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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7. 2022

박정희와 한강 10

간첩 황태성    

 

남한에서 북으로 보낸 최초의 공식 밀사는 이후락이었다. 황태성이 남한으로 온 지 11년 만이었다. 이후락은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을 만났다. 그의 손은 아무도 모르게 청산가리를 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자결하기 위해서였다. 

남쪽에서 황태성을 죽였으니 북도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 고문이 가해지고 남한의 이런 저런 정보를 발설할 바엔 차라리 죽고 말겠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은 많은 비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북은 이후락을 죽이지 않았고, 얼마 후엔 박성철 부수상을 남쪽으로 내려 보냈다. 곧이어 남과 북은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후 박철언, 박지원, 김만복 등 여러 명의 대북 밀사가 평양을 드나들었다. 

박철언은 스무 차례 넘게 휴전선을 넘었다. 그가 처음 북한을 방문한 1985년은 남과 북이 아웅산 폭탄 테러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박철언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에 대해 “호방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소개했다. 

황태성은 자신을 북에서 보낸 밀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 당국은 그를 간첩으로 간주했다. 황태성을 그냥 두면 공산주의 전력이 있는 박정희가 불리한 상황으로 몰릴 수 있었다. 

미국은 황태성을 직접 만나 심문하길 원했다. 박정희의 공산주의 전력에 대해 당사자로부터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황태성을 넘겨받은 미국은 시간을 끌었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던 김종필은 애를 태웠다. 

김종필은 회고록 ‘소이부답’에서 나중에 미 당국에 “황태성에 대해 알아낸 게 있냐”고 물었으나 “없다(nothing)”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밝혔다.

황태성은 1961년 12월 27일 군법회의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대법원 파기 환송 절차까지 거친 끝에 1963년 10월에야 사형 판결이 확정됐다. 그리고 12월 14일 황태성은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직전 “남북통일 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사진을 보고 “(황) 선생도 많이 늙으셨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고 주장했다. 황태성 사건은 1963년 치러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에 의해 박정희의 사상 문제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당시 윤보선은 공화당 창당 자금을 황태성이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대선 때마다 불거진 색깔 논쟁의 원조인 셈이다. 윤보선은 15만 표차로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박정희는 영남과 호남의 농촌 지역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영남은 박정희의 고향이니 그렇다 치고. 호남은 어떻게 된 걸까. 호남 출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석이 흥미롭다. 

“한국전쟁 당시 호남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연좌제에 따른 고통이 극심했다. 색깔론을 일으켜 빨갱이로 몰아붙인 윤보선보다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고생한 박정희에게 동정표가 몰렸다.”

박정희에겐 그를 공산주의자로 보고 있는 미국의 시선도 부담이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부터 이 문제는 내내 그를 괴롭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는 1961년 11월 방미 길에 올랐다. 미국의 용인, 나아가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상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마침 두 사람은 같은 1917년생으로 동갑이었다. 두 사람은 1차 대전이 벌어지던 해 태어났다.     

한국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일까. 미국은 2차 대전과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국으로 하여금 나라를 되찾게 해주었다. 한국전쟁 때는 3만 7천 명의 전사자를 내며 공산화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재조지은(再造之恩: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을 되새길 필요는 없다. 미국은 한국을 위해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을 위해 싸웠다.

공산주의와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을 위해서라면 애초 애치슨라인을 그어 배제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소원하게 지낼 이유는 더욱 없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질서를 선도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다. 또한 한국의 동맹국이다.

국익에 따라 미국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재조지은의 낮은 자세로 임할 필요까진 없다. 하지만 1960년 대 초 한국, 특히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에겐 반드시 미국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했다. 

그들은 5.16 직후 장도영 의장을 미국으로 보내 전후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 김종필을 비롯한 참모들은 박정희에게 직접 방미할 것을 권유했다. 박정희는 주미대사로 나가 있던 정일권을 통해 백악관에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 백악관의 주인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백악관에 민정이양이라는 선물을 전달했다. 미국은 자신들 입장에서 피 흘리며 지켜낸 한반도에 민주주의가 정착하길 바랐다. 강력한 민주주의는 공산화를 막는 보루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후에서 분주히 오간 끝에 박정희는 겨우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존 F 케네디는 박정희와 여러모로 상반되는 인물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막내아들이었던 박정희와 달리 케네디는 아일랜드 출신 부호 집안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올 때만해도 그의 집안은 보잘 것 없었으나 아버지 조지프 대에 와서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조지프는 마피아와 결탁해 음지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금주법의 법망을 교묘히 피해 밀주 사업으로 부를 쌓았다. 그는 주영대사 등을 지내며 교묘한 신분 세탁에도 성공했다. 

그의 꿈은 장남 조 케네디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는 2차 대전에 참전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조지프는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겠다는 열정을 둘 째 아들 존에게 쏟아 부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태평양전쟁 최전방으로 보낼 만큼 철저히 경력 관리를 했다. 전쟁 중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둘째마저 잃을 뻔했다. 그를 태운 어뢰정이 일본 구축함을 들이받은 사고였다. 배는 인도네시아 동쪽 솔로몬 제도의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      

 

백악관의 아리랑     


다행히 저 멀리 무인도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 왔다. 존은 6㎞ 떨어진 그곳까지 헤엄쳐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이 사고 덕분에 일약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가슴에 훈장을 단 그는 종전 이듬 해 29살 젊은 나이로 보스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1952년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듬 해 사진기자였던 재클린과 결혼했다. 한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44살의 나이에 제35대 미국대통령에 당선됐다. 

케네디는 화려했다. 인물도 좋았고 언변은 뛰어났다. 훌륭한 학벌(하버드대 출신)에 퓰리처상을 수상할 만큼 글도 잘 썼다. 이에 반해 박정희는 작은 체구에 도시적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두 사람이 잘 어울렸을까.

박정희가 백악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 의문은 눈 녹듯 사라졌다. 백악관은 박정희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해 두었다. 그가 로비에 들어서자 도열해 있던 미 해병대 군악대가 귀에 익은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리랑이었다.      

예상치 못한 환대였다. 민주주의의 최일선을 지키는 보안관으로 자임했던 미국이 민주정권을 무력으로 뒤엎은 장군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풀었을까. 그만큼 미국 측 사정도 다급했다. 

미국의 냉전 파트너 소련은 1961년 10월 30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차르 봄바(폭탄의 황제)’라는 이름의 이 수소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800배 파괴력을 지닌 괴물이었다. 그나마 폭격기의 안전을 고려해 위력을 반으로 줄였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이 벌여온 냉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국도 은밀히 원저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을 괴롭혔다. 실제 중국은 3년 후 신장에서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을 감행했다. 

이 무렵 미국과 소련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냉전의 극을 치달리고 있었다. 당시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군대를 향해 서베를린에서 철수하라고 압박했다. 이를 수용하지 않자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동서를 가른 장벽은 가족과 연인을 떼어놓았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붕괴될 때까지 분단의 상징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이 무렵 소련은 쿠바에서 또 하나의 대형 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쿠바는 미국에게 목 안에 걸린 가시였다. 미국으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 골치 덩어리 섬나라였다. 반면 소련에게 쿠바는 낙타 코를 뚫은 코뚜레 같았다. 

아무리 거친 야생 낙타라고 해도 한 번 코뚜레만 뚫어 놓으면 꼼짝 못한다. 금세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해진다. 쿠바는 당초 미국의 뒷마당 놀이터였다. 1959년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에 의해 쿠바 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미국의 코뚜레로 변했다. 

소련은 1960년대 초엔 미국에 비해 원자탄 수에서 절대적 열세였다. 더구나 미국은 터키와 이탈리아 등 소련의 턱 밑에 미사일 기지를 두고 있었다. 이를 만회할 길은 상대의 코에 코뚜레를 뚫는 일이었다. 

쿠바와 미 본토의 거리는 불과 140여㎞ 떨어져 있다. 미국 CIA는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했고, 쿠바 용병들을 피그만에 침투시키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소련은 1962년 초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전부터 꾸준히 타당성 검토를 해왔다. 미사일과 핵탄두를 따로따로 실어가 현지에서 조립하기로 했다. 

턱밑에 자신을 겨냥한 미사일을 두게 된 미국은 발끈했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을 취할 순 없었다. 만약 쿠바를 침공하면 3차 대전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대로 두면 코뚜레로 인해 꼼짝달싹 못하게 된다. 소련에 대한 회유도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케네디는 중대 결심을 했다. 

쿠바를 봉쇄하기로 했다. 케네디는 전 미군에 데프콘(DEFCON) 2를 발동했다. 이는 전쟁 직전을 의미했다. 역대 미국 본토에 발령된 가장 높은 경계태세였다. 통산 데프콘 2가 떨어지면 군인들은 완전 군장을 꾸린 채 대기 상태로 돌입한다. 

미사일을 실은 소련의 배들은 쿠바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3차 대전이 불가피해 보였다. 소련의 영공에선 핵무기를 탑재한 미 공군 폭격기가 소련 요격기와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10월 28일 소련이 미 본토에 핵 공격을 가했다는 경보가 울려 퍼졌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케네디에게 보고를 올리려는 순간 소련의 공격이 오보였음이 밝혀졌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후 소련 후루시초프 서기장은 중대결단을 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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