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회의 제1차 분열
1453년 4월 5일 해뜨기 1시간 전, 드디어 큰 굉음을 내며 개전을 알렸다. 축성 이래 스무 번도 넘는 외세의 포위 공격에서 끄떡없던 성벽이었다. ‘로마누스 문’이 파손됐고, 특히 비잔틴(동로마) 제국 천 년을 지켜온 테오도시우스 삼중 성벽도 뚫렸다. 하룻밤 사이 금각만을 가로막은 30t 쇠사슬을 피해 제노바 령 갈라타 오른쪽 언덕으로 배를 끌어 올렸다. 이렇게 골든 혼 안 깊숙이 배치한 72척에 나누어 탄 병사들이 양편에서 협공했다. 바다를 연해 상대적으로 방벽이 허술했던 5.6km가 다시 전선으로 확대되었고, 콘스탄티노플(옛 그리스 도시 이름으로는 그리스어 ‘비잔티온’, 라틴어로 ‘비잔티움’이라 불렸다)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알프스 횡단에 뒤지지 않은 메흐메트 2세의 전략적 결단이 빛을 발한 것이다.
5월 29일 새벽 2시, 드디어 오스만군의 정예 예니체리 부대는 환호성을 올렸다. “성이 무너졌다! 알라는 위대하다!” 신의 명령에 따라 옮긴 동로마(비잔틴 제국)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렇게 정복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지 무려 1,123년 18일 만에 이교도 이슬람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나마 54일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용병대장 유스타니아니 덕분이긴 하지만, 결국 그도 도망쳤고 홀로 남아 사투를 벌인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로마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메흐메트 2세는 시체 더미 속에서 황금 독수리 문장이 수 놓인 군화를 신고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황제의 신원을 확인하고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비잔티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목숨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성 소피아 성당을 비롯해 콘스탄티노플 내 모든 성당은 두 종교를 같이 모셨고, 각각의 영역이 정해졌다.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또다시 분주해졌다. 이렇게 로마 제국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중해 세계에서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럽사에서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되는 동로마 제국의 종말에 관한 서술이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마지막 과정에서 유럽 라틴국가들의 지원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로마 제국은 476년에 지구상에서 이미 사라졌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대륙을 벗어나 자신들과 연관이 없는 땅에서 벌어진 비잔티움 제국의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동로마 자신은 물론, 동방의 적들에게도 그들은 'Rum'이라 불린 ‘영원한’ 로마 제국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알렉산드로스를 존경한 오스만 제국의 스물한 살 메흐메트(Mehmet)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영토 확장의 대단원을 장식하려 했을 지 모른다. 그는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튀르크 군의 병력은 25만 8,000명. 전투용 갤리선은 비록 18척에 불과하지만, 선박 320척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천혜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성채 총 둘레 20.9km 중 14.4km가 바다(금각만 5.6km와 마르마라해 8.8km)로 둘러싸였다. 난공불락의 육지 성벽 6.5km가 관건인데, 기존 투석기나 파성퇴(攻城用 망치)로는 어림없었다.
그래서 메흐메트는 신종 병기를 준비했다. 에디르네(오스만 제국의 수도)로부터 두 달이 걸려 끌고 온 ‘우르반의 거포(Bacillica)'가 그것이다. 무게 15t(포신 길이 4m 24cm, 구멍 지름 63cm), 석제 대포알 285kg. 50명의 교량 전문가와 200명의 도로 건설자로 구성된 선발대가 미리 거포가 이동할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았다. 60마리 황소가 끄는 30대의 수레에 실려 왔고, 2,000명의 군사가 길옆에서 포신의 균형을 도왔다.
반면 요하네스가 사망했을 때 남은 동로마의 황족은 마누엘 2세의 어린 아들 세 명뿐이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드라가세스)가 1448년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1452년 3월 보스포루스 해협에 요새를 건설한 메흐메트가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자 싸울 수 있는 병력을 헤아렸다. 로마인은 4,970명이 전부였다. 모두 몸을 피했고, 남은 귀족들은 용병을 살 수 있는 재산을 숨겼다. 제노바의 귀족 요하네스 유스타니아니가 지휘하는 용병 2,000명이 합류했다는 사실에서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 콘스탄티누스는 소아시아 출신이다. 니코메디아(오늘날 터키 북서부 코자엘리주의 주도)에 세워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정에서 성장했다. 그래서였을까?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후 줄곧 동방 중시 정책을 펼쳤다.
반면 본거지인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유럽 일대는 방치하다시피 했다. 덕분에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이 지역 게르만족의 분파들은 자신들의 소국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동로마의 권위를 일정 부분 인정했으나, 유대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경시하거나, 깎아내리면서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들을 함께 묶어 동로마 제국을 위해 나서게 할 힘은 유일하게 교회에만 있었다.
그러나 726년 동로마 제국 레오 3세의 '성상 파괴령'으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1054년 상호 파문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결정적으로 십자군 전쟁, 특히 제4차 원정에서 같은 기독교 세력임에도 콘스탄티노플을 침략, 약탈함으로써 기독교 국가 내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은 말년 들어 후계자인 큰아들 요하네스 팔라이올로구스에게 조언했다. 튀르크인과 맞서기 위한 마지막 방안으로 ‘비잔티움이 서방의 호전적인 국가들과 동맹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덧붙였다.
“공의회를 제의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통합) 방책에 대해 논의하라. 하지만 공의회 소집은 되도록 미루면서 회피하라. 그것은 종교적, 물질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틴인은 거만하고, 비잔티움 사람들은 완고하므로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도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이 유익한 훈계를 무시했다. 그러자 황제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슬픈 일이다. 우리의 비참한 시대는 영웅이나 위대함을 허락하지 않는데···”
결과적으로 마누엘의 말은 옳았다. 요하네스 황제가 2년간 수도를 비우면서까지 협상했던 교회 통합은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술탄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앞서 최종 점검했던 정보가 바로 동서 교회의 결합 여부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긴 글을 썼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도 왜 기독교인이 기번을 일러 “로마의 멸망을 기독교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번의 책은 6권으로 이루어졌다. 역사가로 불리기를 소망했던 그는 로마사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바로 이 부분, 즉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정교회가 분열함으로써 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언급에 꽂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