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상승하면 세상이 쉽다?

가슴이 몽글몽글, 치열함 가운데서도 이겨내는 힘.

by 이태영

바로 전 글에, 인류애가 상승하면 세상이 쉽다 했다.

사실 살다 보면 인류애 박살의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역시, 아직 세상은 참 살만하다.

이 고백의 시작은 내가 첫째 아기 임신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살면서 그 수많은 이들의 친절과 다정함이 없었다면, 오늘까지의 내가 어찌 살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 때부터, 현재 육아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아주 국민들의 다양한 모양의 친절함 속에 살아가며, 인류애가 나날이 상승 중이다.


성경 속 모세의 기적을 보았는가?

배 속에 아기가 생겨 나의 배가 무겁게 불러오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배가 불러온 것처럼 반응해 주셨다.

어디든 나타나면 많은 분들이 홍해를 가르듯 길을 터 주셨고, 길을 걷다 배가 무겁고 허리가 아파, 힘들어 헉헉대면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물어봐 주셨다.

그렇게 임신 기간, 지인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진~~~~~~~~짜 정이 많아. 알고 있었어?"

유독 임산부에게만 친절한가 했는데, 아기를 낳고 유모차를 끌고 길을 걸을 때면 다들 꼭 한 마디씩 건네주었다. (결혼 전에도 다들 친절하셨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서, 가끔 얼떨떨할 때도 있다.)


그 뱃속에 있던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같이 길을 가면, 꼭 어르신들이 용돈도 쥐어주시고 어떤 젊은 커플들은 따라와서 아가들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나 아가들을 예뻐해 준다.


감독으로서 작품을 진행하던 어느 날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첫째 유민이가 그 당시 두 돌 전이었나? 아주 많이 어렸다.

작품 관련해서 관계자 분과 계속 전화 통화로 회의하고 일해야 하는데, 육아도 동시에 해야 해서 정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이어폰으로 통화하고 있는데 카트 위의 유민이는 마트가 너무 신기한 거다.

본인이 좋아하는 까까랑 만화 캐릭터들이 너무나 예쁜 포장지를 하고 여러 개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으니 올 때마다 얼마나 신기하고 좋을까?


작품과 스케줄 관련하여 집중해서 진지하게 대화해야 하는데 마트 안은 시끄럽고, 통화 상황이 어려웠다.

유민이는 까까를 볼 때마다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니 카트에서 떨어질 것 같고, 나는 불안한 와중에 산만하게 통화를 하니 관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오해가 생겼다.


장은 봐야 하는데 통화하느라 사야 하는 물건이 뭔지도 하얗게 날아갔고, 유민이의 까까를 향한 열정에 반해, 일 하느라 그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의 모습에 유민이는 폭풍 울음이 터졌다. 당황한 나는 그 상태로 마트 안을 몇 바퀴를 빙빙 돌았다.


여차저차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사서 계산대에 간신히 도착했을 때 이미 관계자 분과의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졌고, 유민이는 멈출 줄 모르고 더 큰 소리로 계속 울어댔다. 내가 더 울고 싶었다.

일과 육아, 하나라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순간 너무 못나게 느껴졌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야 하는데 유민이가 카트 위에서 생 떼를 쓰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내 뒤로 계산하려고 줄 서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느낌에 정말 죄송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나서셨다.


"아가야, 아까부터 엄마 힘들게 왜 그래~ 아유~ 새댁, 괜찮아요?"


어떤 여자가 마트를 몇 바퀴 계속 돌면서 침을 튀겨가며 통화하는 모습과, 카트 위 불안한 아기의 모습이

이상하셨는지 아까부터 계속 지켜보셨다고 하신다.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 많이 힘들죠?"


그 한마디에 툭, 무너져 내렸다.

질끈 묶은 머리도 다 풀려서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들에 얼굴이 가려져 고개도 들지 못하고 흐느끼는 나를 보며, 계산대 아주머니도 나서셨다.


"물건은 제가 직접 올려놓고 바코드 찍어드릴게요! 아가 돌보셔요 새댁~ 아가가 너~무 예쁘네! 엄마랑 마트 왔어요?" 하며 활짝 웃어주셨다.

뒤에 계신 분들도 같이 유민이를 달래주며, 봉지 속에 물건들을 같이 챙겨주셨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안 나왔다.


"...... 감사합니다.."


간신히 쥐똥만 한 소리로 감사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뒤 마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유민이는 그제야 내 모습이 보였는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유민이 너.. 왜 그랬어.. 엄마 속상해..."

"미안해 엄마.. 으앙!! 울지 마~~ 내가 미안해~~ "

유민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런데 그 날이후, 난 사람들이 더 좋아졌다.

어쩜 그리 다른 사람의 일에 주저 않고 달려들어 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지. 마트 계산대에서 느꼈던 그 따스한 온기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는 누구든 힘에 겨워 비틀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지랖이라고 하든 말든 용기 내어 나도 달려들어 준다.

길 가다가 도, 업무를 보러 가서도,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서도, 나는 사람들을 본다.

관찰하기도 하고, 조용히 지켜보기도 하며 속으로 그들의 하루를 응원해 준다.


누군가의 엄마이며,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배우자인 소중한 그들을.


혹시나 불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의 하루를 생각해 본다.

왜 저렇게 차가울까, 왜 저렇게 짜증이 나있을까? 하며.

분명 그 하루가 좋을 리 없다. 속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니 내면에 좋을 것이 쌓여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럼 또 속으로 응원한다. 정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 작은 것에도 올라오는 짜증들을 이겨낼 수 있는 인생이 되길 바라며.


나는 어제도 오늘도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았다. 역시나 좋았다.

나와 다름이 신선했고,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즐겁다.

나의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내일도 누군가의 삶에, 내가 받았던 '배려'와 '친절'을 선물할 예정이다.

세상 살기, 참 좋다.


나를 더 다듬어 간다면, 세상은 더 좋겠지. 누군가도, 나를 통해 사람이 좋아지고 세상이 좋아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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