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나 Aug 24. 2024

2. 욕망 숨기기 : 슬기로운 페미생활

남미새 페미의 섹슈얼리티 탐구 칼럼 #2



몇년 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평생 해오던 다이어트를 관두고 긴 머리를 잘랐다.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사회적 여성성’을 거부하며, 여성혐오적인 사회를 비판했다.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러 이슈로 남성 애인과 헤어졌고, 일부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불매하겠다며 4B(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 실천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오랫동안 만나온 남성 애인이 있었다. 당시 내 남자친구의 존재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가족들은 여자답게 꾸미지 않는 내가 연애할 리 없다고 생각했고, 퀴어 프렌들리한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나를 퀴어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굳이 이성애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들에게 별로 알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 연애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정체화와 탈코르셋 실천과 비건 지향, 모두 연애를 하는 중에 시작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 생각과 행동을 지지해주고 멋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여성만이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며 ‘레즈비어니즘’을 실천하는 친구들에게 나의 헤테로 연애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우습고 한심해 보일지 걱정하면서도, 나는 퇴근 후에 그가 만들어준 채식 볶음밥과 해쉬브라운을 먹으면서 평안을 찾았다. 그렇지만 그 평안이란 애인과 나 둘 뿐인 세상에서만 유효했고, 차별이 가득한 세상으로 나오면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는 나는 여전히 분열된 채로 존재했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아동 성폭력의 피해자였고, 오랜 우울과 불안을 앓았으며, 한때 지독한 다이어트와 꾸밈 압박으로 식이장애와 피부질환을 얻었다. 이미 취약한 상태인 여성이 자신이 속한 폭력적인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의 안온한 세계 속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구조적으로 여성을 더욱 취약하고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일 수 있다. 가부장제가 공고한 세상에서 여성이 남성을 만나 섹스를 하고 사랑하는 것, 동거나 결혼을 꿈꾸는 것 모두가 여성의 권리를 저해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가임기의 몸’으로 남성과 섹스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번거로운가. 100% 피임은 불가능한 데다가 피임 실패를 알았을 때 배란주기를 가늠하고 병원에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먹으면서 부작용을 온몸으로 부담하고 생리가 늦어지면 불안한 마음에 임신 테스트를 하고 그 과정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자책과 낙인을 견디면서 전전긍긍 해야 하는 쪽은 여성이다. 임신 가능 여부와 무관하게, 여성은 성병과 폭력 등 물리적인 리스크뿐 아니라 평판이나 불법촬영 범죄 등 사회적인 리스크까지 모두 짊어진다.


삽입섹스를 원하는 쪽은 대체로 남성기를 가진 쪽이고, 남성의 사정 횟수로 섹스의 횟수를 카운팅하는 것은 이성애 섹스의 구성 자체가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사정을 위해 이용되는 식의 ‘남성향’ 섹스가 이성애 포르노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고, 현실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섹스가 평등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아직도 남성의 성 경험은 ‘영웅담’이 되고, 여성의 성 경험은 ‘부끄럽고 더러운 일’이 되는 세상이니 ‘걸레’라는 멸칭이 건재하고 ‘퐁퐁남’ 같은 새로운 멸칭도 생겨난다.


나는 운이 좋게도, 나의 안전과 쾌락을 최우선으로 두고 섹스할 줄 아는 남성 애인을 만났다. 그런데 페미니스트가 되고 나서 이런 섹스를 하는 남성이 흔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면 알수록, 이렇게 안전하고 즐거운 섹스를 할 수 있는 관계를 다시는 찾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해졌고 그와 헤어지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럴수록 죄책감과 부채감은 심해졌다.


남들은 탈가부장제를 위해 탈혼(이혼)도 하는데, 난 내 개인적 행복을 위해 남자친구 하나 못 잃고... 이건 여성 인권의 후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기혼 페미니스트는? 남자 페미니스트는? 왜 미혼 여성 페미니스트들만 갑자기 남자를 잃어야 하지? 대체 얼마나 많은 여성이 남성을 불매해야 성평등한 세상이 오는 거지? (성욕이 왕성한) 헤테로(또는 바이, 팬섹슈얼…) 여성들이 남성과 안전하고 행복하게 섹스할 권리를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 걸까?


여러 복잡한 고민 안에서 모순을 느끼면서, 나 자신을 계속 검열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를 많이 비판하며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남성을 잃지 못하는 페미니스트’를 비판해봤자 여성해방이 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사실 페미니즘 리부트 전에도 여성의 ‘성’은 언제나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내면에 사는 유교걸의 영향과 ‘싸 보이기 싫다’는 여성혐오적인 검열 때문에 나의 성적 욕망을 숨겨야 했다. 남성이 나를 원할 때 거절하거나 승낙하는 위치에서만 나의 ‘욕망’을 아주 제한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남성을 불매하는 여성’만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 여성이 그 누구를 욕망하고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더라도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그만 검열하고,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길 바란다. 여성의 욕망을 긍정하고 섹슈얼리티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다양한 여성을 위한 다양한 페미니즘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남미새’를 위한 페미니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남미새 페미' 2편 끝

매거진의 이전글 1. 조각난 욕망 : 페미와 남미새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