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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5. 2022

박정희와 한강 4


첫 번째 한강     


김일성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한국전쟁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당시 소련은 공산권의 맹주였다. 전쟁을 위해선 반드시 스탈린의 재가가 필요했다. 다음 달엔 베이징으로 건너가 마오쩌둥을 면담했다. 

김일성은 7월이면 장마가 시작되는 관계로 6월 말 전쟁을 개시하겠다는 뜻을 마오에게 전달했다. 두 강대국의 동의를 얻은 김일성은 6월초부터 38선 일대에 집중적으로 병력과 화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앞둔 김일성은 승리를 확신했다. 당시 남북한의 당시 군사력 우열은 뚜렷했다. 미국은 이미 1950년 1월 발표된 ‘애치슨라인’을 통해 자신들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미군은 약간의 군사고문단만 남겨 둔 채 모두 떠나갔다.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압도했다. 병력 수는 13만 5천명과 6만 5천명으로 두 배나 됐다. 더구나 북한은 242대의 소련제 T-34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남한엔 한 대도 없었다. 전투기와 폭격기 수도 200-0이었다. 김일성은 특히 남으로 밀고 내려가면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군을 반겨줄 것으로 기대했다. 

마침내 38선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졌다. 인민군은 일요일 새벽 4시 공격을 개시했다. 불과 몇 시간 만인 25일 오전 이미 개성을 거쳐 동두천을 점령했다. 김종필은 새벽 3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대병력이 포천 일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급보를 전해 들었다. 

즉시 장도영 정보국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장도영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병덕은 전날 마신 술로 첫 전화를 받고서 곧 다시 잠들었다고 알려졌다. 

구미에서 전쟁 소식을 접한 박정희는 27일 아침에야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했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빠져 나간 뒤였다. 국방부는 재빨리 서울 포기를 결정했다. 

다음 날인 28일 새벽 한국군에 의해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북한군의 진격을 늦춘다는 미명 아래 자행됐다. 나중에 폭파 책임자였던 최창식 공병감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했다. 정치인이 내린 잘못된 결정에 현장 군인이 책임을 져야 했다. 

육군본부는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옮겨 갔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육본을 떠나 홀로 한강 쪽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무렵 박정희의 처지는 ‘광장’의 이명준을 떠올리게 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박헌영을 따라 월북한 아버지 탓에 당국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공산주의자였던 셋째 형 박상희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했고, 그로인해 고초를 겪은 박정희와 닮았다.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던 관계로 이명준 역시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았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아버지가 있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형의 죽음이후 남로당에 가입한 박정희의 전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명준은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된 후 절망한다. 

그는 남북한 여성과 각각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두 여인과의 사랑 역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북한 여성 은혜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박정희가 사랑했던 여인 이현란 역시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 날 한강에 이르러 박정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이런 갈등을 하지 않았을까. 이 강을 넘어 남으로 내려가나, 아니면 형의 이념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나. 어느 쪽도 그를 기다리거나 반겨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로 가야했다. 

이 무렵 그는 마치 ‘광장’의 이명준처럼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북에서의 그는 동지를 밀고한 배신자에 불과했다. 남에서의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오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육군본부의 한 낱 무관 신세였다.       

한강을 건너 남으로 가면 군 지휘부는 남로당 전력을 가진 그를 조건 없이 받아줄까. 북한과 막 전쟁을 벌이게 된 마당에.         

그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한편 김종필은 내내 박정희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는 과연 이곳에 나타날까. 육본이 1차로 옮겨진 시흥 보병학교에선 박정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난리 통에 그는 어디로 간 걸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혹 북으로 올라간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와는 영영 이별이다. 김종필의 속내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드러냈다. 육본은 시흥에서 급히 수원으로 다시 내려갔다. 이번에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가 북으로 올라갔다고 추정해야 될지 모른다. 

그런데 박정희는 수원의 정보국 입구에 떡하니 선 채 김종필을 맞이했다. 김종필은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남에서 절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박정희가 북으로 갔더라면 한국현대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북쪽 한강 강변에 서서 잠시나마 망설였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결국 남쪽을 택한 것이 그의 인생과 한국 현대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로부터 11년 후 그는 또 한 번 한강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에 그가 가려던 방향은 남쪽이 아닌 북쪽이었다. 

박정희를 반겨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장도영 정보국장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복직을 주선해주었다. 전쟁 중이라 한 명의 군인도 아쉬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일본군 장교 경력에 인민군의 남침을 예견한 박정희인지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의 어깨에서 계급장을 떼어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일으킨 전쟁은 그에게 다시 계급장을 붙여주었다. 작가 유시민은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는 쿠데타를 할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고 ‘나의 한국현대사’에 썼다. 

한국전쟁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8월 21일 대구에도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민군의 남하 속도는 개전 초와 완전히 달라졌다. 9월 15일 미 해병 1개 사단을 포함한 대 병력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261척의 함선과 7만 5천 여 병력이 동원됐다. 

당초 미군은 상륙 조건을 잘 갖춘 군산을 후보지로 생각했으나 총사령관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성공 확률은 떨어지지만 인천에 상륙하게 되면 인민군을 둘로 완전히 갈라놓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보급망을 잃게 된 인민군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북한 측도 상륙작전을 예상했으나 장소를 잘못 판단해 허를 찔렸다. 그들은 동해안 원산이나 군산을 후보지로 여기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한국군과 UN군은 비로소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 무렵 박정희에게 또 하나 특별한 일이 생겼다. 후배의 소개로 한 여인과 맞선을 보았다. 나중에 국모로 불리게 될 운명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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