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과 양자강(3)

by 성일만


속임수


큰 착각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오만함이 빚어낸 착각이었다.

고대나 중세 전투에서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소는 거리였다. 이전까지 유럽의 전투는 대부분 근접전이었다. 적과의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갑옷은 거리를 무시하도록 강요했다. 맞붙었을 땐 유리하지만 떨어지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비였다.

원정군은 거리를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연합군에겐 낯선 전투 방식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갑옷과 활의 차이였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독일연합군의 무거운 갑옷은 거꾸로 독이 됐다. 800년 전에도 유럽은 같은 방식에 의해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었다.

로마의 멸망 원인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 훈(Hun)족의 침입이었다. 4세기 훈족이 동쪽에서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터전을 내준 게르만족은 이탈리아 반도로 밀고 들어갔다. 일종의 도미노 효과였다.

그곳의 노 제국 로마는 찬란한 대리석 기둥만 남은 상태였다. 게르만족의 거친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유럽의 모든 길을 장악했던 로마는 그렇게 무너졌다. 당시 훈족에겐 놀라운 무기가 있었다.

뛰어난 기동력이었다. 스피드 차이는 양 군 사이에 거리확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훈족은 그 차이를 최대한 이용했다. 로마의 역사가 암비아누스는 훈족에 대해 “움직임이 날렵하고 흩어졌다가는 재빨리 다시 모여 넓은 들판을 휩쓸었다”고 서술했다. 그들에겐 또 아틸라(406?~453)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다.

800년 후 몽골군은 훈족의 장점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몽골군은 특화된 기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광활한 도로 위에서 페라리와의 속도 경쟁은 무의미하다. 또한 그들에겐 리더 칭기즈칸(1162~1227)이 있었다.

칭기즈칸의 많은 장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함이었다. 그는 약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어주었다. 탐욕스런 여타 유목민 족장들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공정한 분배는 유목민 전사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내 것을 가지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최대한 능력을 발휘한다.


칭기즈칸에겐 세계전쟁사에 남은 독특한 전술이 있었다. 몽골군이 전투대형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적과의 거리였다.

8백 년 전 훈족이 처음으로 유럽 기사들을 맞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거리 면에서 월등한 몽골군의 활은 상대와 200m 거리를 유지할 때 가장 높은 승률을 보였다.

화살 공세로 상대를 흩어지게 한 후 각개 격파했다. 강력한 공중 폭탄세례를 퍼붓고 난 다음 지상군을 보내 점령해가는 현대 미군의 방식이다. 상대가 강할 때는 거짓 퇴각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세한 기동력 때문이었다. ‘신의 군대’ 임을 자처한 유럽 기사들은 거짓 전술을 수치로 여겼다.

1차 공격에서 기동성을 발휘해 적을 분산시킨 다음 살라미 전술로 쪼개서 각각 사지로 몰아넣었다. 중무장한 유럽의 기사들로서는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1대1 대결에서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기병의 중무장은 기동성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몽골군의 전술은 현대전서도 유용함을 입증했다. 2차 대전서 맹위를 떨친 독일 기갑부대는 몽골군의 전술을 전범으로 삼았다. 몽골군은 이 방식을 사냥이라는 실전 연습을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사냥훈련의 백미는 선택된 장소로 사냥감을 몰고 가는 일이었다. 정작 사냥은 무의미한 살육일 뿐이다. 발슈타트에서 몽골군은 사냥몰이 방식으로 독일연합군을 처단했다.

몽골군은 전통적으로 3군단 방식을 선호했다. 좌군과 우군이 긴 원호를 그리며 나아가고 그 뒤를 중앙군이 일직선으로 진군했다. 하나의 기둥과 두 개의 날개 안에 사냥감을 가두려는 전략이었다.

1241년 4월 4일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골의 3군단이 다뉴브 강변에 집결했다. 몽골군은 그곳에서 헝가리 군과 마주쳤다. 헝가리(Hungary)는 훈(Hun)족의 후예다. 8백 년 전 그곳으로 왔던 유목민들이었다.

헝가리 군은 유럽 최강 군대의 하나였다. 병력의 수는 독일연합군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일단 사냥전술에 휘말리고 나면 수적 우세는 무의미해진다. 몽골군의 전술은 독일연합군을 상대 할 때와 동일했다.

헝가리의 벨라 4세는 멀찍이서 몽골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몽골군은 전투를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자신이 지휘하는 헝가리 대군을 보고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한 번쯤 왜 저럴까 의심해봤어야 했다.

최강이라는 군대가 왜 저럴까. 이런 의심 대신 얕은 생각이 그의 뇌를 지배했다. 모두가 저들에게 패했다지만 나만은 이길 수 있어.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 우쭐함만큼 위험한 함정은 없다. 몽골군의 후퇴와 헝가리 군의 추격은 6일간 이어졌다. 헝가리 군이 살아서 돌아갈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4월 10일 사조강변에 이른 몽골군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후퇴만 하던 몽골군이 거꾸로 싸움을 걸어왔다.

거짓 후퇴로 적을 유인한 다음 미리 점찍어둔 장소에서 공격하는 바로 그 방식이었다. 후퇴는 사냥꾼이 사냥감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기 위한 유인전술이었다. 몽골군에겐 연습을 통해 익숙해진 사냥방식이다.

헝가리군은 궤멸 당했다. 사망자 수는 무려 7만에 이르렀다. 벨라 4세는 지중해의 한 섬으로 달아났다. 교만이 가져다 준 참담한 몰락이었다. 속임수가 유목민들의 가장 즐겨 전술인줄 까마득히 몰랐다.

손자의 정의에 의하면 ‘전쟁은 상대를 속이는 행위(兵者詭道)’ 이다. 궤(詭)는 속임수를 말한다. 그가 쓴 손자병법은 지금도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의 교범으로 사용된다.

헝가리의 아름다운 도시 부다와 페스트가 몽골군에 의해 짓밟혔다. 몽골군은 벨라 4세를 집요하게 추격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군의 진격을 막아낼 유럽의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까지 이르렀다. 빈이 무너지면 독일과 프랑스까지 위험했다. 유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모든 성당에는 기도소리가 넘쳐 났다. 서유럽이 몰락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들을 구해낸 것은 신(神)이 아니었다. 머나먼 동쪽에서 날아온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서유럽이 몽골의 속국이 됐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클래식음악은 곧 동양음악을 일컫고, 서양화는 회화의 한 장르에 불과할 것이다. 동양적인 것이 세계의 표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위기의 유럽을 구한 것은 칭기즈칸의 아들 우구데이 칸의 사망 소식이었다. 몽골군에게 즉시 귀환명령이 떨어졌다. 유럽을 집어삼키려던 태풍은 일시에 멈춰 섰다.

그 순간부터 몽골제국에는 격동의 역사 드라마가 펼쳐졌다. 칭기즈칸에서 쿠빌라이로 이어지는 권력 승계 과정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드라마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칭기즈칸의 생애를 우선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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