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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01. 2022

러시아 혁명과 네바강 4


스탈린     


레닌은 그를 스탈린(강철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의 본명은 이시오프 주가시빌리다. 본명보다 별명이 더 유명해졌다. 나중에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새 별명이 추가됐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다. 

조지아 출신 스탈린은 비단 러시아 국민만 많이 죽인 게 아니다. 김일성을 부추겨 한국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에게 소련의 참전을 약속해놓고 정작 자신들은 슬쩍 빠졌다. 남북한의 한민족과 미군을 비롯한 UN군, 숱한 중공군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소련은 멀찍이 서서 구경만 했다. 

스탈린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폭력은 폭력을 낳았다. 집권 초기만 해도 스탈린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그에게는 전임자 레닌이 가졌던 카리스마가 없었다. 그는 변방 조지아에서 온 시골뜨기에 불과했다. 그가 레닌 사후 궁지에 몰려 있던 트로츠키를 옹호해준 것도 우호세력 확보 차원이었다.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1927년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시켰다. 스탈린에게 러시아 혁명의 일등 공신이자 ‘세계혁명론’을 주장해온 트로츠키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트로츠키는 전 세계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혁명이 완결된다고 주장한 이상주의자였다.      

하나하나 정적을 제거한 스탈린은 마침내 1927년 12월 27일 제 15차 당 대회를 통해 일인 체제를 굳혔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농업을 포기하고 중공업에 치중했다. 이후 소련의 군사력이 급속히 강화됐다. 내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스탈린은 공포정치를 펼쳤다. 

대개의 독재자들이 그렇듯 스탈린은 측근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믿음이 가는 자를 가장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 결과는 참혹한 대숙청이었다. 그는 “적으로 판명되면 그의 가족은 물론 일족까지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공언했다. 


1937년부터 1년 동안 68만 여 명이 반혁명의 죄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제노역과 고문,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한 숫자는 120만 명에 달했다. 스탈린 시대 비밀경찰은 독일 게슈타포를 능가하는 공포의 대명사였다. 연해주와 사할린 일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스탈린은 한민족과 악연이 깊다. 일본의 패색이 완연해진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를 공격했다. 6일 후 일본이 항복을 하자 재빨리 원산과 평양까지 소련군을 내려 보냈다. 그 결과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겪었다. 

원래대로면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범국 일본이 동서로 갈라졌어야 했다. 태평양전쟁을 수행한 맥아더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희망했다. 스탈린이 이 제안을 수용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나누어졌다. 

스탈린의 통치 스타일에 관해선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주변의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경호원과 주치의까지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의심했다. 지나친 조바심은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 

어느 날 스탈린은 경호원들에게 “내가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까지 스탈린의 방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침 보고를 받을 시간이 지나자 경호원들은 초조해졌다. 명령 없이 방문을 열 순 없었다. 그렇다고 보고를 제 때 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문책이 주어질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사이 이른바 의학적 골든타임을 놓쳤다. 스탈린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였다. 

밤늦게 방문을 열었을 때 경호원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때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소파에 눕힌 채 그냥 내버려두었다. 스탈린은 그렇게 죽어갔다. 

이런 재미난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 그가 아끼던 금시계를 도난당했다. 보안책임자를 엄히 꾸짖은 후 반드시 도둑을 잡아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시계는 그의 안방 세면대에서 발견됐다. 

멋쩍어진 스탈린은 보안책임자에게 “(도둑 잡기를) 그만 두라”고 제시했다. 그러자 보안책임자는 “이를 어쩌죠? 이미 30명을 잡아다가 족쳐 29명의 자백을 받아 두었습니다”고 실토했다. 스탈린은 버럭 화를 내며 “뭐야? 여태 자백안 한 그 놈은 대체 누구야?”고 다그쳤다. 

독재자 스탈린은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 그의 사후 소련은 집단지도체제를 택했다. 결국 권모술수에 능한 흐루쇼프가 정국을 장악했다.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스탈린 깎아내리기였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덕분에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겼다”는 말을 남겼다. 묘하게 스탈린의 역할을 평가 절하했다.    

  

마오쩌둥  

   

중국공산당은 2021년 창당 100주년을 맞았다. 1921년 7월 23일 천두슈, 리다자오 등 12명이 상하이에서 창당할 때만해도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로 올라선 현재의 지위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려한 문장력을 지닌 마오쩌둥은 당시 기록 담당이었다. 이후 마오는 차곡차곡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1927년 난창과 광저우에서 주도한 폭동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위기를 맞았다. 마오쩌둥의 아내 양카이후이는 1930년 창사폭동 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마오쩌둥은 고난 가운데서도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심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주석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1934년 10월 장제스의 국민당에 쫓겨 장시성을 떠나 산시성까지 9,600㎞의 장정을 단행했다. 1년여의 장정을 벌이면서 10만을 헤아렸던 인원은 6,000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정은 반전의 모멘텀을 제공했다. 

마오쩌둥 스스로도 장정을 끝낸 후 “우리는 11개 성(省)을 지나오면서 씨를 뿌려 두었다. 언젠가 싹이 트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승리했고 적은 패배했다”고 선언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국공내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1946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마오쩌둥은 혁명가이자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권력의 흐름과 대중의 심리를 읽는데 탁월한 후각을 지녔다. 죽은 후엔 관우, 악비 등과 마찬가지로 신격화되었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홍위병을 자극 문화혁명을 일으켜 수 천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대약진운동 당시엔 2천 만 명이 굶어서 죽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주석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어린 학생들로 홍위병을 구성해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주석에 오른 류샤오치는 덩샤오핑과 손을 잡고 경제를 되살려 놓았으나 마오에 의해 부르주아 반동으로 내몰렸다. 실각한 류샤오치는 홍위병에게 폭행을 당한 후 폐렴으로 쓸쓸히 죽었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여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었다. 덩샤오핑은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념을 유보시키고 실용을 앞세웠다. 색깔과 관계없이 쥐 잘 잡는 고양이를 훌륭한 고양이로 간주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에게 어려운 숙제였다. 스탈린처럼 격하시키자니 중국 인민들의 반감을 살 것 같았다. 덩샤오핑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탁월한 평가를 내렸다. 잘한 점이 더 많지만 잘못도 있었다는 해석이다. 문화혁명으로 고초를 치른 당사자인 점을 감안하면 유연한 발상이다. 

중국은 2011년 일본의 GDP를 추월해 세계 2위로 올라섰다. 1978년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한지 33년 만이었다. 덩샤오핑은 후대에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다)’를 지시했다. 마치 무술 영화의 주인공이 원수를 갚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긴 채 오로지 수련에 몰두하듯. 

양회의 회(晦)는 그믐밤을 이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힘을 기르라는 주문이다. 덩샤오핑의 이 말은 오랫동안 중국 외교의 기조를 이뤄왔다. 

그러나 시진핑에 이르러서는 서둘러 어둠을 버리고 빛으로 나오고 있다. 마침내 ‘유소작위(有所作爲: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뜻을 이룬다)’의 힘을 과시하려 든다. 심지어 ‘전랑외교(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늑대처럼 힘을 앞세우는)’를 펼치며 이웃나라를 겁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초강대국 지위를 누려온 미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덩샤오핑은 ‘선부론(先富論)’을 주장했다. 모두들 가난하니 누군가 먼저 부자가 되어 앞에서 끌어달라는 의미다. 덩샤오핑의 개방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에 더 가까워졌다. 

2012년 말 집권한 시진핑은 ‘공동부유론’을 들고 나왔다. 함께 잘 살자는 뜻이다. 다시 사회주의로의 회귀다. 골고루 잘 살자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칫 개인 우상화와 문화혁명 당시와 같은 교조적 분위기로 돌아간다면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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