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성
1997년 미국의 경제잡지 포춘지는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500대 기업 CEO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한 세기가 저무는 동시에 천 년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었다.
‘지난 천 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리더는 누구였을까?’
천 년의 시간이 마감되고 있었다. 가장 세속적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지난 천 년 호모사피엔스 무대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그로부터 3년 후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21세기를 맞아 새 해 표지로 ‘천 년의 인물’을 선정했다. 놀랍게도 동일한 인물이었다. 기업의 CEO들과 시사 잡지가 선정한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같은 인물을 지목했다.
기업가들과 타임지 선정위원들은 결이 다르다. 한 쪽은 철저히 경제 논리와 시장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다른 한 쪽은 역사와 철학, 예술 등 인문학적 접근방식으로 살아온 인물들. 그들 사이 일치점을 찾기란 간단치 않다.
그런데 왜 딱 한 사람에 꽂혔을까. 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지구라는 별을 다녀갔다. 그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한 인물을 뽑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직업에 따라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딱 한 인물에 꽂혔을까.
대체 그는 누구일까.
폴란드에 발슈타트(Walstatt)라는 곳이 있다. ‘전쟁터’라는 의미를 지닌 ‘선택된 장소’였다. 원래 독일 땅이었지만 2차 대전 패전으로 폴란드에 넘겨줬다. 1241년 이곳에서 원정군과 홈팀 유럽의 독일연합군이 역사적 대결전을 벌였다.
이를테면 챔피언끼리 맞붙은 셈이다. 독일연합군은 당대 유럽 최강의 군대였다. 이에 맞선 원정군은 아득히 먼 곳에서 왔다. 그들은 장장 6500㎞를 이동했다. 현대의 미 보병도 따라올 수 없는 거리다.
독일연합군은 중무장한 3만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됐다, 상대는 2만이었다. 독일연합군은 두터운 갑옷을 철갑처럼 두르고 있었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그들의 신체를 훼손시킬 수 없었다.
상대는 거친 동물 가죽과 초라한 나무 활로 무장했다. 문명과 야만의 대결처럼 보였다. 더구나 중세 유럽의 기사들은 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상대의 빈약한 화살이 뚫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신체조건도 꽤 차이 났다. 독일군이 월등 컸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벌어졌다. 독일연합군이 패했다. 이 소식은 온 유럽에 전해졌다.
유럽 전체가 금세 공포에 휩싸였다.
유럽 챔피언은 게르만족이었다. 같은 유럽 인종 가운데도 큰 편에 속했다. 유럽 내 라틴 민족과 비교해도 머리의 절반은 더 컸다. 중세의 전투에서 체격조건은 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좌우했다.
고대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처음 보는 게르만 병사의 큰 덩치에 겁을 집어먹었다. 독일연합군을 상대하는 원정군은 로마군보다 더 작았다. 그런데도 무슨 연유인지 그들은 게르만 병사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온 6,500㎞의 거리는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군사작전으로 남아있다. 전차도 없는 13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는 그들의 간편성(simplicity)에서 답을 찾아냈다.
그들에겐 따로 보급부대가 없었다. 그만큼 행군 속도가 빨랐다. 또한 모두 유목민이었다. 전원 기병이 가능했다. 때로는 하루에 100㎞를 주파했다. 하트에 따르면 이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기갑부대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간편성만으로 이런 일들이 모두 설명되어 질 순 없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유목민 특유의 끈질긴 생존력과 그들을 하나로 뭉치도록 만든 뛰어난 리더십, 모든 병사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준 전리품 분배, 하나의 목표로 일치된 군사들의 높은 사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유목민족들을 연구해온 토마스 J 바필드는 그의 저서 ‘위험한 변경’에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 기마유목민족들은 가장 발달된 정착문명인 중국과 인접하여 살면서도 중국적 문화와 이념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경멸했다. 천막에서 나서 초원에서 죽었다. 그들은 전쟁과 모험을 동경하는 자신들의 유목적 삶이 정주민들보다 더 행복한 것이라고 자부했다. 유목 군사력이 정주 군사력보다 우세한 이유다.”
발슈타트의 낮은 구릉지에 도착한 독일연합군은 멀찍이 떨어진 원정군을 발견했다. 하지만 원정군이 그곳을 전투 장소로 미리 점찍어 두고 자신들을 기다렸다는 비극적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원정군은 ‘선택’된 그 장소에 ‘사냥감을 잡을 덫’을 놓아두고 있었다.
독일연합군은 진작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들의 잔인성과 가공할 전투력은 유럽을 떨게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원정군을 태운 말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돼. 순간 독일연합군은 결정적 오판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