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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10.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5

어린 탈주자      


몽골의 관습상 벡테르는 과부인 후엘룬의 남편이 될 수 있었다. 다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후엘룬은 아직 젊었으나 딸린 식구가 많아 거두어주는 남자가 없었다. 

문제는 타이치우드 족이었다. 그들은 테무친의 보호자였다.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침 살인사건은 테무친을 제거할 좋은 핑계거리였다. 

테무친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의 손에 붙잡혔다. 나중에 천하를 호령할 영웅이었지만 아직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테무친을 붙잡은 무리는 돌아가던 중 밤에 술판을 벌였다. 상대가 어린 테무친이기에 경계는 느슨했다. 그 틈을 타 탈출했다. 타이츠우드 족 전사들이 즉시 추격해 왔다. 이번에 잡히면 당장 죽이려 할지도 몰랐다. 

적들이 바짝 접근하자 다급해진 테무친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수풀 사이로 머리만 내민 채 적들의 동향을 살폈다. 우연히 그들 중 한 전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소리치면 꼼짝없이 붙잡혀 죽게 될 것이다. 


무슨 상스러운 징조가 있었을까. 물속의 테무친을 발견한 전사는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죽을 고비 한 번을 넘겼다. 이 상황에선 되도록 멀리 달아나야 옳았다. 그런데 이후 테무친의 행동은 엉뚱했다. 달아나기는커녕 도리어 적진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다음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모닥불 사이로 낮에 자신을 구해준 전사를 발견했다. 테무친은 그의 텐트를 확인한 후 몰래 숨어 들어갔다. 목숨을 건 소년의 놀라운 도박이었다. 어차피 초원에서 말(馬) 없이 혼자서 가족에게 살아 돌아가긴 불가능했다. 

 ‘어쩌면 저 사람은 또 한 번 나를 살려줄지 모른다.’ 

놀란 쪽은 오히려 그를 살려준 타이치우드 전사였다. 

 ‘하, 저렇게 배짱 좋은 놈이 다 있구나!’ 

놀라운 일은 한 번 더 벌어졌다. 전사는 테무친에게 말과 음식, 화살을 건네주었다. 몽골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품들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로 테무친을 살려주었을까. 그 순간 자신의 행동이 나중에 세계사를 바꾸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테무친은 말을 타고 가족들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그들은 아직 살아있었다. 살아있다고 다 산 목숨은 아니었다. 테무친 가족에게 남아있는 가축은 고작 말 8마리뿐이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대 부족으로부터 도망을 다녀야하는 신세였다. 

그나마 말 8마리가 있어 다행이었다. 초원에서 말이 없는 유목민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 낙타 없이 버려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미처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쳤다. 타이치우드 족이 그들의 말을 훔쳐 가버렸다. 말은 가족의 전 재산이자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테무친은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을 바엔 싸우다 죽는 게 낫다.  

몽골족과 말은 운명처럼 묶여 있다. 그들은 말과 영혼을 교류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말은 작으나 지구력이 뛰어났다. 13세기 유럽 원정에 나섰을 때 몽골 전사들은 각자 네 마리의 말을 몰고 다녔다. 말이 지치면 재빨리 갈아탔다. 때때로 말 위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말안장 밑에 육포를 넣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먹었다. 달리는 동안 씹기 편하게 물러져 있었다. 병사들은 항상 말린 고기를 지참했고, 사냥과 약탈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몽골군이 병참부대를 따로 두지 않은 이유다. 훗날 나폴레옹은 몽골군의 이런 특징을 잘 활용했다.  

몽골 말은 추위에 강한 반면 더위에는 약했다. 나중에 몽골이 양자강 남쪽의 무더운 남송에서 고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면 말의 목 정맥을 따서 피를 빼 마셨다. 그러니 낙타 없이도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칭기즈칸과 말에 얽힌 일화는 꽤 많이 전해진다. 그 중 하나가 ‘화살 촉’ 제베와 흰색 코 말 얘기다. 제베는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제베 노욘을 말한다. 유럽에는 공포였지만 칭기즈칸에게는 충직한 부하였다. 

제베 노욘은 칭기즈칸의 ‘네 마리 개’로 불린 장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칭기즈칸의 전략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 장수였다. 몽골군의 기본 전술 즉 ‘치고 빠지기’의 달인이었다. 자신들의 장점인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았다.  

원래 제베 노욘은 포로로 잡혀온 소년이었다. 그는 칭기즈칸에게 좋은 말을 주면 수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칸은 그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흰색 코를 가진 멋진 말을 선물했다. 

소년은 말에 올라타자마자 그대로 달아났다. 칭기즈칸은 부하들에게 그를 쫓지 말라고 명했다. 굳이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다. 소년은 제 발로 다시 칭기즈칸에게 돌아왔다. 

훗날 중앙아시아 서요(흑 거란)를 정복하러 가는 길에 제베 노욘은 천산산맥을 넘으면서 흰색 코 말떼를 만났다. 그는 천 마리의 흰색 코 말을 잡아 칭기즈칸에게 선물로 보냈다. 칭기즈칸만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말을 찾아 나선 테무친은 한 소년을 만났다. 평생을 친구이자 전우로 함께 지내게 되는 보르추였다. 소년은 처음 보는 테무친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호감의 표시였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말을 훔친 자들을 함께 찾아 나섰다.  

그들은 적진으로 숨어들어가 몰래 말을 빼내왔다. 타이치우드 족의 추격을 따돌리고 무사히 보르추의 집으로 돌아왔다. 테무친은 고마움의 표시로 보르추에게 네 마리의 말을 선물하려 했다. 보르추는 받지 않았다. 

이 일 이후 소년 테무친의 마음에 하나의 원칙이 생겨났다. 적과 친구의 구분이었다. 훗날 칭기즈칸은 자신의 편에 선 사람들에게 한 없이 관대했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 저항하는 자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대신 항복한 적과는 함께 번영을 누렸다.  

17세가 되던 해 마침내 테무친은 약혼녀를 찾아 나섰다. 벌써 10년 가까이 훌쩍 지나갔다. 그녀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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