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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Dec 12. 2023

소설 [프랑켄슈타인]

마음의 투영

신은 인간에게도 창조의 능력을 주었다. 하지만 온전하게 다 넘겨주진 않았다. 신이 창조한 것들이 완벽하다면,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인간은 뒤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이 남긴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것이 세상에 이득이 되어주는지, 혹여 반대로 해악만 끼치는 것은 아닌지,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가진 창조 능력은 물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러 창조 능력 중 개인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실물이 아닌 인간관계와 관련된 무형의 것이다.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SNS 상의 관계, 이런 모든 관계들은 인간이 서로 소통하며 창조한 것이다. 또한 그 불완전한 창조, 불완전한 관계에 내내 괴로워하며 뒤돌아볼 운명이다. 


[프랑켄슈타인] 은 인간이 만들어낸 흉측한 괴물의 내적 절망과 외적 악행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 공상적인 소설에 다른 차원의 공상을 추가한다고 해서 곡해가 되진 않을 듯하다. 괴물은 실체를 가장한 인간관계 상의 어떤 창조를 상징한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행했던 것들, 말했던 것들은 물리적으로는 금방 끝났을지 모르지만, 관계의 차원에서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게 된다. 예를 들어, 아주 좋아했던 친구나 연인과 어떤 이유로 헤어진다고 그 관계가 곧장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현실에서 만나지 않는 중에도 나의 성격과 행동에 계속 영향을 준다.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잘못을 그냥 잊겠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역시 나의 곁을 떠돌면서 나의 성격을 어둡게, 악하게 바꿀 수도 있다. 프랑켄슈타인을 따라다니며 그의 삶을 파괴하는 괴물과 같다. 


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인 괴물과 맞서보려 하지만, 그가 방치하던 사이에 괴물의 힘과 지능은 이미 인간을 뛰어넘어버렸고 프랑켄슈타인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괴물의 분노는 일견 정당한 면도 있었다. 그의 추악한 외모는 창조자부터 포기했건만 세상 어떤 인간이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의 외로움은 눈먼 장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가 함께 있어줄 수 있을까? 아벨에 대한 편애를 질투해 하나님이 미워서 아벨을 죽였던 카인처럼,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게 만들어든 창조자가 미워 그의 곁을 맴돌며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여나갔다. 프랑켄슈타인은 분노했고, 그 괴물을 죽이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창조물이란 무엇인가? 그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면 창조일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서 인간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창조라고 한다. 본래 자신의 것을 투영하여 만들어 내어야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괴물은 자신만의 인지와 자신만의 지식을 갖춘 별개의 인격체가 되긴 했지만, 그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정신을 투영해 만든 창조물이다. 지식에 대한 갈망은 프랑켄슈타인의 광적인 학구열이 투영된 것이며, 사랑에 대한 요구도 프랑켄슈타인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반대로 괴물은 자신의 조물주가 자신과 같은 분노를 느끼기 바랐기 때문에, 그의 친구와 가족을 하나씩 죽여 나갔던 것이다. 원하던 대로 그들은 함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노를 품고 살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란 다 자신의 거울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마음의 얘기로 돌아가자. 오늘도 작은 문제로 아내와 감정의 골을 만들었다. 내가 이 골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 골은 점점 깊어진다. 인정하자. 이 마음의 모양은 나의 창조물이다. 그리고 내 성격이 투영되어 자기 혼자서 멋대로 커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키웠던 적이 있다. 그 괴물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파괴적으로 또한 어둡게 변해가며, 내 본래의 존재까지 똑같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는 일부러 내 중요한 일을 방해하였고, 내 소중한 관계를 하찮게 느끼게 만들었으며, 본래 그 괴물을 만들었던 계기를 향해 공격성을 충동질했다. 나는 그 괴물에 한참을 휘둘렸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나의 창조물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고, 얼마든지 내 창조물을 보듬어 다른 성격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러니 오늘도 생각해 봤다. 너무 늦지 않게 이 골을 보듬어주자. 다행히 '골'이라는 창조물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괴물은 이런 요구, 저런 요구를 계속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가 본질적으로 바랬던 것은 창조주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무관심한 부모 아래의 자식은 얼마나 처량한가?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괴롭혔던 창조주가 막상 죽게 되니 그 역시 죽음을 택하였다. 내가 만든 것들도 나를 따라다닌다. 사실은 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지만, 보이는 모습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감정으로 서술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여러 창조물들은 한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제대로 보아주고 알아줄 때까지 성가시게 따라다닌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것과도 같다. 그들의 좋아 보이는 모습은 부모의 좋은 정신이 투영된 것이다. 그들의 못돼먹어 보이는 모습도 사실은 부모의 어두운 것이 투영되었음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나를 괴롭히는 자에게 살의를 품으면 그의 마음속에서도 적의가 더 커진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함께 사랑해 줄 때, 받은 사랑도 내 것이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식 같은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금이라도 사랑해 주려 노력했어야 한다. 그 흉측함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자신의 내면 어딘가 있던 것임을 깨닫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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