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당시 박정희는 법적으로 유부남이었다. 첫 부인 김호남은 여전히 호적에 올라있었다. 두 번째 여인 이현란과는 사실혼 관계였다.
김호남과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이현란은 떠났지만 김호남은 여전히 박정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박정희는 충북 옥천에서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있던 한 여인을 만났다.
박정희와 8살 차이나는 처녀였다. 그녀는 여러모로 박정희와 달랐다. 무엇보다 대지주 집안의 딸로 가난한 농민 부부의 늦둥이였던 박정희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박정희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두 사람은 1950년 12월 12일 대구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창 남북이 전쟁을 치르던 상황이었다. 사위를 탐탁찮게 여긴 장인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결혼 직전에야 부인과 이혼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육영수는 박정희의 부인이 됐다. 이듬해 4월 박정희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는 자신의 생애 첫 번째 쿠데타 모의에 참여하게 된다.
이승만은 거창양민학살사건(1951년 2월)에 이어 실시된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의 패배로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로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임시 수도였던 부산을 비롯한 남부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런 다음 자유당 정권은 7월 4일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무기명이 아닌 기립 표결로 개헌안을 밀어붙였다. 개헌안이 국회 문턱을 넘자 1952년 8월 5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승만은 당초 의도대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정권 연장을 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소위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린다.
이승만은 2년 후 자신의 대통령직 3연임을 노리고 또 한 번 개헌을 추진했다. 국회 표결 결과 재적 203명 가운데 찬성은 135표에 그쳤다. 개헌안이 통과되려면 재적 의원의 ⅔인 136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자 자유당은 또 한 번 꼼수를 부렸다. 203명의 ⅔는 135.3333명이다. ⅔이상이니 마땅히 136명이 돼야 한다. 그러나 자유당은 소수점 이하 0.3333을 버리는 이른바 사사오입을 주장해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개헌안 번복 가결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은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정치판의 후진적 행태는 군인들을 자극했다. 박정희와 친했던 소설가 이병주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에 대한 그의 시선은 멸시를 넘어 증오에 가까웠다”고 한다. 육군 작전교육 국장이었던 이용문 준장은 군대를 동원해 이승만을 내쫓은 후 총리에서 물러난 장면에게 정권을 맡긴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다.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인 이용문과 박정희는 배포가 맞았고, 여러 차례 상하관계로 만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면의 거부로 쿠데타 시도는 무산됐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 휴전으로 매듭지어졌다. 민간인과 군인 포함 4백 만 명에 가까운 인명 손실을 낸 비극은 3년 여 만에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 미군은 승리하진 못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유일하게 성공한 전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베트남을 비롯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미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
미국은 이라크(2003~2011년)에서 1조 달러를 군비를 쏟아 부었고 4천 여 명 의 자국 군인을 희생시켰다. 아프간(2001~2021년)에선 군비 2조 7천 억 달러와 2433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황급히 철수했다.
두 전쟁 모두 실패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소위 N0 BOOTS ON GROUND(미 지상군 파병 불허)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는 러시아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었고, 2022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나이 36살 때였다. 지금으로 치면 빠른 승진이었으나 당시엔 전쟁 중이어서 20대에 벌써 별을 달던 시절이었다. 늦은 나이긴 했지만 마침내 모든 군인의 소망인 별을 달았다.
그러나 박정희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남로당 전력이 역시나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1957년 초 그는 소장 진급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군 안팎에선 그의 진급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남로당 전력자라는 이유에서다.
이번에 진급하지 못하면 그는 영영 군문을 떠나야할 처지였다. 군에서 제대하면 쿠데타는 영영 물 건너간다. 일단 옷을 벗으면 군부 내 영향력은 아예 사라진다. 그 때 또 한 번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