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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9. 2022

박정희와 한강 15


10.26의 궁정동     


김재규와 차지철은 사태 해결 방안을 놓고 충돌했다. 차지철은 강경진압을 주장했다. 탱크로 싹 갈아엎자고 위협했다. 김재규는 보다 신중한 편이었다. 그는 현지에서 상황의 엄중함을 직접 보고 왔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10월 18일 0시를 기점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탱크와 장갑차가 시내로 밀고 들어갔다. 그 뒤를 공수부대가 따르고 있었다. 시위는 일시 주춤했지만 부산에 이어 마산으로 퍼져 나갔다. 

박정희는 25일 ‘부마사태 대책회의’에서 김재규를 질책했다. 대통령의 추궁을 받은 김재규는 모든 것이 차지철 때문이라고 분개했다. 이미 둘 사이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 무렵 중앙정보부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지만 9살 아래인 그를 어린 시절엔 몰랐다. 육사 2기생으로 함께 입학해 서로를 알게 됐다. 

이후 박정희는 같은 경북 구미 출신에 중학교 교사 경력을 공유한 김재규를 각별히 아꼈다. 평소 후배들에게 존댓말을 해온 박정희지만 김재규에게만은 “재규, 재규”하면서 허물없이 반말을 했다.  하지만 5.16 거사에는 그를 참여시키지 않았다.

김재규는 5.16 직후 호남비료 사장을 거쳐 6사단장, 초대 보안사령관, 3군단장 등 군에서 승승장구했다.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 박정희 정권을 유지하는 최 일선 이었다.      

10월 26일 충남 아산만 삽교천 방조제를 다녀온 박정희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날 저녁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준비하라고 차지철에게 지시했다. 

참석 인원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등 네 명이었다. 가수 심수봉과 또 한 명의 여인 신재순이 초대됐다. 당시 23살이던 신씨는 모델로 일하고 있었다.   

궁정동 안가는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식사나 연회를 갖던 장소였다. 워낙 보안이 철저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한 적 있던 전두환조차 당시엔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문제의 그날 박정희는 지나치게 김재규를 몰아세웠다. 

“어이, 재규. 넌 참 실망스런 인물이야. 정보부 예산 무한정 갔다 쓰면서 부마사태 하나 수습 못하고.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왜 그 모양이야!” -김종필 회고록.

당시 김재규는 간경화로 인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은 잇달아 술잔을 비웠다. 

차지철이 “신민당이고, 뭐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며 과잉 충성심을 드러냈다. 그 순간 김재규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었다.

“썅, 이 버러지 같은 놈. 너 죽어, 이 새끼야.”

김재규가 들고 있던 총에서 화염이 번뜩였다. 총알은 차지철의 오른 쪽 손목을 맞혔다. 차지철은 총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였다.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 부속 건물이어서 들어서는 순간 대통령 경호는 경호실에서 정보부로 이관됐다. 그렇더라도 경호실장은 총을 휴대할 수 있었다. 총에 맞은 차지철은 대통령을 버려두고 황급히 실내 화장실로 대피했다. 경호실장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 

“야, 너도 죽어!”

김재규는 박정희를 향해서도 총을 발사했다.      


한강의 기적    

 

총알은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맞혔다. 심장을 피했다지만 피가 펑펑 솟구쳤다. 두 개의 총알을 연달아 뿜어낸 총은 더 이상 작동 되지 않았다. 

김재규는 밖으로 달려 나가 부하의 총을 건네받은 후 다시 들어 왔다. 화장실에 숨어 있던 차지철은 조용해진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가 재수 없게도 김재규와 맞닥뜨렸다. 차지철의 몸통을 향해 총알 하나가 더 발사됐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대고 확인 사살을 했다. 이후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태우고 육군본부로 향했다. 그가 만약 자신의 관할인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더라면 역사는 또 한 번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사건을 수사한 합동수사본부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정국 수습책이 거듭 실패해 그 무능함이 노출돼 박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인책 해임설리 나돌아 불안을 느낀 한편, 군 후배이자 연하인 차지철의 오만방자한 태도와 월권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그를 편애하는데 불만을 품고, 대통령 등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잡을 것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발표자는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 본부장인 전두환이었다. 이후 전두환은 5.16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는 12.12를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박정희가 사라진 권력의 빈 공간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누어진다. 그의 일대기를 쓴 보수인사 조갑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영도 아래 한국은 1류 국가 문턱까지 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시민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그는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여운을 남겼다. 나아가 “세계에서 이만큼 성공한 쿠데타는 별로 없었다”고 썼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은 93달러였다. 1979년엔 1858달러로 늘어났다. 수출액은 38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증가했다. 이 차이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낳았다. 

그러나 진정한 ‘한강의 기적’은 소득의 증대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의의 확산이 함께 이루어진 데 있다. 한국은 2차 대전 이후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이룩한 유일한 나라다. 

박정희의 한강은 부의 증대와 함께 인권 유린과 자유의 유보, 민주주의의 퇴행, 극단적 불균형, 그로 인한 갈등 등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조갑제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박정희는 영욕과 청탁을 함께 들이마신 사람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장마에 물이 불어나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주역에 ‘이로움을 얻으려면 큰 강을 건너야한다’고 일렀지만 강은 왕건의 입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 이편의 왕건은 호족에 불과했다.

왕건은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넜고, 그 여세로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은 감사의 표시로 마을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경기도 이천의 지명 유래다.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따온 말이다. 큰 강을 건너면 이롭다는 의미다. 

박정희의 생애에는 두 번의 한 강이 있었다. 한 번은 남으로, 한 번은 북으로 그는 강을 건넜다. 그로인해 군에 복직했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두 번의 도강은 모두 그에게 이로움을 안겨주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번영과 질곡을 함께 경험했다.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K9 자주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이 세계 속에 우뚝 섰음을 부인하긴 힘들다. 이제 한국사는 세계사다. 7개의 강이 바꾼 세계사에 굳이 ‘박정희와 한강’을 포함시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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