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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11.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6

몽골식 결혼식     

 

이제 소년은 몽골 고원의 성인이 되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친지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치렀다. 몽골식 결혼의 하이라이트는 친구들의 방해를 뚫고 신부가 숨은 텐트를 찾아가는 의식이다. 그녀에게서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는 몽골 황제의 혈통이 나왔다. 

당시 몽골족은 모두 합쳐 100만에 불과했다. 중국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북쪽의 금(金)과 남쪽의 송(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각 5천 만의 인구를 가진 대국들이었다. 

금은 몽골을 머리에 이고 지냈다. 신발 속에 끼어든 돌멩이처럼 성가신 존재였다. 대국은 유목민 부족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몽골족의 분열을 유도했다. 디바이드 앤드 룰(DEVIDE AND RULE)은 고금에 상관없이 큰 나라가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상대가 분열될수록 다루기에 편하다. 단합된 몽골족은 골칫거리였다. 한 부족의 힘이 세어지면 다른 부족을 부추겨서 견제했다. 금은 약소국을 다루는 자신들의 방식을 ‘감정(減丁) 정책’이라 불렀다. 

쉽게 말해 으르고 달래기 방식이었다. 금 세종은 3년에 한 번 꼴로 대규모 군대를 보내 몽골을 짓밟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포로로 데려왔다. 저항의 싹을 허용하지 않았다. 테무친의 친척도 ‘감정 정책’으로 희생됐다. 

‘감정정책’은 꽤 효과적이었다. 호되게 경을 친 다음엔 조금씩 당근을 주어 상대를 길들였다. 당근에 맛을 들이면 좀처럼 대들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금은 몽골족을 여러 부족 국가로 나누어 지내도록 유도했다. 

몽골족 가운데 메르키트 족은 제법 큰 세력이었다. 그들은 테무친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 그들과는  테무친의 아버지 때부터의 해묵은 원한이 있었다. 

그러니 메르키트 족에게 테무친의 성장은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 놓아야 했다. 메르키트 족은 테무친 부족을 밟아버리기로 작정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기습이었다. 어둠을 틈타 아무런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부족을 급습했다. 


테무친은 재빨리 달아났다. 부인 부르테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기습을 당했을 때 남자들부터 달아나는 것은 몽골족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부르테를 두고 가면 추격자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정주사회라면 이를 치욕으로 여겼을 것이다. 정주사회에선 때로 체면이나 명분이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무게를 지녔다. 뻔히 아는 이웃끼리 체면(體面)이 손상되면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사는 유목민은 달랐다. 

정주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유학은 더욱 체면을 중시했다. 조나라 성안군의 예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신의 20만 대군이 조나라를 치려하자 곧 위태로워졌다. 유학자인 성안군은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했다. 그들 가운데 용감한 장수 이좌거가 있었다. 

이좌거는 “적군이 비록 수에서 앞서지만 천리 길을 행군해오느라 지쳐있습니다. 저에게 3만의 병력을 주면 험한 지형에 매복해 있다가 적을 물리치겠습니다”고 호언했다.  

충직한 신하였다. 그런데 성안군은 엉뚱하게도 이좌거의 호기로운 제안을 거절했다. 매복이라면 속임수를 쓰자는 건대 유학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성안군은 “그 일로 필시 이웃 제후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며 고개를 저었다. 성안군은 당당하게 싸우기를 원했다.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한신과 다투었으나 곧 전사했다. 

좀 더 허무한 경우도 있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에 양공이라는 군주가 있었다. 송과 초(楚)는 앙숙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마침 초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송나라 신하 목이가 때 맞춰 기습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공은 “선비답지 못하다”며 거절했다. 

초나라 군대가 모두 강을 건너 온 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목이가 거듭 공격을 호소했다. 양공은 같은 이유로 물리쳤다. 양공은 채비를 다 갖춘 적과 싸우다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양공을 일러 송양지인(宋襄之仁)라 비웃었다. 어질다고 다 칭찬 받을 일은 아니다.     

 

유목민의 방식은 그들과 달랐다. 체면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다. 아내를 내버려 두고 달아난 테무친은 부르칸 칼둔산의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신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영산(靈山)이다. 몽골 고원을 흐르는 세 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몽골족이 가장 신성시하는 장소였다. 

부르칸 칼둔의 품에 안긴 테무친은 비로소 안심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다. 이제 그는 엄중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당장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쨌든 살아남아 힘을 기른 다음 훗날을 도모하자’였다. 

싸우기엔 적이 너무 강했다. 아내를 포기하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면 살아남을 수 있다. 유목민은 본능적으로 사는 길을 안다. 그 길에선 큰 번영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도 살아남는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예기치 못한 확산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진다. 10대의 족장에겐 간단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테무친은 어떻게 결정했을까. 적과 싸우기로 했다. 나중에 테무친은 부하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두려우면 실행하지 마라. 실행을 하면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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