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과 오히라 메모
일본은 해마다 3월 새 교과서를 발행한다. 2022년 봄 일본의 새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 연행’했다는 종래 표현이 ‘동원’이라는 말로 둔갑해 있었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강제 연행과 동원이라는 표현에는 엄청난 차이가 숨겨져 있다.
일제 강점기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교묘한 말장난으로 감추려 한 것이다. 이는 비단 강제 징용 문제뿐 아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교과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명백한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신의 땅으로 계속 우기고 있다.
일본은 이 문제들을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매듭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1965년 한일협정은 애초부터 한국 내에서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양국이 협상하는 도중에 1964년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했다. 박정희정부는 계엄령 선포를 통해 무력으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들었다. 김종필은 1962년 11월 21일 오히라와의 비밀 회담을 통해 일본 측에 유리한 조건에 합의했다.
이 내용은 40년간 비공개로 남아 있었다. 2005년 1월 17일 외교통상부의 공개로 알려졌다. 일본은 한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지불하고, 2억 달러의 공공 차관과 1억 달러의 상업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일본은 이로써 개인 청구권까지를 포함 포괄적으로 타결을 보았다는 입장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할 자금이 절실했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생략했다.
금액도 당초 7억 달러에서 유상원조 2억 달러 포함 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생색은 일본이 더 냈다. 반면 한국 교섭대표들은 “군정 기간에 매듭지어야지 민정 이양이 되면 더 시끄러워진다”며 협상을 서둘렀다. 시작부터 상대편보다 불리한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1962년 가을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어떡하든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마련해야 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올 곳은 대일 청구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해 10월 24일 김종필은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다 수상을 만났다. 방미를 앞둔 박정희가 먼저 일본을 들르면 어떻겠냐고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 측은 환영했다.
한국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을 고려해 상대편에서 초청한 것으로 위장하자는데 합의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달려갔다고 하면 여론이 나빠질 것을 염려해서다.
한일 양국은 1964년 들어 본격적인 정상회담 논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한일회담 소식이 알려지자 전 국민이 발끈한 것이다. 일본이라면 치를 떨던 시절이었다.
월드컵 축구 예선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철저히 지킨다. 원정팀이 갖는 불리함을 없애고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다. 1954년 3월 벌어진 스위스 월드컵 예선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두 경기 모두 적지인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서다. 이승만은 일본 원정도 탐탁찮게 생각했다. 한국이 패할 경우 국민 여론이나 사기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대표팀은 간신히 대통령을 설득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대신 선수들은 만약 패할 경우 모두 대한해협에 몸을 던져 죽겠다고 서약했다. 일본 원정길은 출발부터 비장했다. 한국은 1차전 5-1 대승, 2차전 2-2 무승부로 1승 1무의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비단 축구뿐 아니다. 한일전 분위기는 어느 종목이든 삼엄하다. 간혹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력인데도 이긴다. 그만큼 스포츠에서 정신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964년 6월 갓 출범한 3공화국 정권은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에 불을 지폈다.
박정희는 집권과 동시에 경제개발에 주력했다. 그러나 다리를 놓고 도로를 건설하려 해도 돈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내려 했다. 김종필이 일본으로 건너 가 사전 조율 작업을 벌였다.
1964년 들어 한일 정상회담 분위기가 고조됐다.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이와 함께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에 이어 시민들까지 합세한 시위 참가자 수는 점점 늘어갔다. 3월 24일 서울의 주요 대학에 일제히 시위가 열렸다.
4월 대학생 하나가 시위 도중 경찰의 구타로 사망하자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달아올랐다. 대학생들은 동맹 휴학과 단식 투쟁을 벌였다. 6월 3일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이를 ‘6.3 사태’라 부르는 이유다.
박정희는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4개 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6월 22일 마침내 한일협정이 조인됐다. 7월 29일 계엄을 해제할 때까지 모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됐다.
대학은 문을 닫았고 신문을 비롯한 모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시위에 앞장서거나 배후로 지목된 인물들에 대해 사전 영장 없이 체포가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분위기 전환을 위한 계책을 꾸몄다.
마침 정권 내 적임자가 있었다. 제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다. ‘남산 멧돼지’ ‘나는 돈까스’ 등으로 불린 김형욱은 8월 14일 “북괴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 일당”이라며 소위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인혁당을 결성한 57명 가운데 41명을 구속하고 16명에 대해 전국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로부터 이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철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증거나 혐의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이 사건은 10년 후 10월 유신 때도 재활용됐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 사건과 관련된 8명의 사형을 확정이었다. 18시간 후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전격 단행됐다. 박정희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유족의 동의 없이 서둘러 관련자들을 화장시켰다.
국제법의학협회는 이들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4월 9일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는 이밖에도 많은 공안 사건들을 조작했다. 그중 하나가 동백림사건이다. 동백림이란 동베를린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