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파병
전쟁은 크든 작든 비극적이다. 더구나 핵전쟁의 결과는 공멸일 뿐이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후루시초프는 쿠바로 향하던 배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쿠바 위기는 일단락됐다.
후루시초프의 결단은 인류를 구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소련 내 그의 정치생명은 사실상 끝났다. 2년 후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1960년 대 초 쿠바 사태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읽는 거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목에 걸린 가시다. 그것을 제거하고 싶으나 만만치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추진하자 더는 좌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줄곧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미국이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20년 간 발이 묶여 있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215조 원의 전비를 쏟아 부었다.
그러고도 황급히 카불을 떠나야 할 만큼 챔피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 미국은 ‘노 부츠 언 그라운드(NO BOOTS ON GROUND)’ 전략으로 선회했다. 동맹국이 아닌 곳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더 이상 참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이를 목의 가시를 제거할 때가 왔다는 시그널로 인식됐다. 미군이 참전하지 않으면 압도적 군사력을 지닌 러시아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강대국도 종종 이런 오판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남긴다.
미국은 1960년대 베트남에서 이미 한 차례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통킹만 사건 때부터이지만 그 전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군화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런 미국의 사정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쿠데타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경제개발을 위한 도움을 얻어내고 싶었다. 두 개의 과녁을 동시에 노리려면 미국에 어떤 반대급부를 줘야 할까.
어느 쪽이 먼저 한국군의 월남 참전 의사를 꺼낸 지는 일 수 없다. 1996년 미국은 박정희와 케네디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 갔는지를 알 수 있는 외교 문서를 공개할 예정이었다. 정작 일부 부분이 삭제된 채 외부로 나와 박정희가 먼저 월남전 파병 의사를 밝혔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미국의 외교 문서는 기본적으로 30년 후 공개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사안에 따라 공개시기를 유보하기도 한다. 가령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관심을 가져 온 1963년 케네디 암살사건의 기밀문서의 경우 법으로 공개 시한을 늦추었다. 공개될 경우 워낙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트럼프 대통령의 명에 의해 마침내 공개됐으나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CIA(중앙정보국)와 FBI(연방수사국)등이 대통령에게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특정 부분을 제외한 채 공개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실제 CIA는 케네디 암살 사건에 관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꾸준히 나돌아 왔다. 나중에 복원된 문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먼저 제안했다.
박정희와 윤보선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요원과 태권도 교관을 월남으로 보냈다. 이듬해 2월에는 2천 여 명의 비전투요원을 파병했다. 이후 1973년 3월 월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총 34만 여 명의 국군이 월남으로 보내졌다.
그들 가운데 5099명(행방불명 포함)이 전사했다. 부상자는 1만 명이 넘었다. 이들의 파병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개발의 밑거름으로 활용됐다. 1968년 한 해 한국은 베트남에서 1억 6500만 달러를 벌었다. 이는 그 해 수출액의 36%에 달했다.
1966년부터 6년 동안 한국군과 베트남 종사자들은 총 9억 달러에 가까운 외화를 국내로 송금했다. 군인들이 보내온 돈만 1억 783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의 1960~70년대 급속한 경제개발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을 다녀온 박정희는 1962년 12월 17일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1963년 10월 15일 예정된 제 5대 대통령 선거에 의해 마침내 군정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됐다.
민주공화당 후보는 당연히 박정희였다. 문제는 야당이었다. 너도 나도 대통령을 하려고 나섰다. 주요 후보만 윤보선, 허정, 송요찬 등 6명이나 됐다. 선거전은 민주공화당 박정희와 민정당 윤보선의 대결로 압축됐다. 야권단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대선 판은 사상논쟁으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이후 색깔 논쟁은 한국 대선 판의 단골 메뉴가 됐다. 주로 보수가 진보를 공격할 때 이용해 왔다. 첫 색깔 논쟁에선 거꾸로 진보가 보수 후보를 괴롭혔다.
야당 후보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과 황태성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야당에도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전력을 가진 이가 많았다. 야당은 “드러내지 못하고 자꾸 감추려 드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며 박정희의 태도를 추궁했다.
그러나 지나친 색깔 논쟁은 역풍을 몰고 왔다. 박정희는 정책 대결로 맞섰다. 윤보선은 상대 후보의 사상 검증에 주력했다.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박정희는 다양한 정책을 내세우며 선거 종반전에 지식층과 학생, 농민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간 반면 윤보선은 정책 대결 대신 사상 공세에 매달렸다”며 5대 대선 결과를 분석했다.
박정희는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었다. 도시에선 패했지만 영·호남의 농촌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이겼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승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호남은 부역자 처벌과 연좌제의 고통을 혹심하게 겪었다. 빨갱이 소동을 일으킨 윤보선보다는 빨갱이로 몰린 박정희에게 동정표가 쏠린 이유다.”
4.3사건으로 최대 8만 명의 주민을 잃은 제주도에선 박정희가 8만 대 2만 6천의 압도적 표차로 이겼다.
한편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1962년 11월 극비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11월 21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 내용이 담긴 메모는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