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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4. 2022

망각의 강 레테 16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죽음은 공평하지만 누구나 멀리하고 싶은 상대다. 어떤 고결함도 죽음을 넘어 지속될 수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도 죽음 앞에선 흔들렸다. 

샤르트르는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 순간을 살다가 청구서가 날아오면 언제든 죽는다”며 죽음에 대해 태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났다. 연약함 속에서 존재를 이어가다 우연히 죽는다”고 했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폐기종으로 죽음에 이르자 평소의 담담함을 잃었다고 한다. 

죽음을 피한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노력의 형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화됐다.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가거나, 신과 동행하는 것이다. 

무소는 코뿔소를 말한다. 집안에서 보면 담장 밖에서 걸어가는 코뿔소는 우뚝한 코 뿔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홀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수행은 코뿔소의 걸음처럼 더디고 힘겹다. 신이 없다고 믿는 순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 갈 수밖에 없다. 그 방식은 느리지만 단단하다. 

종정을 지낸 법전은 한 때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수행했다. 법전은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가 문드러질 때까지 일어나지 않아 얻은 별명이다. 절구통 수좌는 묘적암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했다.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단단히 조치해 두었다. 

생사의 문제를 벗어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 끝장을 내겠다는 결의였다. 수행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잠과 허기다. 이 둘은 참선과 수행의 적이다. 법전은 되도록 밥 짓는 시간조차 아끼려했다. 

미리 밥을 많이 지어놓고 반찬은 오로지 김치 하나만 준비했다. 춥고 배고픈 환경에서 도심(道心)은 피어난다. 한 겨울이었는데 냉기를 면할 정도로만 불을 지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잡념이 생겨나 화두는 멀리 달아난다. 이불하고 베게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두었다.  

누군가 법전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갖고 왔다. 다음을 위해 일부를 남겨 두고 맛있게 먹었다. 허기를 면하자 정진 의욕이 샘 쏟았다. 화두일념에 시간 흐르는 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배고픔을 느꼈다. 

한 쪽에 치워둔 순두부 사발을 열었다. 이런! 파랗게 곰팡이가 핀 상태였다. 한 겨울에 곰팡이가 필 정도면 대체 며칠이나 지났을까. 다시 화두를 들자 금세 성성해졌다. 마침내 눈앞이 환하게 밝아왔다. 

그 길로 스승이나 다름없는 성철을 찾아 갔다. 성철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냐?”고 물었다. 법전이 이리저리 말을 해보고,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으나 성철은 거듭 같은 질문을 던졌다. 

법전은 성큼성큼 방안을 걸으며 “해와 달이 동서를 구분하니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 가더라”며 자신의 수행 결과를 드러내 보였다. 성철은 비로소 법전을 인가해주었다. -서화동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     

생사의 굴레를 벗어던지기란 간단치 않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것이 반드시 불교식의 수행을 의미하진 않는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방식이 있다. 각자의 뿔을 세우고 저마다의 길을 가면 된다. 그 각각은 수행이다. 

수행의 과정은 길고 험하다. 선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선재(禪材)라도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결단과 참구 없이는 저 언덕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황벽은 수행에 방해된다며 어머니마저 외면했다. 

황벽의 어머니는 일찍 홀로 된 후 힘겹게 아들을 키웠다.  어느 날 아들은 공부를 하겠다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얼마 후 아들이 스님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벽산에 있다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아들은 얼굴을 보여주기는커녕 주변에 “물 한 모금 쌀 한 톨 주지 말고 돌려보내라”는 매정한 말만 남겼다.      

번뇌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네

화두를 붙들고 오로지 참구 할 일

뼛속에 스며드는 추위를 알지 않고서야

어찌 매화 향기를 얻겠나  

                       -황벽      

 

황벽의 매화는 그저 피어난 게 아니다.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며 뼛속 추위를 견뎌낸 끝에 비로소 매화 향기를 품었다.

수행의 철저함은 성철에게서 거듭 확인된다. 성철이 죽음을 눈앞에 둔 도반을 찾은 적 있었다. 성철은 대뜸  “(화두가) 여전히 성성하나?”고 물었다.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곧 죽음에 이르게 된 도반에게 ‘그 상태에도 화두는 변함없이 여일(如一) 한지?’를 물어 본 것이다. 스승의 곁은 지키던 도반의 제자들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병문안 왔으면 안부나 물으면 되지 ‘화두가 성성하나?’가 웬 말인가 싶어서다. 아무리 큰 스님들이라지만 너무하지 않느냐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성철의 도반 즉 그들의 스승은 “똑같다”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플 때나 아프지 않을 때나, 평시에나 곧 죽음에 이르게 된 지금이나 화두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의미였다.   

대답을 들은 성철은 더 머물지 않고 물러났다. 두 선승은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 위로를 전했고, 서로에 대해 안심 법문을 주고받았다. 화두가 여전히 성성하니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 

선의 궁극은 1인칭이다. 누구에도 의지하지 않고 토굴이나 선방에 홀로 앉아 정진한다. 누군가 도반이 있다하더라도 궁극엔 서로를 의지할 수 없다. 의지하려는 순간 오히려 도는 달아난다. 깨침은 결국 홀로서기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그 절대 고독에 타인이 끼어들 공간은 없다. 

성철이 임종하면서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도 “너그들, 참선 잘 하그래이”였다. 구도의 길은 이처럼 삼엄하다. 늘 화두에서 벗어나질 않아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점에서 홀로서기란 대중적이지 못하다.  


 주 예수와 동행하라     


그는 모 지방 도시의 유명한 의사였다. 돈도 많이 벌었고 자식도 여럿 두었다. 남부러울 것 없던 그의 삶이 흔들린 것은 병 때문이었다. 내과의사인 그도 암을 피할 순 없었다. 

1980년 대 초 만해도 암의 발병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병세는 악화되어 갔고 하루하루 기력이 쇠약해졌다. 마침내 암이 온 몸으로 퍼져 더 이상 의사들도 손을 놓고 있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한 친구가 자주 문병을 왔다. 고교시절 퍽 친한 사이였으나 서로의 길이 달라지면서 가끔씩 안부나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 친구는 목사였다. 의사인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종교 난엔 늘 무교라고 적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불교를 택했다.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없긴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신실한 불교도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간혹 절에 간 적 있었다.

하지만 일주문 사천왕의 모습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절에 들어서야 하는 이유를 잘 몰랐다. 스님들의 낯선 모습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독경이 친밀감을 방해했다. 

그는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젊은 시절 의사인 그는 환자를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아픈 사람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 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받았다. 희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살려낸 적도 있었다. 

죽음의 낭떠러지에 서 있던 사람을 억지로 건져낸 기분이었다. 그러나 차츰 자신의 일이 결국 환자를 살리기보다 죽음을 늦추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살려낸 환자가 얼마 후, 약간의 시차가 있겠지만, 죽었다는 부고를 어김없이 받았다. 의사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아니다. 죽음을 잠시 유보시키는 것뿐이다.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빨리 죽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레테의 강을 건너는 순간 모든 기억은 망각된다. 하루, 혹은 몇 년을 더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문은 바쁜 일상 속에 묻혀 더 이상 질문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 얼마 더 산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해서 환자 치료를 포기할 순 없다. 굳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나는 환자의 사생활을 존중할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그들의 문제를 세상과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삶과 죽음의 문제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감사해야 하나. 타인의 목숨을 거둬가는 힘이 내 안에 주어진다. 이 놀라운 책임은 한없는 겸손과 나의 약점에 대한 겸허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나는 신을 모독해선 안 된다. 

-히포크라테스     

그는 환자의 죽음을 멈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이제 병실에 누워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의사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을 때 문병 온 목사 친구가 불쑥 이런 말을 건넸다. 

“예수를 영접해 보는 것이 어때?”

예수라는 말도 그에겐 친절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영접이라는 단어는 더욱 생소했다. 일상 대화에선 거의 사장된 언어였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친구의 말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영접이라는 말의 낯섦 때문이었다. 

요즘도 저런 단어를 쓰나? 그는 과학적 증명을 존중하는 의사였다. 그런데 예수는 부활한 사람 아닌가. 출발부터 비과학적이다. 언어란 되도록 널리 사용되는 표준어 가운데서 활용돼야 한다. 영접이라니. 

목사 친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경멸의 의미로 해석했을 지도 모른다. 익숙지 않은 단어에 무조건적으로 얼굴 근육이 반응했을 뿐인데.

그런데도 다음 번 문병에서 친구는 똑같은 말을 했다. 예수를 영접하라는 권유였다. 이번엔 웃지 않았다. 영접이라는 단어도 두 번째 들으니 생소하지 않았다. 의사 친구의 얼굴에서 진지함을 발견한 목사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에 바울이라는 사상가 겸 전도자가 있었어. 그는 한 번도 예수를 만난 적 없었지. 오히려 기독교를 탄압하는 사람이었어. 그가 쓴 로마서는 기독교의 

교과서거든.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의 말이야.”

뜬금없이 바울, 로마서를 왜 얘기하는 거지. 반쯤 열린 의식 가운데 그는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무언가를 확실히 의심할 만큼 명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했어.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이 얼마나 간편한 메시지야? 네가 어떻게 살아 왔든, 예수를 믿었던 믿지 않았던 상관없어. 지금 이 순간부터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말을 하는 친구도 듣는 친구도 놀랐다. 자연과학도로 철저하게 신의 존재를 부인해오던 친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천국에 가는 거지.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의미해. 바울 선생이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잖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라는 말이지. 믿음을 갖는 그 순간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는 거야.”

며칠 후 의사 친구는 죽었다. 임종 순간 가족과 목사 친구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의사 친구의 눈빛이 흐려져 갈 때 목사 친구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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