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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8. 2022

박정희와 한강 14


 핵무기 개발     


전국이 금세 통일을 맞이할 것처럼 들떠있었다. 언론들도 일제히 거들었다. 그런 와중에 박정희와 그의 옹위 세력은 무대 뒤편에서 은밀히 10월 유신이라는 국면 전환을 꾀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당선된 다음 이미 박정희는 보다 강력한 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돌아보았다. 

박정희는 5.16 직후만 해도 몇 차례 민정이양을 발표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집권 4,5년을 넘기면서 서서히 권력의 맛에 빠져 들었다. 나중에는 한 번 잡은 권력을 영영 놓지 않으려 했다. 10.26을 향한 그의 비극은 그 순간 싹트고 있었다. 

김종필이 말한 ‘보다 강력한 체제’란 곧 자신의 영구집권을 의미했다. 통일의 환상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막힌 위장술이었다. 10월 유신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신(維新)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따왔다. 

1868년 막부를 타도하고 일왕의 복고를 가져 온 일대 변혁을 말한다. 당시 메이지유신의 주도 세력들은 일왕의 권위를 그대로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혁명은 말 그래도 싹 다 갈아엎는다는 의미다. 대신 중국 고전 시경에서 유신이라는 말을 찾아냈다. 박정희의 권력을 그대로 존속시키려 든 점에서 한일 두 개의 유신이 지향하는 바는 일치했다. 

개헌안이 10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공고됐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91.5%의 놀라운 찬성률이 나왔다. 불과 일 년 전 박정희가 얻는 53.19%의 지지율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통일에 대한 환상이 가져다 준 착시였다. 

국민들은 개헌안에 어떤 독소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지 잘 몰랐다. 이제부터 대통령은 국민의 손에 의해 뽑히지 않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거수기 단체에 의해 선출된다. 국회의원 ⅓도 그들이 뽑았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고, 중임제한은 없다. 대통령에게는 언제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할 수 있는 긴급조치 권한이 주어졌다. 한 마디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정확히 파악한 국민은 소수였다. 7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예언한 ‘영구집권’ 시나리오는 이제 다큐가 됐다.      

1973년 봄 벌어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은 10월 유신에서 10.26, 전두환의 등장과 12.12로 연결되는 급변 사태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윤필용은 수도경비사령관 시절 상관들이 명절에 그의 집에 세배를 올 만큼 대단한 실세였다. 


그의 배경은 박정희였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으로 구성된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윤필용의 권세는 한 순간 말실수로 무너졌다. 

윤필용은 육사 8기생이다. 10월 유신을 전후한 어느 날 그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거나하게 취한 윤필용은 이후락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하니 그만 물러나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락보다 3살 어렸다. 술자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후계자’는 박정희의 아랫사람이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다. 이 사실은 동석자에 의해 외부로 알려졌고 곧 초대형 폭풍을 몰고 왔다. 

윤필용은 쿠데타 모의로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수경사 참모장이었던 손영길 준장도 함께 구속됐다. 그는 육사 11기로 군부 내 하나회의 리더였다. 대신 급부상한 인물이 전두환 대령이었다. 

이때 만해도 전두환은 손영길보다 진급이 1년 늦은 상태였다. 그러나 잘 나가던 손영길은 윤필용과 함께 몰락했다. 하나회도 해체 위기에 내몰렸으나 박정희는 이 군내 사조직을 눈감아 주었다. 손영길 대신 하나회를 장악한 전두환은 1사단장을 거쳐 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취임하면서 7개월 후 10.26을 맞게 된다.  

박정희는 자신의 지위를 넘보는 자나, 넘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김종필에 의하면 박정희는 부하들 사이를 갈라놓고 충성경쟁을 유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견마지로였다.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1977년 지미 카터가 제 39대 미국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안팎으로 위기를 맞았다. 카터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은 이보다 5년 앞선 1971년 주한미군 2개 사단 가운데 제 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켰다. 남아 있던 제 2사단도 전방에서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려온 남한 정부는 심각한 위기를 느꼈다.

결국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남한과의 재래식 무기 경쟁에 불리함을 느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현재 상황과 정반대였다. 1973년 초 재미과학자 주재양 박사가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으로 부임하면서 핵개발은 본격화됐다. 이후 최형섭, 이휘소, 김철 등이 속속 합류했다. 

이들 중 이휘소 박사는 세계적 핵물리학자였다. 1962년 미국을 대표하는 10명의 핵물리학자로 뽑힐 만큼 대단한 인재였다. 그는 카터 행정부가 들어선 1977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박정희는 72년 5월 최형섭을 프랑스로 보내 원자력 재처리 시설 도입을 논의했다. 75년 4월 양국은 연간 20㎏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 최대 4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착착 진행되던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좌초됐다. 이후 집권한 전두환은 미국의 12.12 사태 승인과 핵무기 개발 포기를 맞바꾸었다.       

    

차지철과 김재규    

 

1970년대 들어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졌고, 이란에선 무슬림 혁명이 일어났다. 이슬람 국가를 표방한 이란은 미국에 등을 돌렸다. 그 전까지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철저한 친미국가였다. 

미국과 소련이 벌인 냉전의 온도는 점점 하락했다. 빙점을 지나 극저온 상태를 유지했다. 미국은 소련과 당시 공산권의 2인자 중국 사이를 떼 놓으려 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탁구를 앞세워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미국이 G2로 성장한 중국과의 대결에 부심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대만은 유엔 상임이사국에서 쫓겨났고, 그 자리를 중국이 차지했다. 1972년 닉슨 미 대통령과 마오쩌둥의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닉슨은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차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을 빼겠다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휴전선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한국으로선 등골이 오싹한 말이었다. 닉슨의 이 말은 박정희로 하여금 핵무기 개발에 더욱 열을 올리게 만들었다. 

중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패한 인도는 1974년 핵무기 시험에 성공했다. 인도와 앙숙인 파키스탄이 뒤를 이었다. 우리라고 왜 안 되나.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채찍의 강도는 느슨했다. 때리는 듯했지만 아프지 않게 적당히 때렸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선 이 두 나라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들 두 나라와 달랐다. 미국은 완강히 반대했다. 프랑스의 재처리 기술, 캐나다에선 원자로를, 미국에서 미사일 기술을 도입해 핵무기를 완성하려 했던 박정희의 계획은 벽에 부딪혔다.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가 재처리 기술 전수 계약을 취소했다. 미국은 75년 여름 국무장관을 보내 박정희에게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박정희는 물밑에서 핵무기 개발을 진행시켰다. 나중에 12.12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미국의 요구에 부응 핵무기에 관한 모든 자료를 넘겨주고 완전 포기의 길을 선택했다.      

1974년 8월 15일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에 의해 살해됐다. 이 일로 박종규가 경호실장에서 물러나고 차지철이 임명됐다. 마침내 10.26으로 가는 열차는 출발지를 향해 떠났다.   

당초 박정희는 해병대 장교 출신 오정근을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5.16 당시 한강인도교 위에 박정희와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박정희는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역사나 사람의 생에서나 가정이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오정근이 경호실장이 됐더라면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유신체제의 박정희 정권은 잇단 무리수를 저질렀다. 1973년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강제로 데려왔고, 75년엔 반 유신체제의 대표적 인사였던 장준하가 의문사를 당했다. 모두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된 일이었다. 장준하 의문사사건은 의혹만 제기되었을 뿐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차지철이 경호실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권력의 추가 급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에서 경호실로 확 기울어졌다.   


박정희는 1978년 7월 6일 제 9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장충체육관서 치러진 선거에서 2578명의 대의원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2577명의 찬성표를 받았다. 선거의 1등 공신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보다 차지철 경호실장에 더 의지했다. 정확히는 이들 두 충견의 충성 경쟁을 즐겼다. 차지철은 사설 정보기관까지 운영하며 김재규를 따돌렸다. 

박정희와 동향인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8살 위였다. 5.16 당시 김재규는 별(준장)을 달고 있었고 차지철은 위관 장교(대위)였다. 그러니 김재규로썬 속이 썩어문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제 10대 국회의원선거서 공화당은 전체 231석 가운데 145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통일주최대의원들이 뽑는 77명의 유신정우회를 제외하면 지역구 68석에 그쳤다. 

야당인 신민당 61석과 민주통일당 3석을 합한 숫자보다는 많았다. 무소속이 22석. 그러나 정당 득표율에선 신민당이 32.8%로 공화당 31.7%보다 1.1% 앞섰다. 차이는 미묘했지만 그 의미는 엄중했다. 박정희 정권이 10대 총선서 전력을 기울인 결과여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 무렵 차지철의 행보는 안하무인이었다. 밤늦게 전차 1개 중대를 청와대 인근에 풀어 기동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경복궁 연병장에서 장관과 재벌 총수 등을 불러 놓고 국기 하강식을 갖기도 했다. 그 때마다 병사들에게 “경호실장님께 대한 경례‘를 붙이도록 지시했다. 

김재규는 입버릇처럼 “차지철 이 놈,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마 그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비극의 발단이 된 사건은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표결이었다.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은 국회의사당 별실에 모여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통과시켰다. 김영삼은 9월 뉴욕 타임스 특파원과 인터뷰를 갖고 “미국은 독재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국 국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박정희는 당장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쫓아내라고 지시했다. 김영삼은 일개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제 1 야당의 총재였다. 김재규는 제명 안이 통과되기 전 날 김영삼을 만나 “회견 내용이 과장됐다”며 한 발 물러나주면 자신이 나머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은밀히 제안했다. 

김영삼은 김재규의 중재를 뿌리쳤다. 김영삼과 박정희 두 ‘강(强) 대 강’이 부딪혔다. 김영삼의 제명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민심이 술렁거렸다. 10월 16일 부산 시청 앞을 비롯한 시내 일원에 대학생과 시민들이 “제명을 철회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부마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데모였다. 다음 날 밤 박정희 정권의 수뇌부가 청와대에 모여 대책회의를 가졌다. 차지철과 김재규를 비롯해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도 참석했다. 차지철이 공수부대를 출동시키자고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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