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데이
일이 성사되려면 천시(天時)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공수부대 병력이 필요한 박정희에게 하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박치옥이 때마침 공수단장으로 부임했다.
박치옥은 스스로 거사를 치르기 위해 공수단장을 자원했다. 박정희가 움직이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철저히 입단속을 한 탓이었다. 박정희에겐 절묘한 타이밍에 천시가 작용했다.
당시엔 많은 군인들이 너도나도 쿠데타를 꿈꾸고 있었다. 박치옥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전주에서 연대장으로 있으면서 동기생들과 거사에 관한 의견을 나누어 왔다. 그러나 전주에서 병력을 이끌고 서울까지 올라가긴 무리였다.
군사 거사를 위해선 서울 가까이에서 움직일 병력이 필요했다. 공수단장이 그 일에 제격이었다. 더구나 당시엔 공수단이 하나뿐이었다. 박치옥은 그 자리로 옮겨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박치옥은 공수단장을 맡기 위해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줄을 댔다. 다행히 공수단장을 원하는 지휘관이 많지 않아 부임할 수 있었다. 박정희에겐 적시타나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시절 생도였던 5기생 박치옥과 인연을 맺었다.
박치옥이 공수단장에 부임하자 박정희는 그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박치옥을 만난 박정희는 대뜸 속내를 드러냈다.
“동생, 할거야, 안 할 거야!”
할거야란 쿠데타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치옥은 정면으로 맞받았다.
“해야죠. 혁명하려고 공수단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주축입니까?”
이런 큰일을 벌이기엔 박정희 혼자로는 무리다. 거사를 성공시키려면 더 높은 계급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즉각 박치옥의 속마음을 헤아렸다.
“장도영 총장하고 손을 잡았어.”
거짓말이었다. 장도영에게 쿠데타 협조를 구한 것은 사실이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박정희와 장도영의 관계는 군내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장도영은 여러 차례 박정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무관(武官)이었던 그에게 복직의 길을 열어 준 것도 장도영이다.
4.19 이후 군복을 벗을 처지였던 그를 2군 부사령관으로 불러준 이도 다름 아닌 장도영이었다. 그러니 내 뒤에 장도영이 있다는 박정희의 말은 꽤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실제로 박정희는 1961년 4월 10일 거사를 한 달 여 앞둔 시점에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을 찾아갔다. 은밀하게 진행 중이던 거사에 대해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장도영은 기가 막혔다. 지금 박정희가 나에게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는 것 아닌가. 방첩대에 연락해 당장 체포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어쩐 일인지 장도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난 협조할 수 없으니 당장 그만 두시오.”
장도영의 어투는 단호하게 들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묵인이라도 해 주십시오.”
“둘 다 불가하오.”
“저와 젊은 장교들이 각하를 모시겠습니다.”
장도영의 뒤에는 한국군 외에도 주한미군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쿠데타 정도는 단번에 진압할 수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장도영은 가타, 부타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알아서 하시오. 하지만 (내가) 밀고는 하지 않겠소.”
장도영과 손을 잡았다는 박정희의 호언은 공수단장 박치옥을 끌어들이기 위한 거짓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박치옥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장도영과 함께라면 승산이 있다. 박정희 소장만으로는 성공을 장담 못한다. 육군참모총장이 함께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
박치옥은 박정희로부터 김종필을 소개받았다. 둘은 그 자리서 의기투합했지만 나중에 5기생 박치옥과 8기생 김종필은 두고두고 대립하게 된다.
필요한 세력이 또 하나 있었다. 공수단과 함께 거사에 앞장서기엔 해병대가 제격이었다. 실제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 위의 박정희 곁에는 해병대가 호위를 맡고 있었다. 육군 장성인 그가 해병대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해병대와 박정희의 인연은 오래 됐다. 만주군관학교 2기였던 박정희는 평소 1기 김동하(해병대 사단장), 3기 김윤근(해병여단장)과 호형호제하며 가까이 지냈다. 젊은 시절부터 맺어진 인연의 끈이었다.
천운이 따랐는지 마침 김윤근이 거사 3개월 전 해병여단장으로 발령받았다. 해병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박정희는 병력 부족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천시가 박정희를 도우고 있었다.
박정희는 당초 4.19 혁명 1주년이던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 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들은 학생들의 소요로 혼란이 극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를 빌미로 군인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국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이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역 앞 시위 등을 방조한 이유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4월 19일 학생들이 협력(?)을 하지 않았다. 서울은 너무 조용했다. 박정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간 영영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급하게 5월12일을 다시 택일했다. 그 날도 거사를 치르지 못했다.
선봉에 서야할 공수부대가 훈련으로 인해 참여를 할 수 없게 됐다. 차일피일하다가 기밀이 새나가면 큰일이었다. 박정희는 입안의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더 이상 미뤄지면 일이 틀어진다.
삼일 후면 1군 창설기념일이다. 주요 지휘관들이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탈한다. 쿠데타 소식을 접하더라도 당장 어떤 조치를 내리기 힘들다. 그렇다면 거꾸로 거사를 위해 가장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박정희는 다시 그 날을 D-데이로 선택했다. 막상 결정하고 나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기념식에는 장면 총리도 참석할 예정이다. 그 자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들으면 군 지휘소 한 가운데서 진압 명령을 내리게 된다. 상대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셈이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내 절망에 빠졌다. 아, 하늘이 나를 외면하나. 묘수 하나가 퍼뜩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군의 기념식에는 반드시 술 파티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지휘관들이 술에 취해 잠들었을 5월 16일 새벽이 가장 적기가 아니겠나.
6.25가 터지던 새벽에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전날 마신 술로 첫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 바람에 즉각적인 응전에 차질을 빚었다. 그렇다, 5월 16일이야 말로 하늘이 내게 내린 날이다.
날짜는 정해졌다. 이제 어느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울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거사일과 함께 거사 성공을 위한 결정적 요소였다. 박정희의 마음 속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