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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3. 2022

망각의 강 레테 15

나는 자유다   

  

장자는 ‘양생편’에서 무의미한 삶의 연장이나 그것의 부당한 단절 두 가지 모두를 경계했다. 장자는 먼저 생명의 연장을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지 말라며 경책을 날렸다. 그렇다고 삶을 비관하여 굳이 단축하려는 시도 즉 자살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라는 게 장자의 메시지다. 

장자의 양생은 결국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기를 요구한다. 장자의 해법은 ‘영혼의 구도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떠올리게 한다. 크레타 섬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이런 비명이 쓰여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 ‘그리스인 조르바’가 당장이라도 무덤에서 일어나 외칠 것만 같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는 두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두 번 모두 탈락했다. 이를 두고 문예비평가 콜린 윌슨은 “만약 그리스인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수상은 확실했을 것이다”고 꼬집었다.  

카잔차키스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젊은 시절엔 공산주의와 불교에 심취했다. 그로 인해 당시 주류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불교와 공산주의 모두 비주류였다. 그의 소설 ‘최후의 유혹’은 신성 모독을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다. 

그리스 정교에서 파문당한 카잔차키스의 유해는 아테네가 아닌 크레타 섬에 남겨졌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의 무덤은 성당이나 공동묘지에 속하지 못했다. 성채의 보루 위에서 홀로 남겨져 에게 해를 굽어보고 있다. 살아서 차별당한 카잔차키스는 죽어서까지 부정당했다.      

삶에는 밑바닥이 있지만 맨 밑바닥은 없다. 비참함은 처참함으로, 처참함은 다시 참혹함으로 내려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삶 그 자체를 부정당하기에 이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흑인 노예가 남긴 묘비명이다. 그는 고단한 삶의 연속보다 차라리 단절을 더 원했다. 죽음이 삶보다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삶이 얼마나 아팠으면 끝남을 오히려 감사했을까.   

흑인들을 노예로 만든 것은 피부색의 의한 구분이었다. 미국 남부 미주리 주나 미시시피 주 흑인 노예의 삶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주리 주 한니발은 작가 마크 트웨인의 고향이다. 그곳에는 ‘허클베리 핀’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작가의 박물관이 있다. 

트웨인은 젊은 시절 고향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박물관에는 당시 신문들이 보관되어 있다.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려 있다.


‘검둥이 여자 노예. 13세. 튼튼함. 싸게 팔 수 있음.’

‘검둥이 어미에 딸을 덤으로 줍니다. 실한 엉덩이, 어미는 생산 가능.’

‘24세 팔팔한 여자 검둥이. 딸린 아이 둘, 따로 가져가도 되고 함께 사가도  됨.’


흑인이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619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노예 신분이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신대륙을 찾은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한 순간 노예로 전락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목화 수요가 늘어나면서부터다. 농장주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들였다. 덩달아 미국에 와 있던 흑인들마저 이름표 대신 가격표가 붙게 됐다. 

흑인들은 1863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 겨우 노예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렇다고 차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평등하지만 분리돼야 한다(Equal but separate). 흑인을 대하는 백인들의 속마음이다. 

미국의 백인 동네에는 플라이트 레이트(flight rate)라는 게 있다. 해석하자면 도망치는 비율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흑인 한 명이 이사 오면 백인들은 슬슬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흑인의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바로 보따리를 싼다. 플라이트 레이트는 그 비율을 의미한다. 

2000년 초 해마다 대학을 졸업하는 미국의 흑인 수는 100만 명가량이었다. 그나마 1960년 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거세게 흑인 민권 운동을 벌인 결과였다. 매년 교도소에 가는 흑인의 수는 50만~60만 명 내외. 수감자의 수는 흑인 대학생을 훨씬 웃돈다. 

1958년 미시시피 대학에 지원한 클레넌 킹은 강제로 정신 병원에 입원 당했다. 대학에 가려던 이유로 멀쩡한 정신일 리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 전에 흑인이 대학에 진학하겠다니 미친놈일 거라는 판사의 판결이 있었다. 

흑인 노예는 삶보다 죽음을 원했지만 죽음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피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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