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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02. 2022

러시아 혁명과 네바강 5

냉전과 한국전쟁    

 

2차 대전의 최대 수혜자는 소련이었다. 동유럽을 손에 넣었고 중국의 공산화를 자극했다. 일본과의 전쟁에 뒤늦게 뛰어들어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과 소련은 전범국 일본 대신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두 동강냈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의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분할 점령할 것을 먼저 제안했다. 소련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전범국 일본은 분단을 모면했다. 대신 한반도가 두 동강 난 것은 비극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른 미국 국민들은 전쟁에 넌더리를 쳤다. 소련은 그 심리적 틈새를 노려 차곡차곡 붉은 대지를 넓혀나갔다.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은 한반도의 북쪽에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영국은 소련의 야욕에 대해 여러 차례 미국에 경고를 보냈으나 묵살됐다.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은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완력을 키워가던 소련은 1949년 핵무기 실험을 통해 미국과 맞먹는 펀치력을 갖게 됐다. 바야흐로 세계는 본격적인 냉전시대로 접어들었다.      

1945년 처음 쓰인 냉전(cold war)이라는 단어는 1989년 소련 체제 붕괴까지 이어졌다. 전에 없던 차가운 전쟁이었다. 영국 수상 처칠은 냉전의 반대편 세력에 대해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장막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세계는 민주 진영과 공산 체제로 나누어져 팽팽히 맞섰다. 냉전을 벌인 양진영은 첩보와 여론전으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정작 미국과 소련은 직접 링 위에 오르진 않았다. 대신 둘로 나누어진 한국과 베트남에서 대리전을 벌였다. 같은 처지의 독일에선 전쟁이 없었다. 

1940년 대 베트남에선 묘한 동거가 이루어졌다.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지만 국정운영은 식민지 시대로부터 이어진 프랑스가 맡았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이후 베트남은 북부의 베트민과 남부의 프랑스 사이에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베트남은 결국 남과 북의 내전에 돌입했다.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길어졌다. 1973년 미군의 철수로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게 된다. 

반면 남북한은 전쟁을 치르고도 끝내 합쳐지지 못했다. 애먼 피만 흘린 셈이다. 지구상에서 오직 한반도만 여전히 냉전시대의 유산인 분단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김일성은 친소정권 수립 일 년 후인 1949년부터 남침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의 핵무기 실험 성공과 중국의 공산화에 고무된 결과다. 김일성은 1949년 5월 미군 철수를 지켜보면서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일성이 먼저 전쟁의사를 전달했는지 스탈린의 자극을 받아 움직였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소련은 군사물자를 제공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족 병사들을 김일성에게 보내주었다. 전쟁 경험을 가진 군인들이었다. 미국은 1950년 1월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김일성의 전쟁 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남북 합해 200만에 가까운 군인 사상자를 냈다. 민간인 희생자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남과 북은 일본에게 경제부흥의 기회를 제공한 채 3년 여 오랜 시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냥 치열하게 싸웠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독일은 종전 후 연합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됐다. 수도 베를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독 지역에 위치해 있던 베를린은 섬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1948년 6월부터 1년 가까이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서쪽 주민들은 자유를 얻었으나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미국은 대규모 수송기를 동원해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한편 미국과 서방은 소련에 대해 경제 제제로 압박을 가했다. 소련은 견디지 못했다. 결국 이듬 해 5월 서베를린 봉쇄를 풀게 된다. 동서 베를린의 분단시대는 1990년 3월 장벽의 붕괴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냉전의 시대도 끝났다.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는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 대신 북유럽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공산주의의 일부를 자본주의에 접목시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스웨덴식 사회주의라는 용어도 나왔다. 완벽에 가까운 사회보장제도가 채택됐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복지를 모든 사회제도 가운데 최우선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권리로 제도화한 것이다. 스웨덴에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마저 모호하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추구했던 공산주의를 계급투쟁이나 시행착오 없이 묵묵히 실행에 옮기고 있는 현실의 유토피아 일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혼동해서 쓰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기 이전 단계다. 사회주의에선 아직 계급이 존재한다. 공산주의에선 계급 자체가 소멸되고 없다. 일종의 계급 무중력 상태다. 

공산주의에선 사유재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서는 일부 인정된다. 중국이나 베트남은 사회주의다. 북한은 스스로 공산주의라 주장하지만 공산도 공유도 이루어지지 않는 어정쩡한 사회다. 변형된 수령주의일 뿐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분배 방식에도 차이가 난다. 사회주의는 노동에 따라, 공산주의에선 필요에 따라 재화가 나누어진다. 공산주의는 지상에 실현된 적 없다. 초기 기독교 집단 등에서 의도치 않게 시도된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추상적 개념으로만 남아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단계에서 나타난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마지막 목표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노동의 대가로 평등한 분배를 보장받는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언은 이런 유토피아적 세상의 구체화에 노력한 인물이다.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구성원들의 삶은 더 피폐해진 것을 보고 개혁을 꿈꾸기 시작했다. 

오언은 실제로 1825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대규모 토지를 구입해 추종자 900명과 함께 ‘뉴 하모니’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오언의 사회주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21세기까지 이어진 각종 공산주의 실험에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은 국가는 없다.     


세계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상위 1% 부자들은 전 세계 부의 50.1%를 소유하고 있다. 100명 중 한 명이 전체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하위 50%의 비중은 2%에 불과하다. 

새로운 화폐개념인 비트코인만 하더라도 투자자 가운데 상위 0.01%가 전체 유통량의 27%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코로나 19사태이후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9700만 명의 극빈층이 하루 2달러(약 2400원)미만으로 버티고 있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아담 스미스이후 온갖 경제이론이 쏟아져 나왔지만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렸던 유토피아의 극히 일부라도 밟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누리기 위한 생계비를 지급한다”는 획기적 제도를 소대했다. 최근 유럽은 물론 국내 정치권에도 자주 등장하는 ‘기본소득’ 개념이다. 16세기 초에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공동생산, 공동 소유가 기본이다. 음식은 배급제이고 식사는 함께 모여서 한다. 하지만 죄를 지으면 노예로 삼는다는 제도는 전근대적이다. 하루 6시간 노동에 공공 주택에서 거주한다. 모어는 이 책에서 “도둑에게 벌을 주는 것보다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해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유토피아’는 공산주의 출현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없다’와 ‘장소’의 합성어다. 이상향이라고 변역되지만 원래는 ‘어디에도 없는’ 곳을 의미한다.  

기본소득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말이 되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유토피아’에나 있을 ‘터무니없는’ 제도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미 핀란드는 2017년 이 제도를 실험했다. 비록 전 국민을 상대로 실시하진 못했지만.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월 560유로(약 76만 원)을 주는 실험을 했다. 2년 후 핀란드 정부는 이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그에 따르면 기본 소득은 개개인의 행복감을 높이는 데는 기여했으나 고용 촉진 효과는 충분치 않았다.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는 아직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 일부를 희생해야 가능해진다. 그들 역시 노력의 대가를 쉽게 내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재원 마련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랜 시간 책상 서랍 안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지금의 추세로 AI에 의한 직업 기회 상실이 가속화되면 언젠가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시점이 올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H 카는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면서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유럽에서 정점에 달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최초의 공공연한 도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 혁명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개혁개방 직후인 1990년 대 초반 중국을 간 적 있었다.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과의 크기가 한국의 같은 수종보다 반밖에 되지 않았다.

내 것도 아닌 사과나무에 내 것처럼 정성을 기울일 리 없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사과는 한국 것만큼 커졌다. 능력에 따라 일한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일한 결과다.  

귀족을 타도하기 위한 10월 혁명은 새로운 공산주의 귀족들을 만들어냈다. 소련이나 중국의 공산당 간부들은 과도한 혜택을 누려왔다. 노동생산성의 저하로 생산량은 줄어들었다. 그 과실마저 일부 계층이 독차지하는 모순은 10월 혁명 이전과 다름없다. 근대의 귀족이 공산당 간부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네바강에 포성이 울린 지 100년도 더 지났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유럽이 아닌 러시아에서 먼저 시작됐다. 10월 혁명은 성공했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유토피아는 여전히 지평선 저 너머에 있다. 

네바강은 740㎞를 흘러 핀란드만으로 빠져 나간다. 그 어귀에 페테르부르크가 있다. 로마를 본보기로 삼아 표트르대제가 건설한 신도시다. 겨울 궁전은 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1762년 완공된 이 궁전은 1000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궁전 가운데 하나다. 1917년 10월 이 아름다운 궁전 앞에서 볼셰비키는 군함을 몰고 와 포격을 가했다. 소리만 요란할 뿐 정작 대포알은 없었다. 

단단했던 겨울궁전은 공포탄 한 발에 무너졌다. 그와 함께 차르의 시대를 막을 내렸다. 10월 혁명의 상징인 군함은 지금도 네바 강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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