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박정희는 4년 가까이 진급을 못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 곧 군복을 벗게 된다.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이 박정희의 진급 보증을 서 주었다. 한국전쟁의 영웅인 그에 대한 군 내외의 신망은 꽤 높았다.
덕분에 박정희는 소장으로 진급해 6군단 부군단장에 부임했다. 이후 박정희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옮겼다. 거기서 1960년 4.19 혁명을 맞이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은 자유당 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그 단초는 1956년 제 3대 대통령선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자유당 이승만과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대결한 이 선거는 야당 후보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싱겁게 끝났다. 그래도 신익희 대신 급하게 후보로 나선 조봉암은 예상보다 표를 많이 얻었다. 자유당 정권은 충격을 받았다.
자라보고 놀란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 제 4대 대선을 앞두고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나. 훗날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 불과 95만 표 차이로 신승하자 10월 유신을 단행 국민에 의한 직접 선거를 없애버렸다.
희한하게도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대선을 불과 20일 앞두고 사망했다. 워낙 급박한 탓에 민주당은 새 후보를 낼 수 없었다. 홀로 대선에 나선 이승만의 당선은 사실상 확정이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당시엔 현재의 국무총리 역할을 하던 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았다. 자유당 이기붕과 민주당 장면이 맞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5세의 고령이었다. 장면이 승리하면 대통령 유고시 그가 자리를 승계하게 되어 있었다.
자유당으로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일만은 막아야 했다. 자유당은 온갖 기발한 부정 선거 수법을 동원했다. 대표적 사례는 이런 것들이었다. ①이승만, 이기붕 표를 잔뜩 집어넣은 이른바 투표함 바꿔치기 ②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③여러 명의 사람들을 묶어서 대리 투표하기 ④개표 시 불을 꺼 표를 바꿔치기하는 올빼미 작전 ⑤장면에 투표한 표를 무효표로 만들기 등이었다.
선거 결과 79.19%를 득표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국민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첫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은 그의 주검을 마산 앞 바다에 내다 버렸다. 마산 시내 학생들 사이에 행방불명된 김주열 군을 놓고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마침내 4월 11일 그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 떠오르자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4월 19일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날 하루 경찰의 발포로 인해 100여 명이 사망했다.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맞섰으나 끓어 오른 국민의 분노를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이기붕 일가의 자살과 이승만의 하야로 4.19 혁명은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이 무렵 다시 쿠데타를 꿈꾸고 있었다. 황용주와 이병주 이른바 ‘산바가라스(三羽鳥·일본어로 삼총사라는 의미)’에게 학생들의 의거로 인해 자신의 꿈이 꺾였다고 종종 한탄했다.
실제 박정희의 책사 김종필은 5.16 직후 외신과의 인터뷰서 “이승만 실각 전에 이미 거사를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혔다.
미군이 한국군에 진급 대상자인 박정희에 대한 신분 조회를 한 적 있었다. 답변서에는 ‘좌익’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백선엽의 도움으로 별 두 개까진 어떻게 올라갔으나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스스로도 중장 진급은 꿈도 꾸지 않았다.
조용히 물러나느냐, 총을 드느냐. 결국 이 두 갈래 길이었다. 원로원에 의해 ‘최종 권고’라는 비상조치를 당한 카이사르와 같은 처지였다. 카이사르의 경우 좀 더 급박했다면 박정희에게 가해진 압박은 조금은 느슨했다. 하지만 그대로 있으면 올무에 갇혀 꼼짝 달싹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1961년 4월 19일을 D데이로 잡았다. 거기에는 일반적 예상이 한 몫을 했다. 4.19 혁명 1주년이니 전국이 데모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를 계기로 거사를 일으키자. 혼란을 명분으로 삼으면 된다. 상당히 깊은 안목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이날 별다른 소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김종필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수정했다. 김종필의 꼼꼼하고 치밀한 성품은 이런 일에 딱 제격이었다. 리더인 박정희의 결기가 더해져 쿠데타 모의는 착착 진행됐다.
문제는 역시 병력 동원이었다. 쿠데타는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일이다. 계획은 짤 수 있지만 완성은 하늘에 달렸다. 하지만 천시(天時)를 어찌 헤아리겠나. 결과는 오직 하늘만 알 뿐이었다.
주변 정황은 나쁘지 않았다. 서울 인근에는 김종필의 육사 8기생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6군구 작전참모 박원빈, 6군단 포병 대대장 신윤창,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등등. 5기생 사단장, 연대장들도 수도권에 꽤 많았다.
당초 육군은 16인 하극상 사건의 중심이었던 8기생들을 수도권에서 먼 지역으로 분산시켜 왔다. 하지만 워낙 수가 많은 기수여서 8기생들은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8기생들에겐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거사에 병력을 동원하기엔 계급이 낮았다. 김종필은 군을 떠나있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은 대대장 급이어서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 수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 간극을 메워준 쪽이 선배 기수인 5기생과 해병대 병력이었다.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제 1공수단장 박치옥 등이 5기생이다. 직접 참여를 하지 않았지만 5사단장 채명신, 12사단장 박춘식 등 육사 5기들도 그들 편이었다.
쿠데타 성공의 또 다른 열쇠는 철통 보안이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철저히 점조직 형태를 유지했다. 동원된 부대장 각각은 누가 거사에 참여하는 지 잘 몰랐다. 오로지 박정희를 통해서만 서로 연결 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정변의 정보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새 나갔다. 결국 나중에 큰 문제가 됐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전두환의 12.12 사태 때도 그랬지만 이런 일엔 공수부대가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12.12와 달리 공수부대만큼 위협적인 존재인 해병대의 지지도 필요했다.
해병대와는 연이 닿아 있었다. 해병대 사단장 김동하와는 만주군관학교 시절 인연이 있었다. 문제는 공수부대였다. 해병대 병력만으로는 수적인 열세였다. 공수부대의 도움이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