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욕망의 근원 : 내 빻은 섹슈얼리티의 뿌리
남미새 페미의 섹슈얼리티 탐구 칼럼 #6
[경고] 성적인 묘사가 일부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사실 너와 섹스하고 싶어, 라는 말 아닐까? 만약 ‘오늘 하루만 섹스하고 싶어'의 뜻으로 사랑을 말하면 가벼운 사람이 되고, ‘당분간 너랑도 섹스하고 싶어'로 말하면 바람둥이가 된다. 그런데 ‘일정한 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너랑만 섹스하고 싶어'가 되면 조금 로맨틱하게 느껴지고, ‘평생 너랑만 섹스하고 싶어'의 뜻이라면 이제 찐사랑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이 생각은 이성애자 남성을 모두 ‘섹친자'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포함한다. 로맨스를 느끼는 건 어렵지만 '섹스하고싶다'는 욕망은 너무 선명하니까,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는 섹스를 싫어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동시에 사랑과 섹스를 모두 조금씩 불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 삶에서 남성은 언제든 나를 다치게 할 수 있고, 마음대로 만지려고 하며, 내 기분이나 거절은 무시하고, 나와 섹스하고 싶어하는데, 가까이 하면 혼나기까지 하니까 어떻게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선을 넘고 싶었다. 나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나 역시 적극적으로 그들을 욕망하고 싶었다. 남성을 무서워하고 불신하는 동시에, 그들이 나를 욕망한다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남성의 폭력성이 정말 싫지만, 가끔은 폭력적인 모습에 성적으로 더 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고백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남성들은 쉽게 상상할 수 없으리라) 나를 존중하고 자유롭게 두면 좋겠는데, 또 나를 너무 욕망해서 강하게 통제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렇게 모순적이고 빻은 (PC하지 않은*) 내 욕망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12살 겨울방학 때 방학숙제를 위해 인터넷으로 각 나라의 전통의상을 검색하던 중 인생 첫 '야한 사진'을 마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떤 블로그에서 외국 여성의 ‘섹시한' 전통의상 코스프레 사진을 올린 것이었다.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여성들이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거나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나는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동시에 계속해서 그런 사진을 보고 싶어졌다. 이후 숙제를 한다면서 방문을 닫고 인터넷으로 야한 사진을 찾아보는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야한 동영상을 보게 되었고, 어떻게 자위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블로그나 카페에 야동이나 불법촬영물 같은 게 검열 없이 올라오고, 성인 인증 없이 쉽게 볼 수 있던 ‘야만의 시대’였다.
그렇게 야한 것들을 보고 자위를 하고 난 다음에는 항상 극심한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자위를 하고 나서 인터넷 기록을 지우고 컴퓨터를 끌 때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일상 속에서 어른들이 요구하는 규범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는 '나'와 거짓말을 치고 야한 것을 보며 자위하는 '나'는 내 안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이 둘은 한 몸을 공유하지만, 후자의 나는 절대로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성적 욕망을 가진 나는 더럽고, 여성스럽지 못하고, 사랑받을만하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빻은 포르노들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욕망당하는 상상을 하고 흥분을 했다. 나는 원하지 않는데, 나를 너무나도 원해서 미쳐버린 상대에게 강렬하게 당하는 상상 같은 것. 이는 보통의 여자애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상상이라는 것을 초등학생인 나는 이미 알았다. 가부장제도 페미니즘도 몰랐지만, 그런 상상이 나의 지위를 추락시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성이 '성적 욕망'을 가지는 것 자체로 취약해질 수 있다는 문제. 그리고 사실 '욕망당하는 것'은 내가 아무리 원해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당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문제.
나는 나를 욕망하는 상대에게 '어떤 포르노를 보냐'고 물어보곤 한다. '네가 본 최초의 포르노가 기억나냐'고 묻기도 하고, '어떤 장르/이야기/특징을 가진 포르노를 좋아하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 사람이 본 포르노를 알면 그 사람의 섹슈얼 판타지를 알 수 있다. 여자가 오르가즘을 느낄 때 분수처럼 물을 뿜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도 있고, BDSM이나 야외 플레이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대체로 포르노를 통해 학습된다. 섹슈얼한 행위에 대한 여러 기대와 상상력은 화면 너머 만나온 구체적인 장면들과 연결되어있으니까.
여성 대상화가 디폴트인 남성중심적인 포르노 세계에서, 여성은 자신의 신체를 대상화하면서 흥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처음으로 흥분시킨 것도 여성의 대상화된 모습이었고, 많은 여성들이 남성의 몸이 아닌 여성의 몸을 보며 흥분한다. 실제로는 헤테로 섹스를 한다고 해도 말이다. 많은 여성이 여성의 몸은 섹시하게 느껴지지만, 남성의 몸은 섹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성과 섹스하고 있는 거다. 여성향 포르노라고 해도, 남성의 외모가 조금 나아지는 거지 ‘야하게' 느껴지지 않고, 여성의 외모가 덜 아름다워지거나 ‘덜 야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대상화되지 않는 포르노를 찾는 것은 아주 어려울 뿐더러, 그걸 ‘야하다’고 느낄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실제로 내가 12살에 처음 마주한 포르노는 30살이 넘은 지금까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후로 수많은 포르노를 보고, 자위를 하고, 실제로 연애와 섹스를 경험한 다음에도 말이다. 그 사이에 내 몸을 혐오하면서 식이장애를 겪고, 퀴어 정체성을 깨닫고,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탈코르셋을 하고, 그러고 나서도 이성애 섹스를 잃지 못하며 또다시 내 몸을 혐오하게 되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나의 빻은 욕망과 부끄러움,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압박과 더 PC해야 한다는 검열, 그리고 교제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유성애(특히 이성애) 전시를 하는 게 맞는가 하는 문제 사이에서 계속 갈팡질팡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내 안의 모순과 빻음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게, 나와 여성들이 '더 나은 연애 관계'를 경험하고, '더 나은 섹스'를 누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남미새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며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 떠들고 나대면서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겠다.
‘남미새 페미’ 6편 끝
*PC =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