다. 장도영은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무기징역을 감형됐다. 이런 와중에 5기생 박치옥 공수단장과 문재준 헌병감 등은 김종필을 제거하려다 실패했다. 이 시도는 강한 반작용을 불러왔다. 이후 이들 군내 이북출신 인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됐다. 

5.16 이후 김종필의 발걸음은 점점 속도를 더해갔다.  6월 초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극비리에 정당 결성에 나섰다. 박정희와 그의 직계를 제외한 나머지 최고위원들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김종필은 창당 자금 마련을 위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파친코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을 일으켰다. 이러한 김종필의 은밀한 행위는 속속 박정희에게 보고 됐다. 

박정희는 “전혀 뜻밖이다.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박정희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모든 일은 그의 지시 내지 묵인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 김종필은 1962년 연말 최고위원들 앞에서 그가 주도해온 공화당 조직에 관해서 처음 입을 열었다. 그의 반대편에 선 최고위원들이 일제히 발끈했다. 재떨이와 음식 담은 접시가 날아다니는 등 난장판이 됐다. 

박정희는 다음 해 민정이양을 단행하겠다며 그들을 달래야 했다. 불만세력을 간신히 무마시켜 공화당에 입당시켰다. 하지만 군사정변 주도세력의 내부는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1963년 1월 초 장도영 대신 내각수반 자리에 오른 송요찬이 “군사정부가 혁명 공약을 위반했다”며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했다. 이어 해병대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넜던 김동하가 공화당 발기인에서 물러났다. 

군 수뇌부까지 민정 참여 포기를 압박하자 박정희는 정국 수습 방안을 내놓아야 했다. 2월 27일 박정희는 민정 불참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군심 수습용 위장에 불과했다. 

3월 10일 중앙정보부는 김재춘과 김동하가 연루된 쿠데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이어 서울 시내에서 군인들이 군정 연장 시위를 벌였다. 일련의 잘 짜인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박정희 의장을 둘러싼 당시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박정희의 마음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새 해 들어 몇 번이나 민정불참과 참여 결심을 되풀이 했다. 

김종필은 답답했다. 그러나 그는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4대 의혹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김종필의 정책들에 사회주의 성향이 엿보인다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다음은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의 내용이다.     

“호남 지역 시찰을 마친 박 의장이 대전에 도착해 나를 호출했다. 나는 밤 11시쯤 유성에 있는 만년장 호텔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내게 처음 밝혔다.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간곡하게 설득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혁명을 왜 했습니까. 다 같이 죽을 각오로, 조국을 본때 있는 나라로 재건하기 위해 혁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만두신다니, 안 됩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설득에 거의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며칠 뒤 박 의장은 마음을 바꿔 또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내가 달려가서 박 의장 마음을 돌려놓은 게 세 번인가 된다.”     


박정희의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그럴수록 김종필은 답답했다. 가뜩이나 그는 사방에서 압력을 받고 있었다. 5기생과 6기생을 중심으로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던 김종필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박정희의 민정 불참 성명을 지켜 본 김종필은 스스로 총대를 메야할 필요를 느꼈다. 

김종필은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직을 내려놓았다. 다음 조치로 혼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외유를 떠나기로 했다. 김종필은 공항기자실에서 왜 지금 떠나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이라고 눙쳐서 답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만섭은 이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재치 있게 옮겼다. 이후 이 말은 JP(김종필)의 분신처럼 따라다녔다. 

박정희는 군인 데모가 벌어진 다음 날 군정연장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정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막을 내리게 됐다. 더불어 김동하, 박창암, 방원철, 김영주 등이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체포됐다. 함경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의 구속을 두고 언론은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김종필이 해외로 떠난 다음 날 민주공화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1339명의 대의원 가운데는 군 출신 인사들과 학자, 관료, 기업인들과 자유당과 민주당 출신 구 정치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공화당 창당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김종필은 해외로 떠난 이후였다. 그가 만든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의 눈과 귀 역할을 하며 집권 18년 동안 동백림사건, 인혁당사건 등을 조작하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중정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회고록’을 통해 박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김재규는 박정희를 향해 총을 쏘았다. 박정희에게 중앙정보부는 양날의 칼이었다. 권력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지만 결국 비수가 되어 그의 몸을 해쳤다.      

5.16 군사정변은 미국과 북한에 상반된 시그널을 주었다. 미국은 박정희, 김종필의 전력이나 그들이 시도하려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사회주의 냄새를 맡았다. 남한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미국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북한은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한때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북한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박정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마침 북한에는 박정희와 그들을 연결해줄 메신저가 한 명 있었다. 

북한에서 고위관직을 역임한 황태성이었다. 경북 상주 출신인 그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다. ‘대구 10.1사건’으로 형이 죽자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했다. 이때 보증을 서준 이가 다름 아닌 황태성이었다. 그는 박상희에게 중매를 서주기도 했다. 그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이 나중에 김종필의 부인이 됐다. 

황태성은 ‘대구 10.1사건’이후 월북했다. 한 때 무역성 부상까지 지냈으나 1950년대 숙청당해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는 북한 정권에게 “박정희가 나를 잘 따랐으니 말이 통할 것이다”고 말했다. 

남한으로 내려 온 황태성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줄을 댔다. 그러나 두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황태성은 간신히 서울에 사는 조카사위를 통해 김종필의 장모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김종필의 장모는 오래 전 월북한 황태성이 갑자기 나타나자 몹시 놀랐다. 혹시나 시동생(박정희)이나 사위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녀는 사위 김종필에게 황태성이 편지를 보내온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녀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됐다. 황태성은 자신을 북한이 보낸 밀사라고 주장했다. 박정희나 김종필을 만나게 해 주면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주게 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에게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 

가뜩이나 레드컴플렉스를 가진 박정희로선 그를 만나기 위해 북에서 사람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었다. 더구나 황태성은 자신이 남로당에 입당할 때 신원보증을 서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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