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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6. 2022

박정희와 한강  8

한강 다리 위 총격전     


반도호텔은 역사적 공간이다. 이 호텔은 1938년 지금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미군 고위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한때는 미 대사관 건물이기도 했다. 1970년 그 자리에 새 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809호실은 장면 총리의 숙소였다. 바로 옆방에는 경호실이 있었다. 당시엔 내각책임제여서 총리는 현재의 대통령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809호실은 국가 최고 권력자가 머문 곳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두 시 809호실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이례적인 호출이었다. 전쟁이 아니면 이 시각 벨이 울릴 리 없었다. 설마 인민군이 다시 남침한 것은 아닐 것이고.   

미처 잠에서 들깬 장면 총리는 전화를 건 사람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인 걸 알고서 깜짝 놀랐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그를 놀라게 했다.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아니고. 인민군이 아닌 국군이 서울로 쳐들어온다니. 그렇담 쿠데타란 말인가. 쿠데타가 아니고선 무장 국군 병력이 서울을 공격할 사태는 없었다. 장면 총리는 즉각 “미군 사령관에게 보고했느냐”고 물었다. 육군참모총장은 그랬다고 대답했다. 

다소 안심이 됐다. 그래도 참모총장에게 곧바로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즉시 가겠다고 대답했다. 장면 총리는 장도영을 기다렸다. 참모총장은 금세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왜 안 오는 거지. 조금 있으니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분명 총소리였다. 경호원들이 달려 와 총리에게 피신해야 된다고 말했다. 장면 총리는 황급히 길 건너편 미 대사관으로 갔다. 대사관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일국의 국가수반이지만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다.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퍼뜩 떠오른 장소가 있었다.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이었다. 그곳이라면 안전할 것이다. 마침 그곳 원장과 개인적 인연이 있었다.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40시간을 보냈다. 그 하루하고 반나절 남짓 동안 대한민국 역사가 바뀌었다. 장면 총리가 그 40시간 동안 숨어 있지 않았더라면? 

당초 미군은 쿠데타를 초기에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가 부재중이었다. 총리를 대신할 넘버 투 윤보선 대통령이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올 것이 왔다”고 말한 후 쿠데타를 용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쿠데타 진압을 만류하기까지 했다.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장면과 윤보선의 관계를 알아야한다. 윤보선은 장면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상당했다. 이참에 장면이 제거되면 다음은 자신 차례라고 오판한 듯했다. 

미국은 “총리는 나타나지 않고 대통령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며 쿠데타 진압에서 방관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장면은 5월 18일 낮에서야 나타났다. 이미 군인들이 정국을 장악한 후였다. 곧이어 장면은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쿠데타의 성공여부는 서울의 주요 거점 장악에 있었다. 주요 목표는 반도호텔 809호실과 육군본부, 방송국 등이었다. 권력과 군사력, 언론 세 곳이 우선 목표였다. 

반도호텔에는 장면 총리가 있었다. 현 상황서 권력의 정점이었다. 쿠데타 진압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을 저지하려면 육군본부를 점령해야 했다. 방송국은 민심수습과 쿠데타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중앙청과 서울시청 등 주요 관가도 대상에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곳을 장악하려면 상당한 병력이 필요했다. 더구나 쿠데타 진압군의 반발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동원한 군인의 수는 3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 병력만으로 대사를 치를 수 있을까. 내부에서 조차 회의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있었다. 더 이상 미적거리다간 자신이 죽을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쿠데타에 대한 정보는 이미 새나가고 있었다.

쿠데타의 선두 부대는 공수단과 해병대였다. 공수단 병력은 5기생 박치옥이 이끌었다. 가슴에 수류탄을 매단 사진으로 유명해진 차지철이 그 휘하에 있었다. 당시 대위였던 차지철은 중령 예편 후 정계로 뛰어들었다. 나중에는 박정희의 경호실장으로 2인자 노릇을 했다. 같은 대위였던 전두환은 군대에 그대로 남았다. 차지철과 달리 전두환은 정규 육사출신이었다.

차지철은 육사 12기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후 간부 후보생으로 장교가 됐다. 차지철 대위는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과 함께 5.16 이틀 후인 18일 육사생도들의 쿠데타지지 행진을 지켜보는 사진 하나로 마치 쿠데타의 주역처럼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5.16 당시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


육사생도들의 행진은 전두환의 사주로 이루어졌다. 육사생도들의 지지행진은 군사정변의 성공을 알리는 결정타였다. 서울대학교 학군단 대위였던 전두환은 육사생도들에게 ‘5.16 지지 행진’을 벌이라고 부추겼다. 

이 일로 전두환은 줄곧 박정희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된다. 나중에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박정희는 그를 살려주었다, 그 때 군복을 벗었더라면 12.12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변의 주역이었던 육사 5기생과 8기생들은 박정희의 곁에 서있는 차지철의 사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 차지철이 군사정변에서 한 일은 거의 없었다. 

차지철과 박종규는 박정희를 주군 이상의 존재로 여겼다. ‘박정희교(敎)’의 충실한 교인들이었다. 이 둘은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내며 2인자 권력을 톡톡히 누렸다. ‘피스톨 박’이라고 불린 박종규는 툭하면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권총으로 위협할 정도였다.

5.16에 동원된 실제 병력은 공수단과 김윤근이 이끄는 해병대 외에도 6군단 포병단, 6관구와 30사단, 33사단 병력 일부였다. 모두 합쳐 봐야 3600명 남짓이었다. 그들로는 한국군은 물론 당시 5만 명에 이르던 미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해병대와 육군 헌병대는 한강 다리위에서 2시간가량 대치했다. 결국 둘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먼저 총을 쏜 쪽은 헌병대였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쪽은 쿠데타 군이었다. 총성이 울리자 박정희는 즉시 지프에서 내렸다. 그의 귓전에 총알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자세를 흐트러트리진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실전을 치른 베테랑들은 알고 있었다. 총알 소리를 듣고 몸을 피하면 이미 늦는다. 몸이 총알보다 더 빨리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박정희는 죽기를 각오한 상황이었다.

한참 후 을지로 광명인쇄소에 한강 다리를 돌파한 박정희가 나타났다. 김종필이 혁명 공약 인쇄 작업을 하고 있던 곳이었다. 한강 다리위에서와 달리 박정희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장도영이가 날 쏘았어. 장도영이 날 쐈단 말이야”라고 소리쳤다. -김종필 회고록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5.16 군사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 동력으로 박정희의 3대 결심을 꼽았다. 첫 째 이 날 거사는 사전에 군 당국에 누설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굴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의 결단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둘째는 첫 번째와 맥을 같이 한다. 5월 15일 밤 거사의 중심지였던 6관구 사령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쿠데타 추종 세력과 저지 세력이 뒤엉켜 있었다. 박정희는 그곳의 혼란을 간신히 수습한 후 거사의 실 병력이었던 공수단과 해병대를 추스르기 위해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를 떠나 현장으로 갔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강다리에서의 결단이었다.  

김윤근 준장이 이끄는 김포 해병여단은 새벽 3시 부대를 출발시켰다. 해병병력은 1500명 가랑이었다. 김포가도를 달리던 해병대는 도중에 박정희 일행을 만났다. 서로를 확인한 양측은 만세를 불렀다.

박정희와 해병대 병력은 3시 30분 한강 다리 위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을 저지하는 군인들을 만났다. 저지세력이라 봤자 몇 명 되지 않았다. 더구나 해병대의 뒤는 공수부대원을 태운 트럭이 따라 오고 있었다. 

쿠데타군은 노량진 부근서 대규모 병력 이동에 놀란 경찰관들을 보았다. 공포탄 몇 발을 쏘자 그들은 달아났다. 하지만 한강 다리위의 헌병들은 소수이지만 무장 병력이었다. 

당초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은 장도영 총장이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다리 위 헌병들이 자신들을 반겨줄 줄 알았다. 그러나 헌병들은 총을 뽑아든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해병대 장교들은 김윤근 여단장에게 따져 물었다. 김윤근은 “해병대만으로도 혁명을 강행할 것이니 그냥 밀어버리시오”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해병대와 육군 헌병들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헌병 3명과 해병대원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차에서 내린 박정희는 다리 가운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총알이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박정희는 상체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걸었다. 죽기를 각오한 자세였다. 

그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한웅진의 증언에 따르면 이 순간 박정희는 일본말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가 한 말이었다. 나중에 한웅진이 박정희에게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라고 물은 적 있다. 박정희는 “가족들 얼굴이 강물 위에 떠올랐다”고 대답했다. -‘해병대와 5.16’      

육군 헌병대와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던 해병대는 한강다리를 건너 남산의 KBS방송국을 점령했다. 비슷한 시각 6군단 포병단 병력이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이로써 쿠데타 세력은 주요 목표를 모두 달성한 셈이었다. 

박정희는 서울 시청 앞에서 박종규, 차지철 등과 함께 있던 선글라스를 낀 채 사진에 찍혔다. 이 사진은 나중에 쿠데타의 상징처럼 남았다. 박정희의 결기가 장면을 비롯한 정권 핵심부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무너뜨린 순간이었다. 

오전 5시 라디오에서 혁명 공약이 낭독됐다. 이제 쿠데타 세력에게 남아있는 가장 큰 문제는 장도영의 애매한 태도였다. 그의 협조 없이는 골문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골을 넣긴 힘들었다. 

5.16 쿠데타에 대한 정보는 전부터 장도영에게 전달됐다. 그는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까지 알고 있었다. 이날 김종필을 비롯한 8기생 9명이 서울 중구 음식점 충무장에서 모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하자고 결의했다. 이들은 11월 6일 신당동 박정희 소장 집에서 2차 모임을 가졌다. 

군 정보당군은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더구나 거사 하루 전 날 밤 핵심 멤버 가운데 한 명이 정보당국에 체포된 일까지 벌어졌다. 

장도영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반란군을 체포하거나 진압하려고 노력하진 않았다. 그는 이 정보를 덮어두었다. 박정희는 정변 직후 그에게 계엄사령관, 국가최고재건회의의장, 내각수반 등 많은 감투를 씌워주었다. 

미국은 5월 16일 오전 10시 쿠데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반란군으로선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나타나지 않고, 윤보선 대통령은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북한군에게 오판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며 쿠데타 진압을 반대했다. 

장도영은 5월 16일 오후 4시 반 군사혁명위원회 회장직을 수락했다. 그날 밤 윤보선은 각료들의 신변보장을 약속받는 대가로 사실상 쿠데타를 용인했다. 

이로써 대세는 기울어졌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내부 권력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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