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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8. 2022

박정희와 한강 13

3선 개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시 ‘귀천’이다. 그는 한 때 죽었다고 알려져 동료들이 유고시집까지 헌정했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아니, 멀쩡하진 않았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다.

그의 심신을 무너뜨린 건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된 고문이었다. 그는 1967년 소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노 등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평생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천상병은 1970년 ‘귀천’을 썼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차라리 노을 빛 찬란한 저녁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동백림 사건’은 제 6대 대통령선거(1967년 5월 3일)와 제 7대 국회의원선거(1967년 6월 8일)를 끝낸 직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됐다. 해외에 있는 인사들을 납치해 오는 바람에 큰 외교 문제를 야기했다.

대법원에 의해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당초 문제가 됐던 간첩 혐의는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 수형자들은 머지않아 광복절 특사 명목으로 풀려났다. 사건 자체가 3선 개헌의 밑자락을 깔기 위해 조작된 것이어서 그들을 오래 잡아둘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선거에서 51.4%의 득표를 올려 40.9%에 그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이제 4년 밖에 더 남지 않았다. 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3선을 못하게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둘러싼 권력의 그림자들은 영구집권을 궁리했다. 그들은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3선을 할 수 있는 방법은 헌법 개정뿐이었다. 박정희는 여러 차례  “내 임기 중 개헌은 없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개헌은 하려면 국회의원 ⅔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기획했다. 한 석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김형욱은 목포에서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총력전을 불사했다. 그 과정은 설경구 주연 영화 ‘킹메이커(2022년)’가 잘 그려내고 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56.3%를 얻었다. 박정희까지 목포로 내려 가 찬조 연설을 했으나 김대중을 꺾지 못했다. 하지만 민주공화당은 175석 가운데 129석을 얻어 개헌저지선(117석)을 넘어섰다. 3선 개헌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대선 이듬 해 박정희는 슬슬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야당은 물론 여당 내조차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김종필까지 반대편에 섰다. 다음은 임자 차례야, 라는 박정희의 말을 수 없이 들어온 김종필에게 3선 개헌은 날벼락이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나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한 6인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박 대통령까지 솔직히 다 싫었다”고 토로했다.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길재호, 윤치영 등 공화당 인사들이 1968년 12월 청와대 인근 안가에 모여 3선 개헌에 대한 모의를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이 일에 총대를 멘 인물은 ‘남산 돈까스’ 김형욱이었다. 그는 반대 세력에겐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을 중정으로 끌고 가 고문을 자행했다. 

회유와 협박을 통해 숱한 야당 의원들을 변절자로 만들었다. 신민당 원내 총무였던 김영삼을 제거하기 위해 초산 테러까지 감행했다. 1969년 6월 20일 귀가하던 김영삼의 차에 청년 3명이 초산 병을 던졌다. 

차량과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초산 성분이었다. 다행히 김영삼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김형욱의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니면 이처럼 비밀스럽고 대범한 테러를 자행할 수 없었다.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공화당 이만섭은 김형욱을 퇴진시키면 찬성하겠다는 조건부로 돌아섰다. 결국 9월 14일 새벽 두 시 국회의사당이 아닌 별관에서 날치기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122표 반대 0표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박정희의 용인술이었다. 그 때까지 김형욱에게 상대편을 무는 역할을 맡긴 박정희는 3선 개헌 직후 매몰차게 그를 내다버렸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청와대로 불러 “수고 했어, 이제 그만 쉬어”라고 말했다. 

김형욱이 놀란 가슴 달래며 남산의 중정으로 돌아 왔을 때 그의 집무실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고 한다. 토사구팽당한 김형욱은 미국으로 건너가 박정희를 비난해오다 1979년 파리에서 암살당했다. 

1971년 4월 27일 제 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3번째 임기에 도전한 박정희는 그동안의 경제발전성과를 앞세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뽑아달라”고 호소했다. 그에 맞선 야당 후보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씨가 이기면 영영 대통령 선거는 없어질 것이다”며 10월 유신을 예언했다. 

당초 신민당 후보로는 원내총무 김영삼이 유력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당내 지명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했다. 대선은 부정투표 논란 끝에 박정희가 이겼다. 득표 차는 불과 95만 표였다. 이후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의 영구집권 시나리오가 진행됐다. 10.26이라는 비극적 결말의 전조였다.      


3선 개헌 이후 박정희는 점차 신격화 되었다. 그의 앞에는 ‘위대한 영도자’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나 사용하는 낯선 단어지만 당시엔 박정희의 동정을 소개하는 TV 뉴스에서 늘 하던 말이었다. 

그 신화에 도전장을 내민 공화당 내 인물이 있었다. 쌍용그룹 창업자이면서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었다. 그는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도록 해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렸다. 

대통령을 이겼다고 잠시 우쭐했던 김성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곤욕을 치렀다. 중정요원은 김성곤의 상징처럼 여겨진 콧수염을 뽑아버리는 수모를 안겼다. 결국 그 일로 국회의원을 사임한 김성곤은 몇 년 후 뇌출혈로 죽었다. 

당시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박정희의 권력은 정점에 이르렀다. 감히 김성곤이 항명으로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 무렵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는 간단치 않았다. 초고속 성장을 해온 경제도 1970년 대 들어 주춤거렸다.  

한국경제는 1966년부터 이른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1968년부터 4년 연속 두 자리 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1969년의 14.1%는 지금까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부에 의한 계획경제는 성장이라는 과실과 함께 부의 편중,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1972년 성장률은 6.5%로 뚝 떨어졌다. 일부 기업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채시장에서 배를 불리는 일까지 벌였다. 

박정희는 8월 3일 대통령 긴급조치 15호를 발동하여 사채를 동결시켰다. 이른바 8.3조치다. 이 조치의 덕으로 위기에 처한 기업들은 한 숨을 돌렸다. 그로 인해 살아난 재벌들은 자회사들을 늘려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 평양을 방문했다. 극비 행보였다. 그는 4월 26일 박정희에게 방북계획을 보고했다. 주머니에서 청산가리가 든 봉투를 꺼내 “여차하면 죽겠다”는 결의까지 내비쳤다. 

이후락은 평양에서 두 차례 김일성을 만났다. 그에 대한 답방으로 5월 29일 북한의 박성철 제 2부수상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7월 4일 이후락은 기자회견을 열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과 북은 세 가지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 첫 째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실현한다. 둘 째 상대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실현한다. 셋 째 하나의 민족으로 대단결을 도모한다. 자주와 평화, 단결이라는 세 단어가 쏙쏙 귀에 들어 왔다. 

발표하는 이후락은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듣고 있던 국민들은 너나없이 열광했다. 당장이라도 통일이 실현될 것만 같았다. 이후 통일이라는 단어는 모든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집어삼켰다. 

온 국민의 이목이 통일에 쏠려있는 그때 박정희는 무대 뒤에서 놀라운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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